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4화 (134/472)

<천검지애 134화>

134화. 열혈파파(2)

“눈망울이 총명하고 부드러운 눈썹을 보니 아주 유한 성격을 가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직설적이구나.”

열혈파파는 담수련의 눈과 눈썹만 보고도 그녀의 성격을 상당히 정확하게 맞추었다. 변하기 전 그녀는 정말 유했던 것이다.

“이미 어르신도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아시고, 저희도 굳이 여기까지 온 목적이 뻔한데,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본 궁이 우스워 보이느냐?”

“남해성모궁을 우습게 보았다면 물건을 도둑질당한 우리가 그 범인이 있을 이곳에 사정조로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도둑질? 지금 도둑질이라고 했느냐?”

“어르신께서는 도둑질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 가는 행위를 도둑질이라고 한답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런데 빙설초가 네 물건이었더냐?”

“저희가 먼저 캤고 제 손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 물건이 아닐까요?”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구나. 네 물건이 되려면 너도 정당하게 누군가에게 돈이나 거기에 상응하는 물건을 지불해야 한다. 너는 빙설초를 얻으면서 무엇을 지불했느냐?”

분명 억지였다. 하지만 반박하기도 만만치 않은 궤변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담수련이 누구인가……

“뭔가를 잘 모르시네요? 돈이나 물건만으로 지불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또 다른 것이 있다는 말이냐?”

“노력과 간절함이죠. 저희는 빙설초를 찾기 위해 삼만 리길을 가로질러서 해남도까지 왔습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어요. 그 정도면 지불을 넉넉히 한 거 아닐까요?”

“본 궁에서도 빙설초를 찾기 위해 해룡봉을 십 년이 넘게 샅샅이 찾았다. 물론 빙설초가 있어야만 고칠 수 있는 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노력과 간절함이라면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어르신이 거짓을 말하시지는 않을 것이니 인정은 해 드리겠어요. 노력과 간절함은 같다고 치지요. 하지만 물건을 누구에게 팔지는 주인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남해성모궁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물건의 주인인 해룡봉에선 빙설초를 저희에게 팔겠다고 결정한 것 같네요. 제 눈에 띄었으니 말이에요.”

“분명 내 듣기에, 소성모님께서 그 동굴에는 먼저 도착했다 들었다.”

“십 년을 뒤지셨는데 못 찾은 것을, 저희보다 조금 빨리 왔다고 찾았을까요? 약초꾼이 약초를 캤어요. 그런데 다른 약초꾼이 나도 너만큼 약초를 찾기 위해 애를 썼으니 나도 주인이 될 수 있다며 그 약초를 빼앗았다면, 그게 도둑질이 아니라고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요.”

‘요것 봐라? 내가 언쟁에서 져 본 적이 없는데 제법이네…….’

열혈파파는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다시 반박을 하려고 했다.

“호법님! 궁주님께서 두 분을 빈청으로 모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빠르게 달려오더니 하추수의 전언을 전했다.

열혈파파는 담수련을 지그시 보더니 말했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구나. 다음에 다시 한번 해보자. 따라오너라.”

[아가씨, 저 어르신 뭘 다시 해보자는 거지요?]

[말싸움을 다시 하자는 것 같은데?]

[말싸움을요?]

[내가 보니까 말할 상대가 없어서 그동안 굉장히 심심했던 모양이야. 나랑 말을 섞으면서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더라고.]

[밖에서 들은 것만 보면 굉장히 엄숙한 곳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면도 있는 것 같군요?]

“뭐 하는 거냐? 이 늙은이가 직접 안내하겠다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냐?”

담수련과 악불군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힘들게 한 게 뭐가 있다고……

둘은 서로를 보며 어깨를 들썩이더니 열혈파파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긴장으로 경직이 됐을 텐데, 둘은 마치 놀러 온 것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 * *

정청에 들어선 악불군과 담수련은 소박한 옷을 입고 수많은 약초들을 펼쳐 놓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한 미부를 보자 포권을 했다.

척 보기에도 기품 있는 모습과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도 때문에, 한눈에 그녀가 궁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악불군입니다.”

“천상신녀라고 합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며 자리부터 권했다.

“난 남해성모궁의 궁주인 하추수라고 해요. 우선 자리에 앉아요. 파파도 앉으세요.”

“네.”

모두가 앉자 하추수는 문 옆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를 보며 말했다.

“차를 내와라.”

시녀는 공손히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천호무적검 악 대협과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천상신녀. 두 분의 명성이 요즘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하추수가 예의를 차리고 운을 떼자, 담수련은 열혈파파와 대화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혜에게 해룡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자초지종은 들었어요. 제가 제자 교육을 잘못해서 두 분께 큰 결례를 했다는 점 사과하지요.”

하추수는 궁주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말 예의 있고 겸손했다.

“궁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저희도 한시름 던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빙설초는 돌려주시겠지요?”

“미안해요. 빙설초는 돌려줄 수가 없어요. 대신 두 분께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 주고 싶어요.”

악불군의 검미가 좁아졌다.

당장 얼토당토않은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담수련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으로 보상이라면 무엇을 말하시는 건가요? 설마 제가 원하는 것은 다 주실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시겠지요?”

“본 궁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드리겠다는 거예요.”

지금 하추수의 제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악불군이나 담수련은 아직 몰랐다.

남해성모궁의 영향력은 광동을 비롯한 중원 남부 지역에서는 절대적이었다.

