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28화 (128/472)

<천검지애 128화>

128화. 변화하는 정세(2)

절강의 지배자로 모든 사람에게 경외를 받던 잠룡세가의 정청.

그곳에 많은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잠룡세가의 간부회의는 언제나 격론이 오가는 열기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오늘은 열기는커녕 냉기만 흐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문창현이 세가에 닥친 여러 중요한 사안을 설명했고, 호법과 장로 등 간부들이 질문과 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바로 태사의에 자리 잡아 그들의 갑론을박을 듣던 담무룡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금잔화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간부들의 모습도 상당수가 바뀐 상태였다.

“문 군사.”

듣고 있던 금잔화가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문창현을 불렀다.

“예, 군주님.”

“잠룡세가의 간부 회의가 원래 이렇게 무미건조했나요?”

“그게 무슨?”

“지금 반군을 돕는 중원 무림 세력이 절강에 들어왔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의논 중입니다.”

“무슨 의논이요?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반 시진이 지났어요. 제대로 되고 있었다면 지금쯤은 결정을 내리고 그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요?”

“예전에도 간부 회의를 하면 최소 한 시진은 결렸습니다.”

“문 군사! 내가 말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에요. 지금 보면 문 군사는 들어온 정보를 도식적으로 읽고만 있어요. 다른 간부들도 대부분 침묵을 하고 있고, 묻는 간부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만 묻고 있잖아요? 이게 제대로 된 회의냐고 묻는 겁니다.”

“…….”

금잔화의 질책 어린 말에 문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담무룡이 사라진 후 잠룡세가에 활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 호법.”

“예.”

금잔화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방조위가 불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방 호법은 당장 무력 집단을 소집해, 우선 항주에 들어온 무림 세력을 색출해서 제거하세요.”

“당장 말입니까?”

“그럼 당장이지, 언제까지 두고 볼 생각인가요? 그들을 빨리 제거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절강도 반란군의 침공을 받게 될 거예요.”

“나간다 해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절강은 반란군도, 무림 세력도 들어오지 못한 가장 견고한 지역이에요. 내가 특별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예전처럼만 하라는데, 어째서 못한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거지요?!”

금잔화는 답답한 듯 소리쳤다.

북진을 계획하던 유복통이 차칸 테무르에 의해 패퇴한 후, 원나라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가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반격을 할 시간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변수가 나타났다. 태양천이 대공의 명이 내렸음에도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의 직계 수하들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대공이 직접 태양천으로 떠나자, 다시 정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복통의 세력을 흡수한 진우량과 장사성이 스스로 왕을 칭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곳이 절강성이었다.

산동과 광동과 더불어 중원 삼대 무역항 중 하나인 절강은 예로부터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어느 세력이건 가장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동안은 잠룡세가에서 원체 탄탄하게 장악하고 있었기에 반란 세력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잠룡세가와 싸우는 순간 너무 큰 피해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무룡이 사라진 지금, 잠룡세가의 절강에 대한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절강성 곳곳에 세워져 모든 무력과 상행위를 감시하던 지가(支家)들도 상당수가 이탈했고, 협력 세력들은 눈치만 볼 뿐 예전 같은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모르는 담무룡의 비밀 정보원들의 첩보가 사라진 것이 엄청난 타격으로 돌아왔다.

문창현이 침통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담 가주님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큽니다. 제가 생각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요?”

“저는 여기 있는 간부들만 있으면 가주님께서 없다 해도 잠룡세가를 이끌어 나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잠룡세가는 우리가 아니라 담 가주님 홀로 다스린 것이더군요.”

“문 군사! 담 가주는 잠룡세가의 모든 수하들에게서 평판이 나빴어요.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거역할 경우에는 분명 잔인하셨습니다. 실수도 용납을 하지 않으셨지요. 모든 사람들이 담 가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운 사람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다 두려워지고 있습니다.”

“……뭐가 다 두려워지고 있다는 거죠?”

“지금 잠룡세가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잡을 구심점이 지금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 군사! 여기 있는 간부진이 할 일이 바로 그거 아닌가요?”

“저희들의 역량이 너무 부족합니다.”

“예전에는 담 가주 혼자였다면, 지금은 대공 전하께서 뒤에 계세요.”

“대공 전하의 능력을 우리 빼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요. 거기다 원나라 자체가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간부들의 얼굴에서 문창현의 말에 동감한다는 표정을 읽은 금잔화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의 한숨을 작게 내뱉고 말았다.

‘사기가 너무 떨어졌어. 담무룡의 그림자가 이렇게 크다니…….’

금잔화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약간 진정된 말투로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문 군사님만 남고 모두 가서 일 보세요.”

금잔화의 말이 끝나자 모두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의 회의가 무척이나 지겨웠던 듯했다.

“대공 전하께서 문 군사님을 상당히 아끼시더군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담 가주를 축출할 때 문 군사님께서 담 가주를 피신시키려고 하셨던 것도 다 알고 계세요.”

“대공 전하께서 모르신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배신을 가장 싫어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군사님께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계신단 사실이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의외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시네요?”

“담 소가주나 아가씨께서 안 계신 상황에서 잠룡세가를 안정시키려면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네요. 문 군사님 말처럼 다른 대안이 없기에 문 군사님께 기회를 준 거예요. 그래서 담무룡이 지금 폐관 중이라는 거짓까지 하는 거고요.”

“어쩔 수 없어 하는 거짓이지만,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지금같이 천하가 매일매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폐관을 한다는 것은 누구도 믿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담 가주의 부재(不在)를 공식화하고 문 군사께서 가주 대행을 맡으세요.”

