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35화>
135화. 봉황성모(1)
목소리를 듣자 하추수를 비롯한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악불군과 담수련도 누가 나타난 것인지 직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바라본 문 앞에는, 머리는 새하얗지만 봉황성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어 보이는 미부가 서 있었다.
“천상신녀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예쁜 아이로구나.”
봉황성모는 자상한 미소를 띠고는 담수련을 칭찬하며 자리에 앉았다.
“사부님, 여긴 어쩌신 일로?”
하추수가 놀란 듯 물었다.
“이번 일이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게 어찌 사부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모두 소혜가 실수한 것입니다.”
“애초에 빙설초가 필요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더냐?”
봉황성모는 담수련을 보며 물었다.
“새편작에게 의술을 배웠다고?”
“의술을 배웠다기보다는 유지를 받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한번 진맥해 보거라.”
“사조님!”
봉황성모가 담수련을 향해 손을 내밀자 진소혜가 놀라 소리쳤다.
“왜 그러느냐?”
“저흰 아직 이들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혜야, 정체를 안다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정체를 모른다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봉황성모의 말에 진소혜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럼 결례를 무릅쓰고 진맥해 보겠습니다.”
담수련은 봉황성모의 손목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렸다.
사람의 손목을 지나는 맥은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대단히 많았다.
담수련은 손가락을 반각마다 위치를 바꿔 가며 기의 흐름을 살폈다.
진맥이 너무 오래 진행되자 진소혜는 불안한 표정으로 열혈파파를 쳐다보았다.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열혈파파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담수련 정도의 무공으로는 아무리 치명적인 맥을 잡고 있다 해도 봉황성모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다시 이각 정도가 더 지난 뒤에야 담수련의 손이 봉황성모의 팔목에서 떨어졌다.
“어떠냐? 곧 죽을 것 같으냐?”
봉황성모가 미소를 지며 묻자 담수련 역시 미소를 지며 답했다.
“어르신은 아주 건강하세요. 제 진맥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삼십 년은 충분히 사실 수 있습니다.
“내가 상수(上壽)를 넘어서까지 살 수 있다는 말이냐? 그건 너무 긴데?”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겠지?”
“오래전에 어르신께서는 엄청난 양강의 강기에 내상을 입으셨습니다. 내장이 다 타 버릴 상황에서 빙설초로 그 양기를 중화시키셨지만 몇 가지 지침을 어기셨어요.”
“새편작이 내게 완벽하게 낫기 전까지는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그 금지 기간이 무려 삼 년이나 됐어. 당시 무림 상황에서는 내가 삼 년이나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지.”
“그 바람에 남아 있던 양강의 기가 어르신을 평생 괴롭히셨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가 너무 강해져서,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고 계실 거고요.”
“새편작의 의술을 이어받았다고 하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진맥만으로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다니 말이다.”
“빙설초는 분명 어르신의 남은 양강의 기를 완전히 중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담수련의 이어지는 말에 하추수를 비롯한 남해성모궁 사람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빙설초를 구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낫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말을 안 하기로 약속했던 악불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어르신께서는 무공만 사용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빙설초를 얻지 못하면 몇 년 안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불군이 처음으로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소군,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담수련의 당황한 전음에 악불군은 입을 닫고 말았다.
“악불군이라고 했나?”
봉황성모의 질문에 악불군은 담수련을 슬쩍 봤다. 그리고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포권을 하며 말했다.
“말학 후배가 성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습니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방금 자네의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네. 무공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수십 년을 더 살 수 있는 나와 빙설초가 없으면 몇 년 안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무림인이네. 무림인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다면 그게 바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고 죽었다는 의미와 같다 한다면, 세상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 천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죽은 것과는 엄연히 다르겠지요.”
“나 자신이 무공을 사용 못 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평온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내 가족들 수백 명이 위험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남해성모궁의 현재 처한 상황은 사실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구천마성에게 남해성모궁은 눈에 낀 가시 이상이었다.
해남검문이나 기회만 되면 그들에게 반항하는 광동의 정파 무림인들이 믿는 것이 바로 남해성모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해성모궁을 떠받치는 버팀목이 바로 봉황성모였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중요한 법입니다. 저 역시 빙설초를 구하지 못한다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됩니다. 그것은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봉황성모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악불군의 모습에, 담수련은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특히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은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게 남자인가……?’
그러나 가슴이 뛰는 여인이 또 한 명 더 있었다.
남자를 우습게 여기는 여인 천하에서 자란 그녀는, 남자란 음심만 가득하고 자신의 욕심밖에 모르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불결한 족속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그녀에게 악불군의 절절한 안타까움이 전해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진정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무림인답게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나?”
“어떻게 말입니까?”
“소혜가 경고도 없이 빙설초를 빼앗은 것은 분명 정파로서 잘못임에는 분명하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있는 물건을 빼앗긴 것도 무림인으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수지. 그러니 둘이 직접 비무를 하게. 그래서 자네가 이긴다면 빙설초를 돌려주겠네. 대신 지면 더 이상의 이의 제기는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네. 동의하겠나?”