직접 세력을 가지고 통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 세력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가 남해성모궁의 중재만으로도 멈춘 예는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광동의 절대 세력인 구천마성조차도 남해성모궁이라면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말 그대로 통치하지 않으나 군림하는 세력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으니, 빙설초가 아무리 귀한 약초이긴 하지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궁주님, 그건 너무…….”

“파파, 제가 결정한 겁니다.”

열혈파파도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급히 입을 뗐지만, 하추수의 한마디에 입을 닫고 말았다.

문파에서 장문인의 결정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소성모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밖을 지키던 수하의 보고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라.”

하추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진소혜가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담수련의 눈에 놀라움의 기색이 스쳐 갔다.

면사를 벗은 진소혜의 아름다움은 같은 여자인 담수련조차 감탄할 정도로 예뻤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이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소혜는 들어서자마자 악불군과 담수련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소혜야, 이게 무슨 무례냐? 본 궁에 정식으로 찾아온 손님이다. 우선 인사부터 해라.”

하추수의 질책에 진소혜는 머리를 한 번 숙이더니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포권을 했다.

“남해성모궁의 소성모 진소혜예요.”

“전 악불군입니다.”

“천상신녀라고 합니다.”

그제야 악불군과 담수련은 지척에서 보게 된 진소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악불군 같이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본 것이다. 거기다 면사로 가렸지만 담수련의 눈망울만 봐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유추하긴 충분했다.

더구나 그녀의 몸에 밴 기품과 포권을 하면서도 저절로 풍기는 고아함은, 여자들 사이에서 선머슴처럼 무공만 익히던 그녀까지 여자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느끼게 할 정도였다.

“해룡봉의 일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정말 무모하군요?”

그러나 감탄은 감탄이고 자신이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다.

“무모라고 하셨나요? 이럴 때 사용하는 아주 좋은 사자성어가 있지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하던가?”

“뭐라고요!”

“소혜야! 자꾸 이 사부를 부끄럽게 할 거냐?”

“……죄송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우선 앉아라. 그리고 서로에게 좋은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자.”

부드러웠지만 교묘했다.

옳고 그르고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는 진소혜가 빙설초를 강취한 것을 따지지 말자는 말이었고, 좋은 해결책 역시 빙설초는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주님.”

“말해 보세요.”

“제가 알기로 정파는 정의와 협의를 지향하지만 거기에는 명분과 정도라는 지켜야 할 방식이 수반된다고 들었습니다. 즉, 서로 간에 의견 충돌이 있거나 이익이 상충될 경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는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이었지만 하추수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담수련이었다.

“천상신녀라고 하셨지요? 지금 남해성모궁의 궁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조심 좀 하시지요?”

듣고 있던 진소혜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만, 천상신녀 여협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분명 네가 다짜고짜 빙설초를 뺏은 것은 우리의 잘못이 맞다.”

하추수가 너무 쉽게 잘못을 인정하자 담수련은 감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 문파의 수장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녀는 아버지를 보면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담무룡은 잘못을 인정할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를 죽이는 것으로 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궁주님께서 빙설초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담수련의 질문에 하추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해성모궁을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봉황성모가 아프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다른 세력이 경시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프신 분이 있어요. 그런데 빙설초가 꼭 필요합니다.”

이미 예상했던 답인지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봉황성모님이신 모양이군요?”

담수련의 이어지는 말에 열혈파파와 진소혜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악불군도 벌떡 일어나며 담수련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감히 성모님을 입에 담은 것이냐?”

열혈파파의 외침에 악불군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만약 담수련에게 해를 끼칠 기미가 보이면 당장 손을 쓸 작정이었다.

팽팽한 긴장은 곧 깨졌다.

담수련이 악불군의 손을 잡아 앉힌 것이다.

진소혜와 열혈파파도 하추수의 눈짓에 더 이상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예전에 새편작 어르신께서 빙설초로 봉황성모님의 주화입마를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추측을 해 본 것뿐입니다.”

“……새편작 어르신을 알아요?”

하추수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겠어요?”

“……휴우! 새편작 어르신께서는 얼마 전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토록 찾았건만…….”

하추수는 대단히 실망한 듯 탄식을 했다.

“다행히 제가 새편작 어르신의 유지를 이어받았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진맥을 해 봐도 될까요?”

하추수의 눈이 다시 커졌다.

“천상신녀 여협께서 새편작 어르신의 제자란 말인가요?”

“사제의 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의술을 배우고는 있습니다.”

무림인들에게 진맥을 맡긴다는 말은 목숨을 맡긴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양민들에게는 단순한 맥에 불과했지만 무림인들에게 맥은 몸의 기가 흐르는 길로, 그곳이 제압된다면 고수라해도 무기력하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안 됩니다. 우린 이들의 진정한 정체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전 사조님께서 위험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진소혜가 반대를 하고 나서자, 하추수는 갈등하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상신녀 여협께서는 얼굴을 꼭 가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단지 명호만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봉황성모 같은 궁의 최고 어른의 진맥을 맡기는 중차대한 일을 허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추수의 말이 끝나자 담수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면사를 뗐다.

순간 청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상신녀가 경국지색의 미녀라는 소문은 그들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예상 못한 듯했다.

“소성모님 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열혈파파는 감탄한 듯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실수를 느끼고는 급히 입을 닫았다.

“눈에 총기가 가득하고 얼굴 전체가 부드러운 것이 천성적으로 착한 애로구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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