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26화>
126화. 해룡봉(2)
“이렇게 편안하게 식사를 해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악불군과 담수련이 남해영웅문이 있는 우룡산으로 올라간 후, 마진우와 구여풍은 근처 객잔에 머물며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중원도 아니고, 무엇보다 본 막에서 연락 올 일이 없어서 그런가, 편안히 잠도 잘 오는 거 같다.”
그들은 살행이 없는 날에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언제나 긴장 상황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왔다.
자신이 살수이다 보니 주위 사람들이 다 살수로 보여 쉬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는 게 일상이었고, 백인막에서 갑자기 연락을 취할 수도 있어 비문이나 신호가 있는지 계속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위에서 아무 일도 없겠지?”
“해남검문에서 이미 악 대협에게 완전히 빠진 것 같던데, 딴짓이야 하겠어.”
“철룡세가의 패도혈장이 악 대협에게 죽었다는 소식이 중원에 전해지면 난리 나겠지?”
악불군에게 죽은 여민웅은 무림 백대고수에서도 상위에 있는 자로, 구천마성의 호법들보다 더 이름 있는 자였다.
“악 대협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우리에게는 더 좋겠지만, 적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은 된다.”
구여풍이 약간은 심란한 표정으로 말하자, 마진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에게 청부한 어찰단 하나만도 여간한 고수는 버티기 힘든데, 오룡세가에 구천마성까지 적이 됐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심지어, 지금 이 정도로 끝날 거 같지 않다는 게 문제다.”
“무슨 말이야?”
“악 대협 성정을 보면 상대가 누구건 타협이 없어. 특히 담 소저를 건드리면 천하와도 한판 뜰 사람이야. 빙설초를 구해서 중원으로 돌아가면 적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그것도 불안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걱정해? 구 호 너는 신중한 것은 좋은데, 이따금 보면 거의 노파심 수준의 걱정을 하는 게 문제야.”
“그래, 네 말대로 이미 결정한 일이니 두고 보자. 그나저나 빙설초는 잘 구하고 계시려나?”
“없으면 모르지만 있기만 하다면 당연히 구할 분들이지. 담 소저만 해도 무공이 좀 약할 뿐이지, 그 지략이 정말 대단하지 않더냐?”
“하긴, 난 세상에 부막주님이 가장 똑똑한 줄 알았는데 담 소저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니까.”
말하던 둘은 구름이 정상을 가리고 있는 해룡봉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 * *
“저쪽 사이로 날아가 봐.”
악불군의 등에 업힌 담수련은 이곳저곳을 움직이며 산세와 나무 그리고 절벽의 모양 등을 살피더니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그러나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 만난 것은 또다시 절벽이었다.
“이상하네? 아무리 규칙이 없는 자연진이라 해도 이쯤에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담수련의 실망스러운 중얼거림을 듣자 악불군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길이 있어?”
“길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만, 저 위쪽으로 분명 뭔가 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위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력으로는 악불군이 발견한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아?”
“구름의 흐름이 다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절벽들에 걸친 구름들은 완만히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이곳만은 구름이 지금까지와 달리 안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럼 저 구름 있는 데까지는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겠네?”
“다행히 여기 절벽은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완만해서, 올라가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완만?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완만하다고는 그것은 악불군의 관점이었다.
절벽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여전히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팔랐다.
“그래도 올라갔다가 아무 소득 없이 그냥 내려오면 안 되니까, 한 이십 장 정도 천천히 올라가 보자.”
“알겠습니다.”
답한 악불군은 품에서 끈을 하나 꺼내더니 담수련의 허리와 다리를 끈이 떠받치는 형식으로 매듭을 짓고는 자신의 허리에 꽉 묶었다.
“끈은 언제 준비했어?”
“악양에서 아가씨를 업고 달리면서, 끈이 있으면 편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준비했습니다.”
악불군은 당시 갑작스런 기습으로 그녀를 진에 숨기지 못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를 업고 싸움이 난다면 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호호~ 이렇게 업히니까 되게 편하네?”
“신법을 사용하면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 목을 꼭 잡으십시오.”
‘그건 걱정 마! 소군의 등은 너무 편하고 따뜻하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의 목을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혼자였다면 이미 첫 번째 절벽을 만났을 때 올랐을 그였다. 하지만 자신의 자만감으로 담수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담수련이 떨어지지 않게 잘 업힌 걸 확인한 악불군이 땅을 발로 살짝 찼다. 그러자 그의 몸이 두둥실 뜨더니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군, 능공허도를 펼칠 수 있었어?”
“지금 이게 능공허도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이렇게 천천히 공중으로 뜨는 신법을 능공허도라고 한다던데? 소군은 자신이 펼치면서도 몰라?”
“아가씨께서 천천히 올라가라고 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버님께서 소군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아.”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악불군을 보며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룡세가에는 무림 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불리던 담무룡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즐비했다. 거기다 그렇게 현명하다던 문창현까지 있었건만 악불군의 진정한 능력을 알아챈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가씨만 저를 알아주시면, 천하인들이 모두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악불군의 답을 들은 담수련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아가씨, 더 이상 천천히 올라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 악불군이 펼치는 능공허도류의 신법은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다. 사실 이십 장 정도를 이렇게 올라온 것만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 일이었다.
“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소군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아. 이제 빨리 올라가도 돼.”
“알겠습니다.”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 악불군은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 하나를 강하게 밟았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그의 몸이 떠올랐다.
