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33화>
133화. 열혈파파(1)
둘이 서로 안쓰럽게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이, 해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 대협과 여협께서는 제 배를 따라오십시오.”
“허락이 떨어졌나요?”
정신이 든 담수련이 해상아에게 물었다.
“떨어졌습니다. 봉황도로 들어가는 길에는 암초가 많습니다. 잘 따라오셔야 할 것입니다.”
순간 마진우와 구여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열 명 이상의 선원들이 맡아야 할 조타를 지금 둘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간신히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암초라면 방향을 수시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내가 무공을 배운 이후, 허리가 아프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마진우의 말에 구여풍은 담수련과 함께 선두에 서 있는 악불군의 뒷모습을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조심해. 이젠 우리의 전음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다.]
구여풍의 말에 마진우는 입을 닫았다.
공력이 삼 갑자가 넘는 절대 고수들이 전음까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소군, 봉황도 주위에 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보이십니까?”
“아까 수평선 끝에서 봉황도를 봤잖아?”
“그랬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더 크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야?”
악불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당연히 섬이 선명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안 보이고 구름만 더 짙어져서, 저도 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것도 자연진일까요?”
“저렇게 큰 섬 전체를 숨기는 것은 자연진밖에 없어. 거기에, 아마 대단한 진법의 대가가 거기에 인위적으로 미로진까지 가미한 걸로 보여. 그런 탓에 가까이 갈수록 오히려 섬이 안 보이는 거야.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원나라의 어찰단이 남해성모궁만은 쳐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있었네.”
“나오는 것은 문제가 없을까요?”
“혹시 도망칠 생각도 하는 거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가씨의 안전에 위험이 감지되면 도망을 쳐야지요.”
“소군은 이제 보통 무인이 아니야. 천호무적검이라고! 도망은 안 돼. 무림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전 무림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림인이라 해도 제 명예 따위가 아가씨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소군에게 나 말고 중요한 것이 뭔가 있어?”
“아가씨 빼고요?”
“그래.”
악불군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만났다는 듯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악불군의 모습에 담수련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게 어려운 질문이야?”
“아가씨 빼고 중요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나 빼고 없어? 소군 자신도 중요하고…….”
“아가씨, 요새 왜 자꾸 이런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제게 아가씨는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자꾸 이러시는 의도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도이건 제게 아가씨는 가장 중요하신 분이고, 그것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변하지 않습니다.”
담수련은 정곡을 찔린 듯 답을 못했다. 그녀가 자꾸 이런 대화를 유도하는 이유는 나만 생각하지 말고 악불군 자신도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혹여, 나중에 혼자 남게 될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자신의 의도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난 정말 복 받은 여자인가 봐. 내가 만약 일찍 죽게 돼도 소군이 내 옆에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난 행복할 거야.’
담수련은 다시 가슴이 강하게 두근거리자 시선을 해상아의 배로 돌렸다. 계속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악불군의 품에 안길 것 같아서였다.
* * *
봉황성모의 말동무를 해 주고 있던 진소혜는 시녀의 전언에 밖으로 나왔다.
“사조님과 있을 때는 되도록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궁주님께서 소성모님께 급히 전언을 보내셔서…….”
“사부님께서? 뭔데 말해 봐.”
“악불군이란 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악불군? 그게 누군데?”
진소혜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궁주님 말씀이 해룡봉에서 만난 자 같다고 합니다.”
“뭐야? 이자가 정말 미쳤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지금 어디 있어?”
“섬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자에게 입도 허가를 하셨다는 거야?”
진소혜는 깜짝 놀라 눈으로 물었다.
봉황도는 외부인의 입도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악불군이란 자는 남자였다. 여인만의 문파인 봉황도에 남자가 들어온 것은 일 갑자 전에 딱 한 번 있었다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랬다고 합니다.”
“왜?”
“저야 모르지요.”
그때 안에서 청수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혜야.”
“예, 사조님!”
“무슨 일이냐?”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사부님께서 저 보고 잠깐 오라고 하시네요.”
“둘 다 안으로 들어오너라.”
진소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누구의 명인데 거역하겠는가……
둘이 안으로 들어서자 단아한 백발과 달리, 얼굴은 중년인 정도로 보이는 미부가 앉아 있었다. 누구도 그녀가 나이가 여든이 넘은 봉황성모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소혜에게 보고한 말을 다시 해 보거라.”
시녀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봉황성모는 성모궁에서는 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으니, 그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저, 그, 그게…….”
시녀는 더듬거리며 진소혜에게 전한 말을 다시 했다.
“궁주가 입도를 허락했단 말이지?”
봉황성모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진소혜를 보며 물었다.
“그 악불군이라는 청년은 어떻게 안 것이냐?”
“사실 전 그자 이름도 지금 알았습니다.”
“이름은 몰랐어도 알긴 알았다는 의미냐?”
“그렇긴 한데…… 사조님,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소혜야, 지금 네 말은 나를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무슨 그런 천부당만부당하는 소리를 하세요?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된 건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
“사조님, 해룡봉의 빙동은 본 도의 것이 맞지요?”
“오랫동안 그곳은 우리만이 갈 수 있었다. 선학이 없이는 올라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빙동이 우리 소유라고 하기는 어렵지.”
순간 진소혜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빙동이 남해성모궁의 소유가 아니라면 그녀가 훔쳤다는 말이 성립이 되기 때문이었다.
