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27화>
127화. 변화하는 정세(1)
“아가씨, 이건 아니지요?”
악불군이 약초 하나에 횃불을 비추며 물었다.
“빙설초는 바닥이 차고 축축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어. 거긴 말라 있잖아.”
‘빙설초?’
둘의 대화를 듣던 여인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빙설초를 찾기 위해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어둠 너머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그녀가 있는 통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소군, 이 근처일 것 같아.”
벽을 손으로 만지며 걷던 담수련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땅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직감하고는 말했다.
“아가씨, 말씀을 따르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니, 이곳이 책에서 본 빙정이 존재하는 곳 같습니다.”
빙정은 땅 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얼음 굴을 말했다. 빙정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지극히 추운 곳이 근처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해룡봉의 정상에 만년빙설이 존재하니 그 조건은 충족이 되고도 남았다.
“외부의 차가운 기운이 지맥을 따라 흐르다 막히면, 그 한기가 외부로 발산하지 못해 그곳에 빙정이 형성된다고 했어. 이제 이대로 기운만 따라가면 빙정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예, 빨리 찾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빙정이 있다고 빙설초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악불군의 마음은 여전히 급했다.
“그런데 이곳은 지금까지보다도 더 크네?”
악불군이 횃불로 사방을 비추자 담수련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동안 이어져 왔던 동굴들은 그저 통로였지만, 이곳만은 상당히 큰 공동(空洞)이 형성되어 있었다.
거기다 바닥과 벽, 심지어 천장까지 기이하게 생긴 버섯과 풀들이 자라 있어 빙설초를 찾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저쪽으로 통로가 아직 있는데요? 동굴이 여기가 끝이 아닌 모양입니다.”
악불군은 자신들이 들어온 쪽의 반대 방향에 또 다른 통로가 이어져 있자 약간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이런 곳이 계속 나타난다면 약속한 삼 일 안에 빙설초를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 빙설초는 이곳에 있어.”
하나 담수련은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합니까?”
“최소한 빙설초가 아니라도 내게 도움이 되는 약초가 있는 것은 분명해.”
그녀는 공동 안에 들어선 후, 언제나 답답하고 불안하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의 오음절맥에 도움이 되는 뭔가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담수련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악불군도 숨을 들이켜며 냄새를 맡아 봤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오음절맥을 지닌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것들이 이제야 손을 놓네!’
둘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여인은, 담수련이 바닥을 조사하기 위해 악불군의 손을 놓고 쪼그리고 앉자, 그제야 불편한 표정을 풀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 뭔가 대단히 안 좋은 선입견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녀와 악불군과의 거리는 겨우 십여 장 거리였다.
악불군은 주위를 경계하는 것이 아예 생활화가 되어 있었다. 절대 외인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이 동굴 안에서도 그는 주위를 계속 경계하고 살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었다.
반각쯤 더 지났을까……
“소군! 이 약초 어떻게 생각해?”
바닥의 이곳저곳을 만지며 여러 약초와 버섯, 그리고 이끼 등을 살피던 담수련이 뭔가 발견한 듯 물었다.
담수련이 가리킨 약초를 본 악불군의 얼굴이 펴졌다.
“새편작 어르신이 말씀하신 빙설초와 상당히 비슷한데요?”
“소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그럼 이게 빙설초 맞을 거야.”
“그럼 빨리 캐셔야지요?”
“이상하게 이거 하나밖에 없어. 우리가 이거 가져가면 빙설초가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아가씨 때문에 사라지겠습니까? 이렇게 한 뿌리밖에 없으니 귀한 것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그렇겠지.”
악불군의 말이 힘이 됐는지 담수련의 얼굴이 펴졌다. 그리고 품에서 젓가락 크기의 나무막대를 꺼내 빙설초 주위를 파기 시작했다.
새편작의 의서에 의하면 빙설초는 캐는 것도 복잡했다. 약초에 쇠나 날카로운 것이 닿아도 안 되고, 특히 뿌리는 잔뿌리조차 아무 손상 없이 안전하게 캐내야 했다.
그러나 빙정이 존재하는 땅답게 흙이 꽁꽁 얼어 있어, 나무막대로 땅을 파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가씨, 제가 하겠습니다.”
“안 돼. 이건 섬세한 손길이 필요해. 약초의 잔뿌리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저도 아가씨 생각보다는 섬세합니다.”
“호호호~ 이따금 소군이 말하는 걸 보면 너무 귀여워.”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동굴조차도 담수련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퍼지자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분은 아가씨이십니다.’
주위 상황이 어떻든 같이만 있으면 그저 좋은 둘이었다.
‘감히 본 궁의 보물인 빙설초를 훔치려고 해! 아주 간덩이가 부은 자들이군. 도대체 해남검문은 어떻게 통과한 거지?’
빙설초를 캐러 온 건지 아니면 둘이 애정 행각을 펼치려 온 건지, 보는 내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둘을 보며 여인은 점점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와, 됐다!”
한참을 걸려 드디어 빙설초를 캐낸 담수련은 너무 기쁜지 두 손을 올리며 환호를 했다.
휘익~
그때 한 줄기 강한 바람이 그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불군은 대경한 얼굴로 급히 담수련을 품에 안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웬 놈이냐!”
