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30화>
130화. 남해성모궁(1)
“그들이 그곳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당연히 모를 거고?”
진소혜에게 모든 것을 다 들은 하추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예.”
“젊은 남녀였고?”
“남자는 젊었어요. 여자는 면사를 써서 얼굴은 못 봤지만 목소리로 유추하건대 약관 전후 같았습니다.”
“거기다 대화상 남자는 여자의 호위 같았고?”
“이미 다 말씀드렸는데 자꾸 반문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소혜야, 넌 나도 익히지 못한 사부님의 진전을 다 물려받았어.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선 네 자질이 실로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고 하셨다. 그런 네가 호위로 추정되는, 그것도 젊은 남자에게 패했다는 것 아니냐?”
“사부님, 패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그냥 온 거라니까요!”
“그래, 어쨌든 도망을 친 거잖아?”
“도망 아니라니까요!”
“패한 것도 아니고 도망도 아니지만 그자를 이길 수 없었다는 거 아니냐?”
“계속 싸우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빙설초를 취한 마당에 굳이 더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가 이기어검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면 내공 면으로는 너를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다.”
끝까지 자존심을 내세우던 진소혜였지만 여기서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추수는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궁주님, 무슨 일인데 비상 줄을?”
잠시 후 파파로 불린 노파가 중년 여인 둘과 함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열화파파. 지금 당장 궁에 비상을 걸고, 봉황도로 오는 배가 있다면 접근하지 못 하도록 막으라고 하세요.”
“수십 년간 본 도에 접근한 배가 없었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혜가 아무래도 거물을 건드린 것 같아요.”
“사부님, 그자는 제가 누군지도 모른다니까요?”
“네가 선학을 탄 것을 봤다고 하지 않았느냐?”
“……보긴 봤지만.”
“그가 해룡봉에 올라갔다면 남해영웅문의 허락을 받았을 거다. 그렇다면, 선학이 본 궁의 영물이라는 것은 손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여기까지 쳐들어오겠어요? 본 궁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요?”
“그 상황에서 네게 이기어검을 썼다는 것은 반드시 너를 잡으려고 했다는 뜻이야. 그 말은 빙설초가 그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가 다행히 또 다른 빙설초를 찾았다면 가벼운 시비로 넘어가겠지만, 못 찾았다면 분명 온다.”
남해의 신으로 불리는 성모궁의 궁주답게, 하추수는 모든 상황을 마치 본 것처럼 정확하게 유추하고 있었다.
“궁주님, 이기어검이라니 그게 말입니까?”
“소혜가 이기어검을 쓰는 고수와 시비를 벌이고 온 모양이에요.”
“예, 에? 아가씨,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그런 고수와 왜 시비를?”
열화파파는 깜짝 놀란 얼굴로 진소혜를 보며 물었다.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빙설초를 찾는 과정에서 가벼운 마찰이 있었던 것뿐이에요.”
“됐다. 사부님께서 너를 찾으셨다. 가 보거라.”
하추수의 사부는 무림 십대고수 중 한 명인 봉황성모였다.
“예.”
빙설초를 가져온 공으로 칭찬을 한 아름 받을 줄 알았던 진소혜는 오히려 상황이 이상해지자 시무룩해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하추수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소혜야, 어쨌든 잘했다. 네 덕에 사부님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을게다.”
“예! 전 사조님께 가 보겠습니다!”
하추수의 칭찬에 진소혜는 금방 기분이 풀렸는지 크게 대답하고는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열화파파가 입을 열었다.
“……궁주님, 이기어검을 사용했다면 요즘 광동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악불군이라는 청년이 아닐까요?”
다른 세력들은 남해성모궁이 거의 봉문 수준으로 칩거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천하정세에 대해 계속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맞을 거예요. 소문대로라면 대단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청년인데, 이런 일로 사이가 틀어지게 될까 좀 걱정이네요.”
“사정을 설명하고 이번은 양보해 달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 * *
“남해성모궁은 중원 무림에서 인정하는 정파야. 그들과 척을 지면 진짜 말 그대로 정파 전체가 우리 적이 될 수 있어.”
악불군이 만약 빙설초를 내놓지 않는다면 남해성모궁과 전쟁까지 불사할 의향을 보이자, 담수련은 깜짝 놀라 말렸다.
“정파뿐 아니라 천하 전체가 적이 되어도 전 상관없습니다. 아가씨의 병을 고칠 약초를 훔쳐 갔습니다. 순순히 내놓는다면 모르지만, 안 준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담수련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악불군이 이렇게 화가 난 경우를 본 적이 없었고, 그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내 말 좀 들어 봐.”
“말씀하십시오.”
“소군이 이러는 것은 다 나 때문이잖아? 그렇지?”
“그거야 당연히…….”
“지금 오룡세가와 어찰단만 해도 벅찰 정도인데, 정파까지 적으로 삼으면 내가 얼마나 위험해질까? 빙설초는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세를 지연만 시킨다고 했어. 그런데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 내가 위험해진다면 빙설초를 먹지 못한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아니겠어?”
“…….”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즉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설득이 먹히고 있는 듯했다.
악불군은 은근히 고집이 있어서 한 번 자신이 맞다고 결정을 하면 어떤 당근을 내밀어도 설득이 어려웠다. 하지만 악불군을 간단히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담수련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안전까지 들먹일 경우 그것은 무조건 통했다.
담수련은 거의 다 됐다고 느끼자 슬쩍 면사를 벗고는 악불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이며 말했다.