담수련은 기회라는 듯 대단히 놀란 척하며 악불군의 목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 절벽을 차며 오른 지 일각쯤 됐을까……
악불군은 드디어 해룡봉을 감싸고 있던 구름 속으로 진입했다.
“소군, 괜찮아?”
담수련은 생각 외로 시야 확보가 어렵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구름의 흐름이 이상한 곳에 거의 다 와 갑니다. 잠시만 참으십시오.”
“절벽 중간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있었네?”
담수련은 악불군이 한 지점에 내려서자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이제 길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좀 내려 줘.”
악불군은 끈을 풀어 담수련을 내려 주었다.
“어려서 구름에 올라가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구름 속에 들어오니까 구름 같지가 않네.”
담수련은 주위에 보이는 안개 같은 구름을 손으로 잡아 보며 신기해했다.
“저도 어렸을 때는 구름 위에 신선이 산다는 말을 진짜 믿었습니다.”
“유모가 애늙은이라고 할 정도로 어른 같았던 소군이 그런 귀여운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야?”
담수련은 재미있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악불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알기로는 담수련 역시 애늙은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구름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난 푹신푹신한 솜이불 같을 거라고 생각했지.”
“저보다 어리신데도 더 어른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그거 칭찬이야?”
담수련의 반문에 악불군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곳에서 길을 발견 못하면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빨리 주위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말 돌리는 것을 보니 칭찬이 아니었나 보네?’
담수련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 역시 시간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소군, 주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온갖 기이영초가 있다는 무릉도원이 여기인 거 같은데?”
주위를 살피자마자 담수련이 놀란 듯 말했다.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약초들이 사방에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것들이 모두 약초입니까?”
“응, 그런데 무릉도원은 아니네.”
“어떻게 아십니까?”
“기이영초라고 했는데, 이런 것들은 귀하기는 해도 영초 소리 듣기에는 많이 부족하거든. 이 약초는…….”
담수련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약초들에 대해 알려 주기 시작했다. 외우는 데 특이한 재능이 있는 악불군은 그 많은 약초들의 효용을 모두 머리에 기억해 두었다.
그렇게 설명을 하며 안으로 걸어가던 담수련의 앞을 악불군이 가로막았다.
“왜?”
“앞에 제법 큰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
담수련은 고개를 살짝 빼고는 앞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구름사이로 시커먼 동굴 하나가 보였다.
순간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든 것이다.
“소군, 어쩌면 우리가 생각을 잘못했을 수도 있겠는데?”
“무슨 생각 말입니까?”
“극양의 지역에 있는 극음의 장소에서만 자라는 빙설초. 이름까지 빙설초라서 해룡봉의 정상에 있다는 만년빙설이 있는 곳에 빙설초가 있다고 생각했잖아?”
“그랬지요?”
“사실, 그게 계속 의아했거든. 새편작 어르신께서 남기신 의서에 의하면 어떤 영약이라도 뿌리는 땅 속에 있어야 한다고 했어.”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의아했다는 거야. 만년빙설이 있다면 땅이 없을 것 아니야?”
“만년빙설 밑에 땅이 있겠지요.”
“내가 알기로 만년빙설은 얼음의 두께가 십 장, 이십 장씩 한다고 했어. 그런 두꺼운 얼음을 뚫고 뿌리는 내릴 수 있을까?”
“…….”
악불군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양의 지역에 있는 극음의 장소. 그런데 극히 추운 지역도 극음이지만, 깊은 땅 속도 극음이 되거든.”
“하지만 여기는 깊은 땅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땅의 기준이 어디겠어? 거죽이잖아?!”
“그렇지요.”
“해룡봉 꼭대기에서 여기까지 하면 굉장히 깊은 땅 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약초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곳 어디엔가 약초들을 잘 자라게 하는 뭔가가 있다는 의미야. 빙설초가 아무리 특이한 약초라 해도 결국은 약초잖아.”
“그럼 빨리 저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보지요.”
담수련의 추측이 틀린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 악불군은 즉시 말했다.
만약 없을 시에는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사흘이라는 시간은 그가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
시커먼 동굴 안, 자신의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굴 안은 특유의 종유석과 튀어나온 바위들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닥까지, 시야가 훤해도 조심해서 걸어야 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이 다 보이는지 거침없이 사방을 뒤지고 있었다.
‘분명 이 근처라고 하셨는데, 왜 없지?’
초조한 표정으로 동굴 곳곳에 손바닥을 대 보던 여인은 갑자기 무엇인가 느낀 듯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이곳에 사람들이 나타날 리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상당히 거리가 있는지 동굴의 메아리로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사람의 목소리였다.
“소군! 생각보다 동굴이 복잡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담수련과 악불군의 목소리였다.
여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저들이 여길 어떻게 온 거지?’
여인은 가까워진 듯 아까보다 약간 더 선명하게 들리는 젊은 여인과 남자의 목소리에 더욱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어머!”
“발 조심하십시오.”
“되게 미끄럽네?”
“안 되겠습니다. 제 손 잡으십시오.”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좋으면서도 덥석 그러기는 좀 부끄러운 듯 말을 끌었다.
예전에는 악불군의 손을 잡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근래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명목하에 안기기도 하고 업히기도 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손잡는 것이 괜히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저것들 뭐하는 자들인데 여기까지 와서 애정 행각질이야?’
여인은 그런 쪽으로 굉장히 예민한 듯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저 이 시간이 즐거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