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25화>
125화. 해룡봉(1)
어려서부터 기재로 불리던 화우성이 그 생각을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뭔가 딴 이유가 있을 거라며 애써 자신을 달래 왔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 말을 들으니 먹먹함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대답이 없냐? 네가 계집 따위에 가슴이 찢어질 때, 네 어미와 동생들은 너 때문에 가슴이 터지고 있을 게다. 이런 터무니없는 고집을 피울 시간에 무공 수련이나 더 하거라. 일개 계집의 호위 따위가 구천마성의 호법을 셋이나 죽였어. 지금 상태로는 담수련을 어떻게 데려온다 해도 넌 지키지 못해.”
화우성은 주먹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꽉 쥐었다. 하지만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 담수련에겐 엄청난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아름다움이 경국지색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치 절세 신공을 쫓듯 그녀를 노리는 자들이 구름 떼와 같다는 말을 그도 들은 바 있었다.
더욱이 철룡세가와 태룡세가까지 나서 그녀를 쫓고 있다는 첩보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도저히 담수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화우성이 말없이 몸만 부들거리고 있자, 화정무가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조급하게 마음먹는다 하여 원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꼭 담수련을 차지하고 싶다면, 다른 오룡세가는 물론 천하의 어떤 세력도 넘보지 못할 실력을 갖추어라. 그렇게 되면 네가 찾지 않아도 담수련이 스스로 찾아올 게다.”
“……아버님, 화룡무동에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화우성의 말에 화정무의 검미가 좁아졌다.
화룡무동은 화룡세가의 가주와 그 후계자만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 있는 연공관이었다. 그러나 화정무도 통과에 실패했을 정도로 대단히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이미 한 번 포기했던 곳이다, 알지 않느냐?”
“기억합니다.”
“그 고통을 이번에는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길 것입니다. 아니, 이깁니다!”
화우성은 담수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곳을 통과하리라 마음먹었다.
“좋다. 시간은 백 일이다. 네가 그곳에서 무엇을 익혀 나올지는 너의 고통과 위험에 비례한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반드시 조사님의 무공을 찾아 익혀서 나오겠습니다.”
“조사님은 전전대 무림 십대고수에 들었던 분이다. 우리 자손들이 부족해 아직까지 그분의 진전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그것만 이어받는다면 누구도 화룡세가를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고집을 부리던 화우성이 생각을 달리 먹고 화룡무동에 들어간다고 하자 화정무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그 이유가 겨우 계집이긴 하나, 동기로써 화우성이 변화한다면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때문에 그는, 화우성이 대단히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 * *
“새벽에 나온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담수련은 두 시진이 걸려서야 중턱에 도착하자 주호택을 보며 말했다.
안내를 맡은 주호택은 의아하다 싶은 정도로 꼬불꼬불 올라왔다.
“신법을 사용하면 좀 더 빨리 오를 수는 있지만, 본문의 조사님들의 사당을 모신 곳이라 가급적 무공 사용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절벽이 막아서서, 안내 없이 올라갔다가는 계속 주위만 돌 수 있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아주 특이한 자연진이 형성이 되어 있네요.”
“자연진이요?”
주호택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문했다.
“성스러운 산답다는 얘기입니다.”
“아! 예.”
“그런데 이곳은 조사님들의 사당도 있다면서 거의 안 올라오시나 봐요. 그 흔한 소로조차 전혀 없네요?”
“저는 이곳 사당의 관리를 맡고 있어 서너 달에 한 번은 올라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일 년에 딱 한 번 산에 오릅니다. 신년 때 조사님들께 지난해의 감사와, 앞으로 있을 새해의 무사형통을 비는 제사를 위해서지요.”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담수련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중원의 산과는 매우 다른 나무들과 깎아지른 절벽들이 만들어 낸 오묘한 절경에 심취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 줄 악불군이라는 남자가 옆에 있는 것도 그녀에게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잠룡세가에서 꿈꾸던 일들이 바로 악불군과 절경들을 보며 천하를 도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오악에게 웅대함이 있다면 해룡봉은 정말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네요.”
“이런 아름다움도 잠시라고 하더군요.”
“잠시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저도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중턱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해령봉의 변덕을 맛본다고 하더군요.”
“변덕이요?”
“저도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올라가셨던 윗대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해룡봉이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는 경고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호호~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주호택 같은 고수가 경고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것은 그 변덕이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담수련은 마냥 행복했다.
‘아가씨께서 남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하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 진짜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구나.’
악불군은 담수련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저곳이 제가 두 분을 안내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입니다.”
잠시 후, 주호택은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해남성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낡은 문이 하나 서 있었다.
“그냥 문만 하나 서 있네요?”
“예, 입구를 알림과 동시에 본 문의 금지 구역이라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외부에서는 해룡봉 자체를 저희가 막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저희가 금지로 지정한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절대 금지 구역입니다.”
“저 안에 역대 해남검문의 조사님과 총문주님들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 있겠군요?”
“그것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유골함까지 다 보관이 되어 있지요. 한마디로 본 문의 뿌리와 같은 곳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곳을 넘어 마음대로 다녀도 되는 것인가요?”