“난 소군이 내 의견을 따라 줬으면 좋겠어. 그럴 거지?”
입술을 꾹 다문 채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악불군은 담수련의 간절한 눈빛과 애처러운 표정을 보며,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담수련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지금의 눈빛과 표정은 악불군에게는 거의 필살기였다.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봉황도에 가면 아예 입도 뻥긋하지 마. 약속!”
담수련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악불군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 * *
“우리가 봉황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는 싶지만, 선대로부터의 약속이 있어 그렇게 못하니 미안하네.”
악불군과 담수련이 떠난다고 하자, 형운호는 정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하며 미안한 듯 말했다.
“아닙니다. 무림인들의 약조는 목숨과도 바꾸는 것인데, 어찌 저희가 문주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리고 이것 받게.”
형운호는 품에서 두둑한 주머니를 꺼내 악불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포구로 가서 봉황도로 가는 어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네. 하지만 해도는 얻을 수 있을 거야. 문제는 배인데, 이 돈으로 사시게.”
“저도 돈은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내 마음의 선물로 생각해 주시게.”
악불군이 다시 사양하려고 하자 담수련이 악불군을 툭 쳤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모습은 형운호에게 담수련이 악불군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데 충분했다.
“천상신녀 여협께서도 조심히 돌아가시게.”
“문주님을 비롯해 해남검문의 후의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문주님, 성모궁에 연락을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탄 악불군과 담수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호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락해야지. 악 대협과 천상신녀 여협이 배를 사고 진짜 봉황도를 찾아 떠나면 그때 연락하게.”
원래는 누군가 봉황도로 향할 것이라는 첩보만 들어와도 연락을 취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형운호는 악불군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당장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작은 배려이자 미안함이었다.
* * *
해남도는 외부인에 대한 배척이 아주 심한 곳이었다. 말을 걸기도 힘들 정도인데 그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배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악불군은 너무도 쉽게 배를 살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형 문주님께서 무슨 언질을 준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아. 배 값도 형 문주님께서 준 돈이랑 거의 비슷하잖아. 그런데 가겠다는 사람을 못 구해서 어떡하지?”
“해도를 구했으니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배 몰아 본 적 있어?”
“제가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바다는 무서운 곳이라고 했어. 요행만 바라는 것은 위험해.”
“그럼 어떡하지요?”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내가 듣기로 살수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다 배운다고 하던데, 마 대협이나 구 대협은 배 모는 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불러 볼까요?”
“그래, 불러 봐.”
그러자 악불군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다.
“가까이 있어?”
“저기 주루에 앉아 계시는데요.”
악불군이 가리킨 곳을 본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난 안 보이는데?”
“벌써 주루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른쪽 상인 차림을 한 사람이 마 대협입니다.”
“손을 흔들자마자 벌써 나온 거야? 진짜 빠르네.”
“제가 봐도 행동이 정말 빠르기는 합니다. 거기다 주위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도 놀랍고요.”
주루에서 나와 그들 곁으로 걸어오는 동안 둘의 움직임을 눈치챈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자신을 감추는 데 최적화된 그들답게, 악불군과 담수련 앞에 도착한 마진우는 마치 처음 본 사람한테 뭔가를 묻는 듯 말을 걸었다.
“마 대협.”
“예, 아가씨.”
마진우는 어느새 담수련에게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를 자신들보다 위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을 한 것이다.
“배 몰 줄 알아요?”
“배요? 당연히 몰 줄 압니다. 그런데 어떤 배를?”
“저기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 보이시지요?”
“저건 배가 크군요.”
“크면 어려운가요?”
“저렇게 큰 배는 몰아 본 적이 없지만, 뭐 특별할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 호수에서만 몰아 본 거 아니에요?”
“훈련을 내륙에서 받았으니까요.”
“그럼 우리 올 때처럼 갑자기 태풍이 불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배는 몰 줄 아니까, 버티면 어떻게 되지 않겠습니까?”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게 소군하고 똑같네? 원래 남자들은 이렇게 단순한가?’
그녀의 머리에는 해남도에서 올 때의 상황이 그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온 그녀의 판단은, 바다란 함부로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진우까지 얼렁뚱땅 어떻게 되겠지 하는 것을 보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가씨, 무슨 일이나 위험은 상존합니다.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일이라면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구여풍이 담수련이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 듯 슬쩍 끼어들었다.
“좋아요. 그럼 한번 해 보자고요.”
“그런데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봉황도요.”
“봉황도면…… 설마 남해성모궁을 가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거긴데요? 거기는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허락도 받아야 하나요?”
“남해성모궁은 무단으로 침입을 하면 적으로 간주한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배첩이라도 보내서 의향을 물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너무 늦으면 먹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뭘 말입니까?”
“남해성모궁 사람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빙설초를 훔쳐 갔어요.”
“……그럼 지금 그것을 찾으러 가시는 것입니까?”
“그래요.”
“아가씨, 봉황성모는 무림의 십대고수에 드는 초절정 고수이자, 정파에게 존경을 받는 최고의 여협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훔쳤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구 대협, 훔쳐 간 것이 사실인데, 남들이 믿고 안 믿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듣고 있던 악불군이 물었다. 같이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마진우나 구여풍이 이렇게까지 꺼려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인막에서 청부를 받지 않는 무림인들이 약 이십 명 정도 있습니다. 그만큼 강하기도 하고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기에 그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봉황성모는 거기에 속해 있는 인물입니다.”
검미를 찌푸린 악불군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일이 많이 꼬였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