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32화>
132화. 남해성모궁(3)
담수련은 악불군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소군, 우리 약속 잊지 않았지?”
그의 손으로 전해지는 이상한 찌릿함.
어려서도 그녀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고, 얼마 전에도 그녀의 손을 잡고 산속을 뛰어 다녔다. 심지어 업고 안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녀의 손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서일까?
오늘 그녀의 손은 평소보다 심장을 더욱 뛰게 하고 있었다.
당황한 악불군은 슬쩍 그녀의 손을 빼며 말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멈추세요!”
배가 점점 가까워지자 선두에 있던 배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신데, 배를 막는 것입니까?”
우선 악불군이 나섰다.
“전 남해성모궁의 외당주인 해상아라고 합니다. 이곳은 본 궁의 영역으로 들어오시려면 허락이 필요합니다.”
“허락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담수련이 물었다.
면사를 쓰고 있지만 저절로 풍겨 나오는 담수련의 귀한 자태에, 해상아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먼저 해남도로 돌아가 배첩을 보내세요. 그러면 저희가 심사한 후 연락을 드립니다.”
“심사에서 거부되면 연락은 주시나요?”
“……그건 따로 안 줍니다.”
“그럼 언제 올지 모르는 허락을 기다리느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네요? 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본 궁의 규율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저희들의 규율도 말씀드려야겠네요. 오늘 저희가 남해성모궁에 입궁하게 된다면 최대한 대화로 모든 일을 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귀궁의 입장만을 고집하신다면 저희와는 적이 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어요.”
해상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천하를 장악했던 원나라의 어찰단이나 중원 무림을 궤멸시킨 태양천조차도 남해성모궁을 협박하지는 못했다.
남해성모궁을 건드리는 것은 남만을 연결하는 뱃길을 포기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여협께서는 지금 남해성모궁과 척지겠다는 건가요?”
“시비는 제가 아니라 귀궁에서 걸었어요. 남해성모궁은 광동 이남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고 중원에서도 모두 존경하는 정파예요. 그런 곳에서 남의 물건을 도둑질했다면 누가 믿겠어요.”
“도둑질이라니! 지금 감히 본 궁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위험한 발언을 계속하실 겁니까?”
“남의 물건을 빼앗아 갔으면 도둑질 아닌가요? 아니군요! 강도가 맞겠네요.”
해상아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만약 하추수로부터 절대 먼저 싸움을 하지 말라는 명을 받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공격을 명했을 것이 분명했다.
“여협께서 자꾸 선을 넘는 발언을 하신다면 저의 인내도 바닥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해 당주님이라고 하셨죠? 그럼 해 당주님께서는 남해성모궁의 물건을 누군가 훔쳐 갔다면 어쩌시겠어요? 그들이 배첩을 보내고 허락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실 건가요?”
“도대체 본 궁의 누가 여협의 물건을 훔쳐 갔다고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
“선학은 남해성모궁의 영물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도둑은 선학을 타고 도망쳤어요. 남해성모궁 사람이 아닌 사람이 선학을 탈 수 있나요?”
“그건…….”
상황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해상아로서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남해성모궁 사람만이 선학을 탈 수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남해성모궁 사람이 범인이라고 자인하는 것이고, 타인도 탈 수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영물을 욕보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왜 답을 못 하시지요?”
“……여협께서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전 보고받은 것이 없으니 더 말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순간 담수련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도 정파와는 대화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본 바로는 역시나 그러했다. 고지식하고 완고하고, 거기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그것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군, 저들을 경악하게 만들 수법 있어? 다치게는 하지 말고,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전음에 악불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민웅과의 싸움 이후, 그는 담무룡이 자신에게 해 준 대법이 정말 엄청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내공이 약해 보이는 이유는 단전에 내공이 모여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전에 모여있지 않을 뿐, 내공은 온몸에 퍼져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장으로 공격할 경우 단전의 내공을 장으로 뽑아 올리면 되고, 검을 사용할 때는 검에 내공을 주입하면 되었다.
게다가 내공이 온몸에 퍼져 있으니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고, 한곳으로 힘을 집중시키는 것도 수월했다.
심지어 대법을 펼친 담무룡조차, 자신의 대법으로 인한 효과를 반만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이 갑자였다.
그런데 악불군은 담무룡도 예상 못한 기연으로 인해 약효를 완벽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절대 고수가 수십 년을 각고의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다는 꿈의 오 갑자의 내공. 지금 악불군은 겨우 약관을 넘은 나이에 거기에 근접하는 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만약 온몸에 내공을 채운 상태에서 비어 있는 단전까지 꽉 채우게 된다면 무림 역사상 없었던 십 갑자의 내공까지도 도달할 수 있는 기초를 확보한 것이다.
물론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악불군의 노력과 깨달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었다.
‘그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 그래야 한다고 하시니 해 보자.’
한 가지 수법을 생각해 낸 악불군은 두 팔을 해상아가 탄 배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순간 악불군이 탄 배가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저를 꼭 잡으십시오.]
하지만 악불군의 전음은 쓸모가 없었다. 어느새 담수련이 벌써 그의 옷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당주님, 저자가 천호무적검이란 자인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 지금 뭐하려는 거지? 설마 우리를 공격하려는 걸까?”
해상아는 부당주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냥 팔만 내밀었을 뿐입니다. 저 거리에서 타격을 줄 수 있는 장법은…….”
