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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29화 (129/472)

<천검지애 129화>

129화. 변화하는 정세(3)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가씨, 이제 몸 좀 녹지 않았습니까?”

“글쎄, 아직 좀 덜 녹은 것 같긴 한데…… 왜?”

“아가씨 몸이 좀 따뜻해진 것 같아서요.”

사실 담수련은 악불군이 내공으로 보내 주는 열기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쿵쾅대는 심장울림으로 몸에서 열이 날 정도였다.

“내가 오음절맥이잖아. 이 정도로 금방 추위 안 풀려.”

“아, 그렇군요.”

더 따듯하게 내공을 올리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까지 꼭 안아 주었다.

이미 둘의 머리에는 빙설초 생각은 멀리 사라졌는지, 아까까지 보이던 조급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법이었다.

또다시 시간이 꽤 지나자 악불군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몸 녹이라고 해 놓고 왜 자꾸 불러?”

“해가 지려고 하는데요.”

“벌써?”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살짝 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시간이 다 됐네. 이제 내려가자.”

악불군은 품에서 빠져나온 담수련의 얼굴은 처음과 다르게,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제 등에 업히십시오.”

담수련은 폴짝 뛰어 악불군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악불군은 그대로 그 높은 봉우리에서 몸을 날렸다.

올라가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내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산 밑에 거의 당도한 담수련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속삭이듯 말했다.

“소군?”

“예.”

“도착하면 학에 대해서는 아무 말하지 마.”

“이제 기대할 것은 그녀를 잡는 것뿐인데, 묻지 않으면 어떻게 찾습니까?”

“해룡봉은 해남도의 성산이라고 했잖아?”

“그랬지요.”

“그런데 그 여자는 우리에게 그 동굴과 빙설초를 마치 자기 거라도 되는 양 얘기했어. 그 말은 어쩌다 한 번 온 것이 아니라 해룡봉과 연관이 있다는 말 아니겠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해룡봉과 연관이 있다면 해남검문과도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해. 그런데 우리가 빙설초를 훔쳐 간 사람이 학을 타고 다니는 여자라고 하면 그 정체를 안 알려 줄 수도 있어.”

“그럼 어쩌시려고요?”

“대화하면서 눈치 못 채게 슬쩍 물을 거야.”

“정말 아가씨는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금방 생각을 해내십니까?”

또다시 나온 악불군의 아부성 칭찬.

그러나 담수련은 그 말이 기쁜지 씨익 미소를 지며 악불군의 목을 꽉 감았다.

* * *

해남도의 뱃길이 칠 일 만에 재개되자 수하를 시켜 배에서 내린 상인 한 명을 잡아 온 흑살마검은 강압적인 눈빛으로 차갑게 물었다.

“살고 싶으냐?”

갑자기 마혈을 찍혀 혼절한 상태로 운반된 상인은 공포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전 단지 보따리상에 불과합니다. 가진 돈도 별로 없고…….”

흑살마검은 시끄럽다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해라.”

상인은 나오는 말을 꿀떡 삼키며 입을 닫았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것이다.”

“예, 예! 말씀만 하십시오.”

“해남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뱃길이 멈췄던 것이냐?”

“포구가 배를 접안하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었다고 합니다.”

흑살마검은 당장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포구가 부서진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저, 저, 저도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듣기만 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라.”

“포, 포구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싸움? 누구와 누가 싸운 것이냐?”

“누군지는 모르고, 배를 타고 온 무림인들과 해남검문의 무인들과 싸움이 났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싸움의 승패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을 것 아니냐!”

흑살마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상인은 완전 혼백이라도 나간 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무공을 모르는 양민이 흑살마검 같은 고수의 살기를 견디기는 어려웠다.

“저저저저저저…….”

상인이 말을 못할 정도로 떨자, 흑살마검은 급히 살기를 감추며 달래듯 말했다.

“이번 대답만 정확하게 하면 그냥 돌려보내 줄 것이다.”

