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1화 (131/472)

<천검지애 131화>

131화. 남해성모궁(2)

담수련은 악불군의 표정을 보자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걱정 마. 성모궁과 싸울 일은 없을 거야.”

악불군을 달랜 담수련은 마진우와 구여풍을 보며 말했다.

“두 분이 우리를 도울 선부들을 좀 모아 보세요. 돈은 평시보다 두 배 이상 준다고 하면 한두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반 시진 후 출발할 것이니, 선부를 구하건 못 구하건 그때까지 배로 오세요.”

“예!”

둘이 포구 쪽으로 사라지자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다시 말했다.

“소군.”

“예.”

“지금 소군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은 것 같아. 그러지 마.”

“주의하겠습니다.”

다른 일이었다면 악불군이 평정심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공을 배우기도 전 어린 나이임에도 담수련을 피신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평정심 덕분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담수련의 목숨을 좌우할 수도 있는 빙설초가 걸린 일은 평정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 * *

“궁주님, 해남검문의 형 총문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봉황성모를 위한 약을 준비하고 있던 하추수는 열혈파파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했던가요?”

“우리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소성모가 해룡봉에서 만났던 자는 요즘 강서와 광동에서 천호무적검으로 명성을 떨치고 악불군이라는 자였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요.”

“악불군이란 자의 무공이 형 총문주의 무공을 능가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검을 사용하는데 이기어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검식이 아주 빠르고 현란하여 어느 문파의 유형인지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빙설초에 대한 얘기도 있었나요?”

“예. 급한 환자가 있어 빙설초를 구하기 위해 해남도까지 왔는데, 구하지 못하고 봉황도로 갈 예정이라고 했답니다.”

“……소혜를 만난 자가 확실하군요.”

“예.”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적혀 있던가요?”

“배를 타고 출발했다고 합니다.”

“전서구로 온 거지요?”

“예.”

“그렇다면 배가 출발한 후에 형 문주가 연락했다는 의미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형 문주가 미쳤나? 이렇게 중요한 연락을 출발한 다음에 하다니…….”

“그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한 자인가 보네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내가 명한 대로 시행하세요.”

“형 문주 말대로 그렇게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면, 그냥 물러날까요?”

“어차피 그자의 요구를 우리가 들어줄 수 없다면 방법이 있겠어요? 우선 그자가 하는 행동을 보고 다음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본래 하추수의 성정이었다면, 이런 경우 우선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빙설초는 아주 중요했다.

* * *

남해성모궁에 대하여 들은 담수련은 계속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해룡봉 동굴에 나타난 여인은 다짜고짜 빙설초를 먼저 낚아챘다. 그것도 그녀의 손에서 빼앗은 거니 거의 강도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신성시될 정도로 경외를 받는 정파에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남해성모궁에서도 빙설초가 대단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악불군은 자신의 병에 꼭 필요한 빙설초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해성모궁과 싸웠다가는 그동안 그녀가 악불군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진행해 온 계획에 큰 차질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해남검문과의 혈우와 혈맹으로 의를 나눴던 것도 물 건너갈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세력도 없이 멀리 있는 악불군보다는 수백 년간 우의를 다져 온 남해성모궁이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싸우면 안 돼……. 아니, 시비조차 일어나면 안 돼!’

빙설초는 오직 하나였다.

하지만 둘 모두 빙설초를 간절히 원하는 상황이기에, 만약 만나게 된다면 싸움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담수련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를 계속 고심했다.

“아가씨, 하루는 걸린다고 했습니다. 선실로 들어가서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이 선두 난간에 서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 불안한 듯 다가와 물었다.

“마 대협과 구 대협이 생각 외로 배를 잘 모는데 왜?”

“그래도 제가 돕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한 명의 선부(船夫)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둘 만 일하게 하고 자신만 가만히 있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내가 그렇게 불안해?”

“불안해서가 아니라 조심하는 것이지요.”

“소군은 내 생각 말고 딴 생각은 전혀 안 해? 바다는 육지하고 달라서, 싸움이 나면 우리에게 매우 불리할 수도 있어. 보통은 나보다는 그런 걱정을 해야 맞는 거잖아?”

“아가씨 생각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했는데?”

“그들이 빙설초를 벌써 먹어 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결국 그 생각도 내 생각이잖아?”

“아가씨, 혹시 심기가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담수련의 말투에 섞인 미묘한 짜증을 느끼자, 악불군은 오히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발, 내 심기니 뭐니 그런 거 걱정 말고 소군 자신에 대한 걱정 좀 해 봐.”

“제 걱정도 합니다.”

“무슨 걱정을 했는데?”

“그건…….”

말하려던 악불군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말해 봐야 그것도 결국은 담수련에 대한 걱정이기 때문이었다.

“봐! 말 못 하잖아?”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됐어. 난 그냥 여기에 있을래. 머리를 정리할 때는 선실의 답답함보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좋아.”

담수련은 시선을 바다로 돌리며 말했다.

‘갈수록 아가씨의 감정 변화가 너무 심해. 반드시 빙설초를 찾아야 해.’

악불군은 담수련의 애타는 마음을 오음절맥의 부작용으로 생각했다.