답하던 부당주가 말까지 다 못하고 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해상아의 경악에 찬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놀랍게도 그녀가 탄 배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 다, 당주님! 이, 이게 정말 저자가 만든 상황일까요?”
부당주는 물론 배에 탄 모든 여인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절대 고수의 칭호를 듣는 자들이 삼 갑자 이상의 내공으로 만근 바위도 허공섭물로 들어 올린다는 말은 그녀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배의 무게는 만 근이 넘었다.
거기다 상대는 배를 타고 있었다. 이 정도의 힘을 쓴 다면 그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배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야 했다.
하지만 악불군이 탄 배는 그저 물살에 움직일 뿐,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의 배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배까지 보호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악불군의 내공이 삼 갑자를 상회한다는 증거였다.
“우린 당주님이 타신 배를 그대로 부숴 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이 정도만 할게요.”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 물 위로 한 치 이상 떠올랐던 배는 조용히 다시 바다로 내려졌다.
담수련을 보는 해상아의 얼굴은 완전히 핼쑥해져 있었다. 동시에 궁주인 하추수가 절대 먼저 싸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남해성모궁을 존경해 왔어요. 그리고 지금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희 물건을 훔친 자를 계속 비호하신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저희의 입도를 허락해 주시리라 믿겠어요.”
“……잠시 시간을 주세요.”
해상아는 이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리자 우선 시간을 벌기로 했다.
“반 시진까지는 기다릴게요. 단, 우리에게 훔쳐 간 물건을 훼손하거나 없다고 한다면 남해성모궁은 정말 위험한 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구 호, 저게 가능해?]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진우와 구여풍의 얼굴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악 대협의 사문이 어딜까? 어떻게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 주지? 그것도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만 말이야.]
[하여간에 우리가 이번에는 확실한 줄을 잡은 것 같다.]
[나도 동감이다.]
악불군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둘의 눈에는 이제 존경심이 가득했다.
* * *
“궁주님, 해 당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급한 표정의 열혈파파를 보며 하추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솔직히 저도 믿기지 않는데…… 직접 보시고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열혈파파는 작은 쪽지를 건넸다.
전서구를 통해 온 종이인지라 크기는 작았지만 생각보다 자세히 상황이 적혀 있었다.
“파파는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하추수는 속으로 대단히 놀랐지만 일궁의 궁주답게 겉으로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내공이 거의 사 갑자를 상회한다는 말인데, 나이대로 따져 본다면 거의 불가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 당주가 허위 보고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해상에서 막는 것은 이미 틀렸다고 봐야겠지요?”
“지금 싸움이 난다면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해 당주로서는 막기도 힘들 거고요. 제 생각으로는 우선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은 듯싶습니다.”
“불러들였다가 대화가 잘못되면, 한 번도 피를 보지 않았던 본 궁에서 피를 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막았다가 사상자라도 나온다면 대화는 완전히 틀어집니다. 태상궁주님께서도 그런 상황은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하추수는 앞에 놓인 빙설초를 한 번 쳐다보더니 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그리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 당주에게 그들을 입도시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 * *
“소군, 아까 보인 수법이 뭐야?”
“허공섭물이라는 것입니다. 내공을 이용해 멀리 있는 물건을 움직이는 것이지요.”
“아까처럼 배까지 움직이려면 내공이 얼마나 필요한 거야?”
“글쎄요? 사실 전 아직 내공의 수위를 정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왜 몰라? 세가에서 듣기로 육 관을 끝내고 나오면 삼십 년 정도의 내공을 얻게 된다고 하던데?”
“그러긴 한데, 그 삼십 년이라는 것이 제가 보기에 좀 주관적이면서 추상적이더군요.”
“하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기(氣)를 수치화한다는 것이 그렇긴 하지. 어쨌든 아까처럼 하려면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내공이란 것이 연륜이 쌓여야 축척이 되는 거라, 아무리 큰 기연을 만난다 해도 젊은 나이에는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정해져 있다던데……. 소군은 어떻게 그렇게 큰 내공을 지니게 된 거야?”
“제 생각이 맞다면 모두 가주님의 은덕 덕분입니다.”
“아버님께서 하셨다는 그 대법?”
“예, 아마도 그것 때문에 제 내공이 이렇게 일취월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담씨의 종가에서 수많은 대법을 연구하는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대법은 들어 본 적이 없어.”
“가주님께서 저를 위하여 천년성형 하수오와 공청석유까지,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 가장 탁월하다는 약초를 수십 가지나 제 몸에 주입하셨습니다. 맞을 것입니다.”
“몸에 주입했다고?”
“예.”
담수련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담씨세가의 의술은 대부분이 대법과 수술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 의술과는 많이 다른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담씨이기에 공부를 했었다.
‘아버님께서는 소군이 죽을지도 모를 대법을 시술하신 거야…….’
그녀의 놀라운 머리가 이번에도 상황을 정확히 유추해 냈다. 수십 가지의 약초를 주입했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인간의 몸은 아무리 좋은 약도 수십 가지를 한꺼번에 주입하면 견딜 수 없었다. 다행히 악불군은 성공했지만, 만약 그녀였다면 절대로 시술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바보…… 정말 바보야. 사정도 모르면서 은인이라고 저렇게 감사해하다니. 소군, 미안해. 너무 너무 미안해.’
담수련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저절로 올라왔지만 악불군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왜 또 우십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신도 모르게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불군은 그녀의 눈물이 걱정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