<천검지애 123화>
123화. 신위(2)
악불군은 여민웅과의 싸움 후, 천륭검보에 적힌 글자들에 대해서 생각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분명 각 장의 그림이 한 초식을 이루기 위한 자세들임은 알았다. 그리고 그림에 적힌 글자들을 조합하여 초식을 만들 수 있음도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인 이유는, 아직 완벽한 오의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온전한 초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하나 단편적인 자세만으로 대단한 고수들을 물리치고 있으니, 만약 초식을 이루게 될 경우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보일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초식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과 연관이 있었다. 당시에는 무의식적으로 초식을 만들었지만, 그 덕에 그는 피를 토하며 한동안 기절해야 했다.
물론 일어난 후에 오히려 더 무공이 강해졌음을 알았지만 그런 행운이 언제나 따른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강적들과 싸우고 있는 도중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대로 죽음으로 직결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보통 이 정도의 깨우침을 가지면 당장 폐관을 하거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무공을 완성시키려 했을 것이었다.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미룰 무림인은 없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는 소중한 담수련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에 한번 시도해 보자.’
악불군은 우선 가장 수련을 많이 한 운(雲), 망(網), 선(線), 회(回)의 수법을 동시에 펼쳤다.
검을 위로 올리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던 윤우민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악불군의 정면에 완벽한 검망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검기의 망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너무 뚜렷해서 진짜 검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저, 저게……?”
연무장을 보고 있던 간부들은 검망을 보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담수련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수법에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윤우민의 검을 잡은 손이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수법으로도 도저히 뚫을 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공격도 못해 보고 끝낼 수는 없었다.
입술을 잘근 물은 윤우민은 자신의 최대 절기인 척파격의 수법으로 악불군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타타타타탕……!
검을 내리꽂은 윤우민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마치 수레바퀴 속에 검을 집어넣은 듯 순식간에 수십 번의 격타음을 터지며 어찌 손쓸 사이도 없이 검이 튕겨나가 버린 것이다.
만약 악불군이 조금만 더 공력을 집어넣었다면 그는 검을 떨구고 말았을 것이었다.
뒤로 급급히 물러선 윤우민은 아직도 충격으로 울리고 있는 자신의 검을 보며 큰 충격에 빠졌다.
그때 악불군의 앞을 막고 있던 검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악불군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가 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은 교묘했다. 졌다가 아니라 진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누가 봐도 밀린 사람은 노부이거늘, 지금 이러는 것은 내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악 대협은 모르시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제가 우세해 보였지만 실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노선배님 덕에 저도 많은 것을 배운 날이었습니다.”
“허허허! 악 대협은 이 노부를 완전히 감복하게 하는구먼. 알았네, 이번 비무는 무승부라고 하세. 그런데 방금 사용한 초식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늘 노부가 완전히 검법에 대해 개안(開眼)은 했다네.”
“초식 이름이요……?”
자신도 모르는 초식 이름.
잠시 생각한 악불군은 좋은 이름이 생각난 듯 말했다.
“운망선회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타난 위력과 아주 어울리는 이름이구먼. 기억해 두겠네.”
유우민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포권을 했다. 급조한 이름이었지만 그가 생각해도 괜찮은 이름 같았다.
* * *
“진우량과 장사성이 스스로가 왕임을 칭하고 있다고?”
수많은 장수들이 둘러앉은 군막 안.
거대한 체구의 장군이 보고를 듣자 비웃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미 책봉식까지 한다고 난리인 모양입니다. 대장군님, 저는 대장군님께서 한림아를 떠받드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주원장의 최측근이자 명장인 서달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서 장군, 소명왕 전하는 우리의 주군이다. 불경한 말을 또 한다면 그땐 서 장군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의 질책에 서달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유백온.”
“예, 대장군.”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유백온은 주원장이 가장 믿는 책사였다.
“지금 원나라는 내분으로 자멸을 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몇 년 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만 봐도 지금 그들의 지휘 체계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다음 행보를 말해 보라는 거다.”
“그냥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
“지금 저희는 진우량이나 장사성에 비해 군세가 약합니다. 일부러 반간계라도 펼쳐 원나라와 그들 간에 싸움을 붙여야 할 판인데 스스로 공격을 자초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우리의 전력을 키워 나가면 됩니다.”
“자초했다?”
“원나라에게 우리는 반란군입니다. 당연히 토벌할 상대이지요. 그런데 저희는 여전히 반란군인데 저쪽은 왕이라고 참칭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원나라에서 제거할 순위에서 당연히 저희는 뒤로 밀릴 것입니다.”
“하하하하! 역시 너의 말을 들으면 머리가 맑아진단 말이지.”
주원장은 기분이 좋은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다만 한 가지 준비하실 것이 있습니다.”
“무슨 준비냐?”
