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6화 (136/472)

<천검지애 136화>

136화. 봉황성모(2)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주위가 소란해지자 비무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창 몰리던 진소혜로서는 한숨 돌릴 시간을 얻은 셈이 되었다.

봉황성모는 하추수의 질문에 답 없이 악불군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어찌 그 검식을 알고 있느냐?”

“제 검식을 어떻게 익혔느냐는 제 개인적인 일 같습니다만?”

악불군은 담무룡이 자신의 무공에 대해 절대로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우선 답을 피했다.

“그래, 보통 검식이라면 네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네가 사용하는 무공은 악씨인 네가 절대로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그의 무공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 성이 연관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봉황성모는 악불군의 얼굴을 심각한 표정으로 유심히 살폈다. 당장 제압해서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심증뿐인지라 강압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신의현맥?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신의현맥을 타고난 아이가 있다니, 뜻밖이구나.’

그녀가 아는 신의현맥은 신의와 충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직한 정의감 역시 가지고 있었다.

봉황성모는 진소혜를 보며 말했다.

“소혜야, 계속 비무를 하고 싶으냐? 내가 보기에 네가 패했다.”

“사조님, 아직 승패를 결정한 단계까지는 안 갔다고 생각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진소혜는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누구 한 명이 다치거나 죽어야만 승패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가 된다. 진정한 고수가 되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뭐가 문제였는지는 연구하고 절치부심 다시 수련에 매진하는 것이 진정한 무인이라고 할 것이다.”

봉황성모의 말에 진소혜는 갈등하듯 악불군을 쳐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악불군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담수련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군을 하며 크게 말했다.

“소생이 이겼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진 소저께서 이렇게 양보를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악불군의 성격상 이런 경우 그냥 무승부로 하고 싶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빙설초가 달린 비무였다. 그 역시 양보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네는 나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나?”

이어지는 봉황성모의 말은 악불군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엄중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천상신녀 여협께서도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어르신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사안일세.”

“천상신녀 여협만 두고 자리를 뜰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악불군의 말에 주위의 제자들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남해성모궁에서는 신적인 권위를 가졌고, 무림에서도 십대고수에 들 정도로 큰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건을 다는 것은 대단한 결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 담수련을 두고 혼자 자리를 뜨라는 것은 황제의 명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봉황성모는 담수련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불군에게 담수련이라는 존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좋아, 너도 같이 가자.”

봉화성모는 담수련을 보며 말하자 담수련은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말했다.

“악 대협께서 아직 강호의 경험이 부족해 어르신께 무례를 저질렀는데 하해 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다, 따라오너라.”

봉황성모가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 뒤를 따랐다. 물론 하추수와 열혈파파 그리고 진소혜도 급히 그 뒤에 붙었지만, 곧이어 들린 전음으로 인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봉화성모가 그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파파,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간 본 궁을 떠난 적이 없으셨는데……. 아무래도 악불군이 펼친 무공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이유는 노신도 모르겠군요.”

“강호 경험이 많으신 파파께서도, 악 대협의 무공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것은 없나요?”

“무당을 비롯해 검문의 검식은 대부분 다 안다고 자부하는데, 저 아이의 검식만은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검문의 검식과 비교해 보아도 유사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혜 네가 직접 비무를 해 봤으니 혹시 어느 검문의 검식인지 짐작가는 것은 없느냐?”

“저도 모르겠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검식이 너무 단순해서 생각보다 빨리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검이 빨라지고 현란한 변화가 이어지는데, 본 궁의 검식의 변화를 능가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소혜의 말에 하추수와 열혈파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현란한 변식이었다는 것이냐?”

“예. 왜 그러세요?”

진소혜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반문했다.

“파파도 그렇게 보셨나요?”

“노신은 솔직히 굉장히 단조로운 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성모께서 밀리는 것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하추수와 열혈파파의 말을 들은 진소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직접 비무한 사람과 옆에서 본 사람이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검식이라니……

‘떠나기 전에 반드시 다시 한번 비무를 해볼 거야!’

진소혜는 아랫입술을 잘끈 씹으며 다짐을 했다.

* * *

“앉거라.”

본 각의 후미에 조성된 봉황성모의 처소는 생각보다 작고 아주 단출했다.

담수련과 악불군이 자리에 앉자, 봉황성모는 다시 악불군과 담수련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익힌 내가기공은 정종 무공심법으로 기가 아주 정명하고 순수했다. 그래서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사악한 기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몸에서는 어떠한 사기나 마기도 느낄 수 없었다. 더욱이 담수련의 몸에서는 느낄 만한 기조차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진소혜와의 비무를 모두 본 그녀로서는, 악불군조차 풍기는 기가 아주 작은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 갑자 전 무림에 다시없는 기재가 네 명이나 나타났다. 북으로는 금나라에 밀리고 동쪽과 남쪽은 왜구와 해적들의 발호로 나라 전체가 어려운 와중에 나타난 네 명의 기재는 약해진 중원 무림을 다시 예전의 성세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수련은 그녀가 지금 전설로 불리는 무림 사대무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림이 강해지기에는 네 명의 기재는 너무 많았네요.”