“유, 유, 육지에서 온 무림인들이 수십 명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매우 격렬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천호무적검이라는 영웅께서 나서면서 육지에서 온 무림인들이 거의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살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천호무적검이라고?”

그도 이미 악불군이 천호무적검으로 불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제가 듣기로는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간 무림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냐?”

“저, 전 듣기만 해서…….”

“그러니까 듣기만 한 것을 똑바로 말하라는 거다!”

“이, 이,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모두 죽었다고…… 컥!”

“이 미친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단주님이 어떤 분인데!”

불쌍한 상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분노한 흑살마검이 그의 목을 비틀어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사람의 목숨을 벌레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무도함이었다.

그때 밖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수하가 급히 뛰어들었다.

“흑살마검님, 큰일났습니다.”

“뭐냐?”

“얼마 전 해남도로 들어갔던 무림인들 수십이 해남도에서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묘사한 무림인들이 철룡단주님과 같이 들어간 철룡단원들의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죄 없는 상인까지 죽여 가며 부정하던 흑살검마였지만, 수하까지도 비슷한 정보를 가지고 오자 아니라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아는 여민웅은 살아 있다면 분명 이번 배로 누군가를 보내 보고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은 흑살마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우선 귀가한다.”

* * *

“약초를 구하지 못하셨다니, 정말 유감이네.”

형운호는 어느새 악불군과 많이 친해졌는지 하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위와 나이 그리고 배분상 그동안 반 존칭이라도 한 것은 악불군을 상당히 배려해 준 것이었다.

“흔한 약초가 아니니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또다시 올라갈 볼 생각인가?”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조심히 듣던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데 문주님.”

“말씀하시오.”

“악 대협께서 해룡봉에서 집채만큼 큰 학을 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알기로 그렇게 큰 학은 있을 것 같지가 않거든요? 그런데 악 대협께서는 해룡봉은 신령한 산이라서 그렇게 큰 학도 살 것이라며 고집을 피우시는데, 정말 그렇게 큰 학이 해룡봉에서 사나요?”

순간 형운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악 대협께서 진짜 그 학을 보았나?”

“제가 눈이 좀 좋습니다. 분명 학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학이면 남해성모궁의 영물인 선학밖에 없는데?”

“남해성모궁의 선학이라고 하셨습니까?”

“남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분이 계신데 남해성모궁의 봉황성모님이시네. 그리고 선학은 봉황성모님께서 움직이실 때 타고 다니는 영물을 말한다네. 그런데 근래 해남도에는 나타난 적이 없으셨는데?”

악불군과 담수련의 눈이 반짝했다.

봉황성모라면 사해신개에게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새편작이 악불군이 그렇게 찾는 빙설초로 병을 고쳐 주었다는 장본인이 아니던가…….

“혹시 남해성모궁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봉황도에 있지만 배편도 없고 섬 자체가 안개에 싸여 전혀 보이지를 않아, 찾기가 쉽지는 않다네.”

“거기 가는 배는 없겠습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봉황도는 이 근처 어민들이 신처럼 숭배하시는 봉황성모가 계신 곳이네. 그들에게는 성역 같은 곳이라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을 걸세.”

“그렇다면 위치만 제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배를 하나 사서 직접 가 보겠습니다.”

“갑자기 거기를 왜 가려고 하는 건가?”

“빙설초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형운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만약 빙설초가 거기에 있다면 포기해야 할 걸세.”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성모궁은 물론 봉황도에서 어떤 것도 외부로 반출이 안 된다네. 거기다 봉황도에 들어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 최근 수십 년 동안 입도를 허락받은 사람은 없었다네.”

“허락 없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봉황성모는 정파인으로 무림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절대 고수라네. 같은 정파끼리 척을 질 필요가 있겠나?”

“문주님 말씀이 맞아요. 빙설초를 구하지 못하면 그것도 하늘의 뜻이겠지요. 악 대협께서도 너무 빙설초에 집착하지 마요.”

담수련은 더 조르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끼어들어 악불군의 입을 막았다.