“원나라는 어사대라는 황실의 친위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림을 감시하기 위해 어찰단을 운용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의 주 임무는 요인 암살이라고 합니다. 대장군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잇따를 것입니다. 무림인들을 더욱 보강하여 대장군님의 보호에 더 만전을 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림인?”
“예, 아무리 군사들이 많더라도 무림인은 무림인으로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림인이라……?”
중얼거리는 주원장의 눈에 악불군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나서도 전혀 동요 없던 눈동자.
자신의 친위대를 순식간에 다 죽이던 자들을 혼자서 모조리 죽이는 경이로운 무공.
특히 주원장은 솔직한 그의 말투가 너무 믿음이 갔었다.
“유백온.”
“예!”
“전에 내 생명을 구해 준 악불군이라는 무림인이 있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봐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 친구라면 내 등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그의 머리에 확실하게 각인된 무림인은 오로지 악불군뿐이었다.
* * *
연무장의 비무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온 담수련은 악불군을 앞에 앉혀 놓고는 계속 얼굴만 쳐다보았다.
천하에 누구도 악불군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험한 꼴을 봐서인지 나이에 맞지 않게 죽음조차 달관하고 있는 그였다. 거기다 육 관을 통과하면서 고통도 받을 만큼 받아 보았다.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담수련의 의구심 어린 눈빛과 삐치는 입술, 그리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불만스러운 표정은 악불군을 대단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담수련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모른 척하려던 악불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제가 감히 아가씨께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설마 저를 못 믿으십니까?”
악불군의 항변에 담수련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세상에서 누구도 못 믿어도 소군만은 내가 믿어. 좋아! 그럼 숨기는 것은 없다 치고, 말하지 않은 거 있지?”
“아가씨,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십시오. 제게 이런 문답은 너무 어렵습니다.”
“난 소군을 보기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아는데, 왜 소군은 꼭 내가 말을 해 줘야 알아?”
지금 몰라서 물으면서 아주 떳떳하게 다 안다고 말하는 담수련이었다.
‘그럼 물으실 필요가 없지요…….’
악불군도 이제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가 아가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가씨께서 저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걸 지금 알았어? 난 예전부터……?”
따지듯 말하던 담수련이 말을 뚝 멈췄다. 그리고 화제를 급히 바꿨다.
“그 문제는 나도 많이 생각했던 건데, 우선은 다음에 다시 얘기해.”
다음에 다시 얘기할 문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하루 날 잡고 말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예, 그럼 다음에…….”
“본론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소군, 무슨 무공을 익힌 거야?”
“제가 무공을 익힌 상황은 아가씨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랬어. 그래서 다음에 말해 준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고. 하지만 오늘 보고 나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유가 있으십니까?”
“소군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빨리 무공이 늘고 있는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전부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오늘 보니까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늘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불가능이라고 해야 맞았지만, 눈앞에 그렇게 늘고 있는 본인이 있으니 약간의 가능은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께서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번에 그랬지? 내가 알고 싶다고 하면 말해 준다고?”
“아가씨께서 말하라고 명하시면 당연히 말해 드려야지요. 제겐 아가씨의 명이 가주님의 명보다 우선 하니까요.”
순간 담수련의 아미가 좁혀졌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난 소군에게 명 같은 거 못 내려. 소군은 내게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명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부탁이니까 말해 줘.”
“그것을 꼭 아시려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잡는다는 수배 전단 기억나지?”
“예.”
“그동안 계속 수배 전단의 내용에 의문을 품고 있었어. 단지 나를 잡는 것만으로는 너무 액수가 컸거든. 게다가 왜 나만이 아니라 소군까지 꼭 생포를 해야 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우리를 쫓는 자들의 무공이 너무 고절해. 그런 자들이 대륙의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쫓아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아가씨께서 얼마나 중요하신 분인지 스스로 모르셔서 하시는 말입니다.”
“아니야. 분명 뭔가가 더 있어. 그리고 오늘 그게 뭔지 알아냈어.”
“그게 뭡니까?”
“소군이 익힌 무공이야. 아버님께서 누구에게 그 무공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마 그 이유일 거야.”
천하의 어떤 책사가 그 빈약한 정보만을 가지고 이렇게 정확한 유추할 수 있을까…….
담수련의 추리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악불군은 그녀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진정으로 경탄했다. 그동안에도 그녀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할 추리나 계획을 말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악불군은 진심으로 아낌없는 칭찬을 하곤 했다.
그러나 칭찬할 만하니까 칭찬은 했지만 그도 비슷하게 생각한 적이 많아 경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말 놀란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악불군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이러는지 자신이 확인해 본 뒤에 위험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의 눈은 천륭검보가 아닌 그녀의 병세에 대한 걱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뇌가 너무 빨리 활성화되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어떤 대화를 하든 오로지 서로를 위한 생각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둘은 과연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