‘정말 바보야! 이미 주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 거잖아. 그런데 왜 자기는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거야!’

하지만 담수련이 화가 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불군을 좋아하기에 생긴 안타까움이었다.

* * *

“공자님! 뭔가 상황에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태극검자는 뭔가 다급한 전갈을 받은 듯 황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어르신이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모습은 처음 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러십니까?”

“반군의 장수들이 요 며칠 사이에 네 명이나 암살을 당했습니다.”

백천학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장수들이라면 무림인들이 호위를 서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대단한 고수였던 것 같습니다. 호위를 서던 무인들까지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될 때까지 장수들의 주위를 경계하던 군사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암살 실력을 지닌 살수를 보유한 곳은 천하에 몇 군데 없지 않습니까?”

“원나라의 어찰단과 백인막 정도가 그런 고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인막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백인막의 살수들은 목표물을 제거하면 무조건 도망칩니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 요인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인이 목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변의 무인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갔답니다.”

“죽은 무인 중, 영웅회 소속도 있었습니까?”

“천풍검객 우도청이 있었습니다.”

“우 대협이면 절정 고수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백천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부님께서 가장 염려하시던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럼 설마?”

“태양천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태극검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중원 무림인들에게 태양천은 공포의 존재였다.

중원 무림이 몰락한 이유는 원나라의 군사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태양천이었다.

그들은 중원에 들어와 암살부터 시작했다. 무림에 이름난 고수들은 모두 그들의 목표가 되었고, 심지어 거대문파의 장로급들까지 그들에게 암살을 당한 수가 기백 명에 달했었다.

암살이 끝난 후, 그들은 본격적으로 중원 무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중원 무림의 완벽한 몰락이었다.

중원 무림의 태두라 불리던 구파일방이 패퇴해 본 산 까지 포기하고 모두 지하로 숨었고, 무림 세가들 중 멸문한 곳이 무려 열 군데가 넘었다.

팔대세가로 불리던 거대 세력조차 네 군데나 그들에 의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면 큰일 아닙니까?”

“이미 제 예상에 있던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늦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다 마련이 되어 있으신 겁니까?”

태극검자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비책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들이라면 혹시 영웅단이 드디어 출동하는 겁니까?”

영웅단은 영웅무단, 영웅검단, 영웅살단 삼 개 단을 총칭해서 부르는 명칭으로, 오로지 태양천을 상대하기 위해 전 무림이 힘을 합쳐 키워 온 중원 무림의 최후의 보루 같은 존재였다.

“태양천을 막지 못하면 이 전쟁은 또 집니다. 그들이 나타난 이상, 영웅단의 출동은 필연적이라고 봐야겠지요. 어르신, 우선 각 반군에 속한 영웅회 회원들에게 지휘자들이 더 이상 희생당하지 않도록 위장 군막을 여러 개 준비 후, 매일 잠자리를 바꾸게 하라고 하십시오. 그들이 출동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태극검자가 나가자 백천학은 자신의 검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태양천! 중원의 원수. 너희들은 이제 살아서 중원을 나가지 못 할 것이다.’

백천학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중원의 상황이 점점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악불군과 담수련은 중원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남해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 * *

“저곳 같은데요?”

해도를 펼치고는 태양의 위치를 계속 가늠하던 악불군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수평선 끝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이 있습니다.”

한참을 보던 담수련은 드디어 발견한 듯 말했다.

“보인다! 그런데 저게 봉황도인지 어떻게 알아?”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가 마치 봉황이 웅크린 모양입니다.”

“소군, 눈이 좋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놀라워, 저게 보인단 말이야?”

그녀의 눈은 조그만 구름이 수평선에 걸친 정도만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제가 눈이 좋아야 아가씨를 노리는 자들을 빨리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군은 뭐든 나와 연결을 하네?”

“제게 아가씨는 천명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담수련은 악불군의 이런 면이 불만이었고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주요인이었지만, 막상 자신만을 위하는 그를 보면 기분이 좋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위해 존재해 주었으면 싶은 여인의 마음과, 그런 그녀 때문에 악불군의 앞날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되는 마음이 혼재된 모순된 감정이었다.

그때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아가씨! 저 앞에 수상한 배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

잠깐 딴생각을 했던 담수련이 놀라 다시 바다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이 층 갑판에서 배를 조종하던 마진우가 외쳤다.

“악 대협, 배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눈에도 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쪽으로 배를 몰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구 호! 좌현으로 약간 돌려.”

‘저 녀석이, 여기가 얼마나 힘든데…….’

뒤에서 배의 방향타를 혼자 작동시키고 있던 구여풍은 투덜댔지만 방법이 없었다. 악불군이나 담수련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운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 명은 필요한 배를 단둘이서 제법 잘 몰고 온 그들이었다.

배가 점점 가까워지자 악불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배에 달린 깃발 때문이었다.

“아가씨, 남해성모궁의 배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응, 내가 봐도 그래.”

담수련의 목소리도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떠나기 전 들은 전언에 따르면 봉황도는 경계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다섯 척이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마중을 위해서라면 안내선 한 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막을 생각 같습니다.”

악불군의 눈에는 그들이 막는다면 뚫고라도 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불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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