[아가씨, 봉황도에 가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알아보면 돼. 괜히 이분들까지 곤란하게 할 필요 없잖아.]

* * *

전체가 산인 섬.

멀리서 보면 마치 봉황이 꽈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봉황도라 불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 버린다는 신비의 섬이기도 했다.

화려한 궁장 차림을 한 여인이 산 정상에 있는 궁으로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궁의 정문을 지키던 여인은 궁장 여인이 나타나자 급히 그녀의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숙였다.

“소성모님, 무사히 귀환하셨군요?”

“사부님 안에 계시지?”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장 여인은 물건이 제대로 있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듯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몇 번 치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성모님! 이렇게 귀환하시니 정말 반가습니다!”

“파파, 나 지금 겨우 사 일 만에 온 거거든요!”

“그것밖에 안 됐나요? 전 왜 이렇게 오래 된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그 면사 좀 벗으세요. 궁까지 돌아왔는데 왜 예쁜 얼굴을 가리고 계세요?”

궁장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그녀는 빙설초를 훔친 후 학을 타고 사라진 면사 여인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서 면사 벗는 것도 잊고 있었네.”

그녀는 면사를 벗더니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름다움이 실로 눈 부셨다.

“호호호! 본 파파가 세상을 살아온 지 어언 백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소성모님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예쁜 게 뭐가 대수라고? 난 예쁜 거 그다지 흥미 없어.”

소성모는 파파라 불린 노파를 흘깃 보며 안으로 사라졌다.

“사부님! 소혜가 왔습니다.”

자그마한 정청에 도착한 소성모는 책상에 앉아 많은 약초를 분리하고 있는 자상한 얼굴의 미부를 보자 어리광을 부리듯 소리치며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둘은 남해의 신으로 불리는 남해성모궁의 궁주인 하추수와 다음 대 성모를 예약하고 있는 소성모 진소혜였다.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애기같이 이러느냐?”

미부는 질책하듯 말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다.

“사부님, 제가 뭐 하나 보여 드릴게요.”

진소혜는 기대하라는 표정으로 품에서 비단 천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뭔데?”

“보세요.”

그녀가 비단천을 펼치자 하추수의 눈이 커졌다.

“비, 빙설초?”

“예! 빙설초예요. 이제 사조님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됐어요.”

“네가 무단으로 선학을 타고 나갔다는 보고를 듣고 혼내려고 했는데, 설마 해룡봉에 다녀온 것이냐?”

“예. 사부님께서 저를 언제나 빼 놓고 다니시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허락받지 않고 행동한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추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음에 얘기하고, 해룡봉은 이 사부가 파파와 함께 한 달 동안 뒤졌는데 발견을 못했거늘 넌 이것을 어디서 찾았느냐?”

“사부님 말씀대로 빙동에 들어가 빙정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있더라고요.”

하추수는 그녀의 설명에도 뭔가 미진한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소혜가 뒤졌다는 빙동 역시 그녀가 이미 십여 차례나 들러 모든 약초들을 하나하나 만져 볼 정도로 세세하게 조사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소혜야.”

“예, 사부님.”

“내가 왜 너를 빙동에 데려가지 않았는지 아느냐?”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빙설초는 강한 음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는 전설이 있다. 네 사조님도 빙동에 빙설초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찾지 못해 새편작이라는 신의에게 부탁을 해서 겨우 얻었어. 본 문의 무공은 여인들이지만 양공에 가까워 음기가 아무 적다. 특히 너는 음기가 거의 없어서 오히려 찾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안 데려간 거다.”

“그랬던 거예요? 그럼 좀 설명을 해 주시지?”

“우리도 못 찾은 것을 너 혼자 가서 찾았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라.”

“그게…….”

진소혜는 머뭇거리다 결국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특히 진소혜가 밀리고 심지어 이기어검으로 보이는 수법을 사용했다는 대목에서, 하추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사실이라면, 자신의 제자가 절세 고수의 원한을 산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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