“혹시 빙설초와 연관이 있는 것이냐?”
진소혜가 빙설초를 구해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봉황성모는, 빙동이라는 말을 듣자 즉시 둘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물었다.
“사실은…… 하지만 빙동에는 제가 먼저 도착했고, 그 둘이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빙설초도 제가 먼저 찾을 수 있었어요.”
진소혜는 결국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봉황성모는 미소를 지며 말했다.
“빙설초는 원래 주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나 너는 무림인이니, 네 잘못도 있지만 빼앗긴 그들의 잘못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구나.”
“그렇지요?”
“그래도 네가 정체를 밝히고 빙설초가 필요한 이유를 말한 후에 그들이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때 실력 행사를 했으면 보기는 더 좋았을 것 같구나.”
다짜고짜 담수련의 손에 있는 빙설초를 빼앗은 것은 잘못이라는 의미의 말에 진소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무공이 그렇게 높았더냐?”
“솔직히 저도 좀 당황했었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싸웠다면 빙설초를 가질 수 없었겠구나?”
“그건 아니에요. 저도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했으니까요.”
“이기어검도 사용했다며?”
“그냥 검을 던진 것일 수도 있어요.”
“그 먼 거리를 던진 후 다시 회수했다면 그게 이기어검이다.”
봉황성모는 갑자기 한 인물이 생각났는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예전에 젊은 나이에 이기어검을 사용했던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이 나는구나. 이제 자초지종을 알았으니 이만 가 보거라. 열혈파파가 이런 일은 아주 잘 처리하니까 걱정 말고.”
“혼 안 내시는 거예요?”
“강호에 나가면 상상도 하지 못할 별의별 해괴한 사건이 수시로 벌어진다. 그 정도로 혼이 난다면 무림인들은 평생 혼만 나다가 늙어 죽을 게야. 걱정 말거라.”
“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진소혜는 봉황성모가 면죄부를 주자 신이 난 듯 일어나더니 시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근래 소혜가 자만심에 빠져서 수련에 게으름을 피운다고 들었는데, 이번 일로 심기일전할 동기 부여가 되겠군.”
봉황성모는 잘됐다는 듯 미소를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봉황도의 포구에 도착한 담수련은 너무나도 수려하고 신비감을 주는 섬의 풍광에 계속 감탄사를 터뜨렸다.
“소군, 여기 정말 너무 아름답지 않아? 무릉도원이 여기라고 해도 믿겠어.”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었지만, 산 곳곳에 피어 있는 과실수에는 먹음직한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이곳에 산다면 굶주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름답네요.”
“무슨 대답이 그렇게 건조해?”
언제나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던 악불군이 상당히 딱딱한 말투로 받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악불군은 봉황도의 풍광보다는 포구에 몰려 와 있는 여인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두가 상당한 무공을 지닌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 보여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소군 마음은 알아. 이런 상황에서 이러는 내가 좀 철없어 보이지?”
“아닙니다.”
“우린 여기에 안 올 수도 있었어. 그런데 왔어. 완전히 우리 자의로. 그렇다면 뒤에 있을 일은 그때 다시 고민하고, 지금은 즐길 것은 즐기자는 게 내 생각이야.”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정말 대단히 아름답군요.”
악불군의 말에 그제야 담수련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소군은 정말 최고의 남자인 것 같아.”
금방 태세를 바꿔 그녀의 말을 따라주는 악불군을 보며 담수련은 너무 행복한 듯했다.
누가 뭐래도 분명 악불군은 담수련에게는 최고의 남자임에 분명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배에서 내리자 해상아가 앞으로 다가와 포권을 하며 물었다.
“배 안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까?”
“저희의 동행 두 분이 계세요. 배를 몰기 위해 같이 왔으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분들은 안전하게 이곳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 도에 발을 디디지만 않는다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건 좋네요. 인사가 늦었지요? 전 부족하지만 강호에서 천상신녀라 불리고 있습니다. 본명은 이유가 있어 지금 말씀 못 드리니 용서하세요.”
해상아는 천상신녀라는 말에 아래위로 한 번 훑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명호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악불군입니다.”
해상아가 자신을 쳐다보자 악불군도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도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겠습니다. 남해성모궁의 외당 당주인 해상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준비가 아주 잘되어 있어요.”
해상아의 뒤에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수십 명의 여인들을 보며 담수련이 슬쩍 비꼬듯 말했다.
우리 단 두 명 때문에 너무 많이 모인 것 아니냐는 의미였다.
“준비한 것이 아니라 본 도는 원래 경계가 완벽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받아친 해상아는 뒤를 보더니 양해를 구하고는 급히 뛰어갔다. 열혈파파가 네 명의 중년 여인을 대동하고 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천호무적검이라고 불리는 악불군이냐?”
신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악불군의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다짜고짜 반말로 물었다.
악불군은 그녀의 무공이 여민웅을 능가한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전 천상신녀입니다.”
열혈파파는 담수련도 한 번 보더니 다시 말했다.
“난 남해성모궁의 호법인 열혈파파다. 배분을 떠나 너희들 나이보다 네 배는 많으니, 말을 놓는 것은 이해하거라.”
하나.
“빙설초만 돌려주시면 저희들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담수련의 도전적인 말에 열혈파파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