“좋습니다. 어르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물론 지면 더 이상 빙설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악불군이 강한 어조로 답하자 봉황성모는 진소혜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동의하지 않느냐?”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하추수나 열혈파파는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들은 악불군의 무공은 분명 진소혜를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봉황성모는 그들에게는 동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이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원천 봉쇄해 버린 것이다.
남해성모궁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외부인과의 비무가 벌어진 것은 근 수십 년 내에 처음이었고, 상대가 남자인 것은 더더욱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무는 은밀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봉황성모는 제자들도 비무를 보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오랜 봉문에 가까운 칩거로 의기소침해 있는 남해성모궁에 심기일전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사부님, 실전 비무는 좀…….”
하추수는 진소혜와 악불군의 비무를 실전 비무로 한다는 말에 불안한 듯했다.
“그럼 소혜나 저 아이 같은 고수들에게 목검을 들고 장난이나 치라고 하라는 거냐? 그리고 그런 비무는 진 사람이 불만을 가질 수 있어서 안 된다.”
“그렇긴 하지만…….”
“소혜가 질 것 같아서 그러냐?”
“그것보다는 서로 간에 다칠까 그게 걱정이 됩니다.”
“소혜가 강하다면 악불군이라는 아이가 다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아이가 강하다면 소혜는 안 다친다. 그러니 소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게 무슨?”
“우선 두고 보자꾸나.”
연무장 중앙으로 진소혜와 악불군이 마주 보고 섰다.
“전 내당 당주인 소선화입니다. 비무의 규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이의가 있으시면 제 말이 끝난 후 해 주십시오.”
소선화는 악불군과 진소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어 갔다.
“이번 비무가 실전 비무이기는 하나 생사결은 아닙니다. 물론 죽거나 다친다 해도 서로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단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성모님께서 싸움을 멈추라고 하면 곧장 멈추셔야 합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하겠습니다.”
“합니다.”
악불군과 진소혜의 대답이 끝나자 소선화는 시작을 뜻하는 손짓을 하고는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악불군이 검을 정면으로 겨누자, 진소혜는 노룡진구주황의 수법으로 곧장 공격을 시작했다.
[파파, 소혜가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
노룡진구주황은 남해성모궁의 무공 중 그 위력이 가장 강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 다른 수법을 사용하는 중에 간간이 가미하는 초식이었다.
하추수의 눈에 그것이 진소혜가 이번 비무에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다고 보인 것이다.
[소성모의 무공은 저와 싸워도 백중일 정도로 강하십니다. 소성모께서 뭔가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열혈파파의 말에 하추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는 시작부터 아주 격렬했다. 진소혜가 사전 탐색도 없이 강력한 무공을 들고 나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쾅!
챙! 챙!
열혈파파의 말대로, 진소혜는 강력한 수법으로 시작은 했지만 갈수록 빠른 수법으로 초식을 변경해 갔다.
주위에 몰려 있던 남해성모궁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비무가 진행될수록 점점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악불군이 제대로 반격 한 번 못하고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봉황성모만은 달랐다.
평온한 표정으로 비무를 보던 그녀의 얼굴은 갈수록 탄복과 놀라움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아이구나……. 지금도 발전하고 있어.’
그녀가 보는 악불군은 반격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소혜의 초식을 연구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진소혜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던 악불군은 시간이 갈수록 여유 있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공격을 받아치거나 막는 모습도 처음과는 달리 아주 여유로웠다. 진소혜가 시전하는 공격의 길을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악불군이 진소혜의 초식을 이미 다 읽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악불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세가 바뀌면서 진소혜가 몰리기 시작했다.
내공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격하는 자의 초식이 움직이는 길까지 상대가 다 간파하고 있다면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길 듯, 이길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던 진소혜는 어어! 하는 사이에 자신이 수세로 몰리자 남해성모궁의 최고 절기로 초식을 변환했다.
그러자 다시 싸움의 양상은 막상막하로 변하는 듯했다. 하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방어를 주로 하던 악불군의 검이 갑자기 공세로 전환하면서 그녀가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사결을 하듯 온몸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선천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힘이 모자란 여인들의 문파인 남해성모궁은, 그 대신 빠른 보법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변식으로 상대 공격의 힘을 흡수하거나 피하는 방식으로 무공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악불군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가해진 충격이 점점 누적되면서 그녀의 신형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거기다 처음에는 단순하던 악불군의 검식이 점점 현란해지면서, 그녀는 악불군의 검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
‘진짜 대단한 무공이다. 여기에 내공만 높다면 상당히 고전했을 거야.’
공세로 전환한 악불군은 유리한 국면임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의 무공이 여민웅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악불군과 진소혜의 비무를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봉황성모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네가 어떻게 그 수법을?”
봉황성모의 목소리에 모두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