악불군은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웬 놈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무단 침입도 모자라 감히 빙설초까지 훔치려고 해!”
악불군은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자 검미를 찌푸렸다.
날렵한 몸매에 긴 머리, 분명 여인이었다. 하지만 두꺼운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라면 웬만한 면사를 꿰뚫어 볼 수 있을 텐데, 볼 수 없는 걸 보니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산에 주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 빙설초는 스스로 자라는 영초이거늘, 마치 개인 소유물인 양 얘기를 하시는군요?”
“닥쳐라! 보아하니 모르고 들어온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끝낼 것이니, 당장 동굴에서 나가라.”
여인은 생각 외로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악불군도 굳이 싸울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소군.”
“예.”
“빙설초 뺏겼어.”
“예?”
“내 손에 분명 있었는데 그냥 사라졌네.”
악불군은 여인을 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은 그쪽이군요. 좋게 말할 때 빙설초를 돌려주시지요.”
하지만 여인은 악불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품에서 비단천을 꺼내 빙설초를 싸, 그대로 품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보내 줄 때 가라.”
악불군은 어떤 일에도 싸우는 것은 싫어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바로 담수련이 연관된 일이었다. 더구나 빙설초는 그가 담수련을 구하기 위해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유였다.
악불군은 등에 맨 대나무를 담수련에게 넘기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공격을 시작하면 빨리 진을 치고 숨어 계십시오. 저 여자 대단한 고수입니다.]
[알았어.]
담수련이 자신의 주위에 대나무를 꽂는 것을 본 악불군은 그대로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끝내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여인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악불군의 검을 받아쳐 갔다.
하나 십 초도 지나기 전 여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악불군이 자신의 공격을 오 초도 받기 어려울 정도의 무공 수준이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검과 검이 충돌할 때마다 그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악불군에게 내공에서 밀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이 밀릴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그녀는 계속해서 밀리는 자신의 검을 보며 경악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악불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인의 무공이 사도비류를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신법이 어찌나 고절한지, 악불군의 검으로 그녀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빙설초만 놔두면 다치게 하고 싶진 않소.”
악불군은 계속 이런 공방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만약 그녀가 말을 안 들으면 더 강한 압박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목숨까지 취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여인은 악불군의 말에 화가 났는지 더욱 날카로운 공격을 해 왔다.
콰광!
챙! 챙!
다시 오 초가 지났다.
여인은 자신이 아는 최고의 절초를 사용했음에도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상대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악불군은 더욱 강하게 몰아붙여 그녀를 제압하고 싶었다. 하나 공력을 더 올리자 동굴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포기하고 말았다.
동굴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였다.
그렇게 다시 오륙 초가 더 지나자 여인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밖을 향해 쏜살같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서라!”
악불군은 그녀가 도망을 치자 다급하게 뒤를 쫓았다. 전력을 다해 추격을 했지만 그녀의 신법이 너무 빨라 쉽게 거리를 좁히지는 못했다.
동굴을 굽이굽이 돌아 밖으로 나온 곳은 악불군과 담수련이 들어갔던 평지와는 또 다른 곳이었다.
밖으로 나온 악불군은 거리낌 없이 전 공력을 뽑아 다리로 보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뜨더니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뭐야? 저거 왜 갑자기 저렇게 빨라지는 거야?’
여인은 악불군의 신형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저, 저, 저거…….”
뒤를 쫓던 악불군이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었다.
이곳 역시 절벽에 형성된 평지였다. 그래서 악불군은 그녀가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 결국 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자살을 할 생각인지 낭떠러지 앞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내달려 버린 것이다.
급히 낭떠러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악불군은 밑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밑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이 도착했던 곳보다도 높은 곳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담수련만 없었다면 악불군도 앞뒤 재지 않고 뛰어내렸을 것이었지만, 그녀를 놔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귀를 기울였다.
혹시 어떤 소리라도 들릴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진짜 소리가 그의 귀에 잡혔다.
“뭐야, 저건?”
하얀 물체가 구름을 뚫고 비상하고 있었다.
‘학?’
악불군은 하얀 물체가 집 크기의 커다란 학인 것을 보자 얼굴이 구겨졌다. 그 학의 등에는 면사를 쓴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다급해서 그냥 가지만, 추후에 다시 만나면 오늘 같은 용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악불군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비상하더니 크게 소리쳤다. 그냥 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는지 큰 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피융!
순간 악불군의 검이 공중으로 뜨더니,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파공음을 토해 내며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이기어검?’
여인은 악불군의 검이 빠른 속도로 그녀를 형해 날아오자 깜짝 놀라 학의 목을 잡아당겼다. 학도 영물답게 위험을 감지하고 급하게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학의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악불군의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벗어난 학은 하늘로 차고 오르더니 바다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검을 회수한 악불군은 순식간에 점으로 변해 버린 학을 보며 입술을 잘끈 씹었다.
그동안 많은 싸움을 하면서 살인도 했지만 지금처럼 분노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빙설초를 빼앗긴 것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 실수했어.’
학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며 방향을 확인한 악불군은 급히 뒤를 돌아 동굴로 달려갔다.
담수련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워 둔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인연……
선연일지 악연일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