“지가주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르지 않는 지가주들은 제거합니다. 더 이상 그들을 전부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만약 그렇게 되면 본 가의 내분이 천하에 알려질 것이고, 특히 담 가주님의 부재를 알게 된다면 수많은 세력들이 절강을 먹겠다고 몰려들 것입니다.”

“곧 태양천에서 도움의 손길이 올 거예요. 어쩌면 그들이 몰려들 때 한꺼번에 제거하는 것도 손을 더는 일이 될 겁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것입니까?”

“거기까지는 모르셔도 됩니다. 이제 내 말은 전했으니, 나가서 간부들과 의논해서 삼 일 안에 가주 대행에 취임하세요.”

“……아직 담 가주의 심복들이 남아 있습니다.”

“약간의 잡음은 있겠지요. 하지만 대세를 흔들 정도의 자들은 다 제거됐잖아요? 내 말대로 당장 시행하세요.”

금잔화의 강력한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문창현은 잠시 금잔화를 보더니 힘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창현은 제거해 버리시고 방조위와 국대광으로 재편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문창현이 나가자 그녀의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금령사자였다.

“둘은 무공은 높지만 머리가 너무 없어.”

“하지만 문창현은 이미 한 번 배신한 전력도 있고 지금도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태양천의 고수들을 끌고 돌아오실 때까지만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명하신 혈랑사자 말입니다.”

“그래, 어디쯤 간 거냐?”

“강서를 벗어나 광동성까지 진입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아래부터는 어찰단의 정보망이 모조리 망가져,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이냐? 그렇다면 악불군과 담수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광동 쪽에서 아직도 악불군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고 하니, 광동성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금잔화는 잠룡세가에 들어선 이후 모든 비밀 서류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담무룡과 광동 쪽을 연결할 수 있는 서류는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악불군…… 담수련…… 너희들이 거기로 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 거냐?”

* * *

뾰족한 봉우리를 기점으로 백 장 밑까지 얼음과 눈이 완전히 뒤덮인 해룡봉의 정상.

악불군과 담수련은 몇 번을 뛰어 다녔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 찾고 멈춰 섰다.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빙설초를 빼앗긴 후, 삼 일 동안 해룡봉에 있는 동굴을 모두 조사한 둘은 결국 빙설초를 발견하지 못하고 정상에 있는 만년빙설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빙설초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없는 것 같아.”

“……안 됩니다. 여기까지 와서 빙설초를 못 찾고 갈 수는 없습니다.”

“형 문주님과 약속한 삼 일이 됐어. 그분들이 우리에게 배려해 줬으면 우리도 약속은 지켜야 해.”

“후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렸으면 잡을 수 있었는데. 애초에 제가 더 주의 깊었다면, 그 여인에게 빙설초를 도둑도 안 맞고 …….”

악불군은 커다란 학을 타고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떠오르자 분통이 터지는지 말을 맺지 못했다.

‘잡을 수 있었는데…….’

담수련은 악불군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가 이렇게 자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소군 잘못이야? 빙설초를 들고 있었던 것은 난데.”

“아가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적이 아가씨의 손에서 빙설초를 빼앗아 갈 때까지 눈치를 못 챈 제 잘못입니다.”

“그 여자가 대단한 고수였잖아? 내가 너무 방심한 것이 문제였어. 처음부터 소군에게 빙설초를 캐라고 했어야 하는데 내가 괜히 직접 한다고 했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아가씨께서 방심하신 이유 또한, 전부 저를 믿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내 잘못이라는 데 왜 자꾸 우겨!”

누구의 잘못도 아니건만 서로 미안해할까 봐 무조건 자기 잘못이라고 우기는 둘이었다.

그러나 둘이 아무리 그래도 빙설초를 남에게 도둑을 맞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가씨, 추우시지요?”

그때 또다시 눈까지 동반한 매서운 찬바람이 둘을 강타했다.

정상의 바람은 실로 강하고 매서워, 조금만 실수를 해도 정상에서 날아갈 것 같았다. 아니, 악불군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참을 만해. 주 장로님 말대로 이곳은 날씨가 정말 변화무쌍하네.”

지난 시간 동안 빙설초를 찾기 위해 해룡봉 주위를 돌아다닌 둘은 해룡봉의 변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맛볼 수 있었다.

하루에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서너 번씩 내렸고 갑자기 구름을 머금은 회오리바람이 불어 그들의 주위를 감싸 바로 옆에 있는 악불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가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거기다 올라갈수록 차가워지던 바람은 이제 한 번 몸을 스칠 때마다 살을 찢겨나가는 느낌을 줄 정도로 매섭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악불군이 계속 손으로 따뜻한 기를 그녀의 몸속에 불어넣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술은 추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악불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제 품에 잠깐 안기시겠습니까?”

“품에?”

“예.”

그녀는 악불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품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너무 빨리 그러는 것은 너무 속이 보인다는 생각에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럼 너무 추우니까 잠깐만 안길까……?”

담수련의 허락이 떨어지자 악불군은 급히 표의(表衣)의 고름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 그녀를 품속에 꼬옥 안고는 그 위로 표의를 덮었다.

“소군 품은 참 따뜻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몸이 좀 녹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악불군의 허리를 두 손으로 꼭 껴안은 담수련은 빙설초는 이미 잊은 듯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일각 가까이 둘은 몸을 녹인다는 명분하에 꼭 껴안고 있었다.

추우면 그냥 내려가면 될 것을 굳이 그곳에 서서 안고는 추위를 녹이는 이유는 뭘까?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굳은 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