“약초를 구하신다 해서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필요한 약초를 찾으신 후 곧장 내려 오셔야합니다. 특히 약초를 구하기 위해 산을 마음대로 헤집거나 파괴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어찌 함부로 하겠습니까? 그럼 약초를 찾으면 어떻게 할까요?”
“올라가는 것은 안내가 필요하지만, 내려오실 때는 그냥 내려오셔도 저절로 해룡봉 밑에 도착하실 겁니다. 분 문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들과 함께 오시면 됩니다.”
“문주님께 특별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쪽으로 올라가시면 방해물 없이 꽤 올라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를 끝낸 악불군과 담수련이 알려 준 곳으로 사라지자, 주호택은 약간은 불안과 다행히 뒤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과연 백 년 동안 이루지 못한 본 문의 염원을 이루게 해 줄 수 있을까?’
* * *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수십 개의 군막이 세워져 이었다.
중앙에 있는 유난히 큰 군막 안.
원나라 특유의 채두변발을 한 아홉 명의 노인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군막의 천이 올라가며 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는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했다.
“태양구왕, 천주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천주라 불린 노인은 대공이었다.
그는 상석에 가서 앉더니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대들은 아는가?”
모두가 앉자 천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하지만 태양구왕들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분명 태양천 무인들을 중원으로 보내라고 명을 내렸는데 보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대공의 질책에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한 노인이 일어섰다.
“목 전왕, 천주님께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의 말투가 사뭇 도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해 봐라.”
“위대하신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은 저희 태양의 전사들은 대원제국의 건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황실을 도왔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더냐?”
“황실은 분명 저희들에게 권력을 공유하겠다고 약조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천주님의 부족에서만 황제가 나오고, 다른 부족은 조정에서 영향력을 잃어 갔습니다. 더욱이 저희들의 지지를 받던 황족이나 장군들에게 계속 역모의 누명을 씌워 제거하고 있으니, 저희가 더 이상 어떻게 황실을 믿겠습니까?”
“목 전왕, 황실은 태양천에 온갖 혜택을 부여해 왔다. 우리가 무소불위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 황실의 조력 때문이라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대공의 대노한 목소리가 군막을 울리자 또 한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야 전왕입니다. 대원은 물론 태양천 역시 원래부터 열 개의 부족이 모여 만든 조직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그만한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황실에서 태양천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은 압니다. 하지만 우리 구대전왕이 원하는 것은 태양천에서 독차지하고 있는 혜택을 우리 전왕들에게도 나눠 달라는 것입니다.”
순간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 같으면 감히 이런 식의 반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의 힘을 합해도 자신의 권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이어진 황실의 내분으로 인하여, 지금 대공의 힘은 예전과는 달랐다.
물론 그의 무공으로 전왕 한 명 정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즉시 그 전왕이 소속된 부족은 극렬하게 저항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원나라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열 개의 부족의 반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힘과 명예 그리고 태양의 전사라는 긍지로 천하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원 제국이 기초부터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따위 이권 때문에 태양천의 규율을 정면으로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거역이 아니라 저희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말에 주위 여럿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큰일이군……. 황실의 내분이 태양천의 내분으로 옮겨 왔어. 원나라의 미래가 눈에 보이는구나…….’
대공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들이 이러는 것은 그들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의 뜻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벌어진 태양천의 내분이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 * *
주호택과 헤어진 후 담수련을 업고 신법을 펼치며 산 정상으로 달려가던 악불군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멈췄다.
그의 앞에는 천장이 넘는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건 오르기 쉽지 않겠지?”
담수련은 구름 너머까지 이어지는 절벽을 보며 물었다.
“백 장 정도라면 몰라도 이 정도 높이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기다 중간에 구름이 덮여 있어 끝이 어딘지도 감을 잡을 수 없고 시야까지 없다시피 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주 장로님께서 산이 변덕을 부린다고 했어. 하지만 우리는 아직 변덕을 만나지 않았잖아?”
“그렇지요.”
“그럼 누군가 우리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는 얘기가 되니까 분명 길이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절벽에 마주친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절벽과 만나니 어떡하지요?”
해룡봉은 올라갈수록 촛대 모양으로 좁고 길게 위로 뻗어 있었다. 어쩌면 절벽과 계속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잠깐 내려 줘.”
예.”
악불군의 등에서 내린 담수련은 나뭇가지를 하나 들더니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그 주위에 이상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이 동그라미는 해룡봉이고 이 선들을 우리가 움직인 동선이야.”
“그걸 다 외고 계셨습니까?”
“내가 그랬잖아. 여기도 자연진이 형성되어 있다고. 그것도 인공적으로 가미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천연의 자연진이야.”
“전에 천연진이 인공진보다 출구나 입구 찾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인공진은 원래부터 사람이 드나들도록 설계가 되니까 입구나 출구가 확실하게 있어서 찾기가 쉽지. 하지만 자연진은 입구나 출구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어서 찾는다는 보장은 없어. 하나 다행스럽게도, 자연진은 변형이 가능해.”
“그럼 아가씨께서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소군하고 내가 함께 있으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어? 안 그래?”
“맞습니다. 아가씨와 제가 함께 있는 불가능은 없지요.”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막막함에 상당한 고민을 할 상황 속에서도, 둘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