담수련의 말에 봉황성모가 보며 물었다.

“네 명이 많았다는 것이냐?”

“초절정의 무공을 지닌 기재들은 많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하겠지요. 하지만 절대적인 무공을 지닌 분들이 한 시기에 여러 명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오히려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요소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똑똑하구나. 맞았다. 네 명의 기재가 점점 명성이 높아지면서 단합을 해도 외세의 힘을 막을 수 없을 판에 서로 반목을 하며 싸워 대니, 무림의 전체적인 힘은 더 약해지고 말았다.”

잠시 말을 멈춘 봉황성모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정과 마 그리고 사를 각기 통일하는 데 성공한 세 명의 무림에 대한 영향력은 더 커졌고, 그들에 대한 의존(依存)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래도 한 명만은 달랐다. 그는 정사로 나뉘어 싸운다면 결국 무림은 자멸하고 말 것이라면서, 정과 마 그리고 사를 통합하는 무림맹 창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세 명은 그의 의견을 비웃었고, 결국 그는 무림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세가로 돌아가 버렸다.”

“사대무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래, 사대무황이다. 당시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느끼던 중원은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때 태양천주가 네 명의 무황에게 달콤한 제안을 해 왔다.”

봉황성모는 한탄스럽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과 싸워 이긴다면 원나라가 중원을 침공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대신 무황들이 진다면 일 갑자 동안 세력을 봉문하고 천하에 더 이상 나서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다.”

“무적이라고 자부하던 무황 어르신들에게는 거정하기 힘든 유혹이었겠네요.”

“맞다. 자신들의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무황들은 태양천주의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당시 중원에서 최고의 힘을 자랑하던 세 세력이 갑자기 봉문하면서, 중원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원나라에 유린을 당하고 말았었다.

“과거 일이긴 하지만 정말 안타깝군요. 그런데 태양천주가 그렇게 강했나요?”

“정말 강했다. 난 그자에게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패했다. 아마 새편작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을 게다.”

“그럼 그자를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말인가요?”

“아니다. 세가에 칩거했던 한 사람. 그는 태양천주를 이겼다. 하지만 태양천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패한 후 한 달도 안 되어 원나라가 중원을 침공했으니 말이다.”

“그럼 태양천주를 이겼다는 그분은 어떻게 됐나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원나라도 태양천도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죽자 열흘도 안 되어 대대적인 기습을 펼쳐, 그의 세가는 멸문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강하신 분이 왜 돌아가신 건가요?”

담수련의 질문에 봉황성모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깔렸다.

평생 홀로 지내 온 그녀가 딱 한 번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냥 그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좋았다.

그런 그의 죽음은 그녀의 병이 악화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그는 중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나이를 생각하지 않은 너무 심한 수련은 그를 주화입마로 몰아갔다…….”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악불군을 슬쩍 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악불군 역시 너무 심한 수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누구신가요?”

“검황이라 불리던 천륭검가의 가주이시다. 이제 자네에게 묻겠다. 지금 네가 펼친 무공은 검황의 무공인 천륭검법이 분명하다. 그 무공은 구문 성씨를 쓰는 천륭검가의 자손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익힌 것이냐?”

자상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마지막 질문을 하면서 무겁게 변했다.

악불군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어 보였다.

‘그거였구나…….’

봉황성모의 장황하다 싶을 정도의 사대무황 얘기를 들으면서, 담수련은 계속 봉황성모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도 뭔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무공과 연관된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그녀 역시 그의 무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왜 답을 못하느냐?”

“어르신께서는 그 무공이 천륭검가가 멸문했을 때 기습한 적도(賊徒)들이 가져갔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당시 천륭검가의 멸문은 천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무림인들은 천륭검가를 추모하기 위해 그 이름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무공을 얻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지. 하지만 그 검보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천륭검가를 공격한 자들이 태양천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만약 악불군의 무공이 천륭검보의 무공이 분명하다면 태양천과 연관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제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는 어르신께서 판단하십시오. 솔직히 전 제가 익힌 무공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릅니다.”

“자신이 익힌 무공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제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말인 것은 인정합니다.”

“그럼 누구에게서 그것을 얻었느냐?”

“죄송합니다만 그분과 약조한 것이 있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네 말은 스스로 네가 태양천과 연관이 있다고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 내가 믿어 준다고 해도, 네 무공의 근원을 무림인들이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네가 중원 무림의 영웅의 가문을 멸문시킨 흉수와 한편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리되면 너는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

“남의 생각이나 판단까지 제가 책임질 수는 없겠지요.”

봉황성모의 표정이 굳어가자, 담수련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어르신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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