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7화 (137/472)

<천검지애 137화>

137화. 천륭검보

봉황성모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에게 악불군과 담수련의 관계는 가장 의아한 것 중 하나였다.

담수련의 아름다움으로 보아 둘이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나 그렇다 해도 악불군이 담수련에게 보이는 예의는 과할 정도였다.

물론 주종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악불군의 무공이 너무 높았고, 담수련 역시 악불군을 대하는 모습이 종을 다루는 주인의 모습이라 하기 어려웠다.

“둘이 어떤 관계인지 내가 알 수 있겠느냐?”

담수련은 악불군을 슬쩍 보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악 대협은 제게 가장 소중한 분이에요. 그리고 저 또한 저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요.”

“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황망하다는 생각이 든 악불군이 담수련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짓에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럼, 네가 이 아이를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얘기냐?”

“완전 대변한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은 악 대협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얘기해 보거라.”

“어르신께서는 지금 악 대협께서 검황의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신 겁니까, 아니면 그것을 어디서 얻으셨는지가 중요한 것입니까?”

“그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더냐?”

“어르신께서는 정과 마의 구분을 어떻게 하시나요?”

“지금 그것을 묻는 의도가 뭔지 모르겠구나?”

“정파의 자손이나 제자들이라고 해서 하나같이 정의로운 사람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에 절대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정파에서도 사악한 자들이 나타나곤 하지.”

“그럼 마도나 사파에서도 정의로운 사람이 나올 수 있겠군요?”

“……그런 경우도 종종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 정파에서는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하시나요? 아무리 정의로운 행보를 보인다 해도, 타고나기를 마도나 사파 출신이면 나쁜 놈으로 치부하시나요?”

“그건 그의 평상시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의를 지향하던 검황의 무공을 익힌 악 대협께서 정의를 위해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악 대협께서 검황의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 사실 저는 잘 모릅니다. 하나, 검황께서는 자신의 무공이 악인보단 정의로운 자에게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누군가가 가진 물건을 죽여서 빼앗은 후 그것으로 착한 일을 했으니 됐지 않냐는 말로 들리는구나?”

“악 대협께서 그 일과 연관이 있다면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악 대협께서는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으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무공이 누구의 무공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악 대협께서 져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멸문당한 천륭검가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분들이 살아 계시다면 그 무공을 돌려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이미 돌려받을 분들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악 대협께서 그 무공을 어떻게 익혔느냐를 따지기 전에, 검황의 뜻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먼저 판단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판단을 하기 위해서도 너희는 그 무공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정파 무림인들에게 약속은 목숨 같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약속은 중요하다. 그러나 대의라는 것이 있다. 무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말할 수 없다고 무조건 고집하는 것은 모두에게 의심만 줄 뿐이다.”

“그 의심은 저희들이 감수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저희를 노리는 자들은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너희를 누가 노린다는 것이냐?”

“어찰단입니다.”

어찰단이라는 말에 봉황성모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천륭검가를 멸문시킨 자들이 대공이 이끄는 태양천과 오룡세가라는 심증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천륭검보와 천륭검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런데 천륭검보를 익힌 것으로 보이는 악불군을 어찰단에서 노린다면 또 다른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너희를 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동안은 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어쩌면 악 대협께서 익힌 무공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르신께서는 저희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런 대화는 할 필요가 없겠지.”

“믿으신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왕 믿으신 김에 계속 믿어 주시면 절대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봉화성모는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피력하는 담수련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휴우~ 그래 지금 천하에 필요한 것은 나 같은 노인네보다는 너희 같은 인재들이지. 하나 저 아이의 무공 연원이 밝혀지면 너희들을 노리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것 역시 저희들이 감수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봉황성모는 상당히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담수련의 말을 믿고 싶었다.

강서에서 광동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들이 펼친 협의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좋다. 너희들이 지금처럼 계속 정의를 위한 행보를 계속 행해 나간다면 내가 최대한 너희들의 방어막이 되어 주마. 하지만 그 무공으로 조금이라도 나쁜 짓을 한다면 가장 먼저 남해성모궁의 적이 될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대화는 비밀로 해라. 특히 천륭검보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빙설초는 돌려주겠다.”

“정말이십니까?”

“이미 비무를 할 때 그렇게 하기로 약조를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보다는 네가 빙설초가 더 필요한 것 같구나.”

“그것을 아셨습니까?”

“네가 진맥을 할 때 나 역시 네 몸의 기를 살폈다. 전형적인 오음절맥의 특성을 가지고 있더구나?”

담수련은 역시!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음절맥 맞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오음절맥인 여인은 약관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제 나이가 열일곱이니 이제 몇 년 남지 않았지요.”

담수련의 말에 봉황성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음절맥은 분명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담수련은 그렇게 급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의원이 아니니 의견을 피력할 수는 없었다.

“그랬더냐?”

“예, 그런데 어르신을 진맥하면서 아주 다행인 결론을 얻었습니다.”

“다행인 결론?”

“새편작 어르신께서 남기신 의서에 의하면 빙설초의 뿌리는 음기의 결정체입니다. 음기의 보충이 필요한 제게는 아주 필요한 부분이지요. 하지만 어르신은 음기를 보충할 필요가 없이 양기만 중화시키면 됩니다. 빙설초의 잎만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정말이냐?”

봉황성모는 반가운 말을 들은 듯 반색했다.

“어르신의 지금 상태는 뿌리까지 드시면 오히려 무공이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네게는 잎도 중요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빙설초로도 저는 완치가 안 됩니다. 잎까지 먹으나 안 먹으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담수련의 그 말은 거짓이었다.

뿌리가 그녀에게 주된 약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잎도 그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효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몇 년 더 연장하는 것보다는 악불군의 입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악불군의 무공의 연원을 알아챈 봉황성모는 큰 도움이 될 사람이라고 판단됐다.

“그럼 어차피 싸울 일도 아니었구나?”

봉황성모가 다행이라는 듯 말하자 담수련도 미소를 지며 받았다.

“진 소저께서 다짜고짜 모두 가져가시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진 소저께서도 꼭 필요한 물건이었으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먹으면 되는 것이냐?”

“빙설초는 먹는 방법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같이 섞어야 할 약초도 많고요. 하지만 다행히 그 약초들을 궁주님께서 다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 약초들만 제게 주신다면 이삼 일 안에 궁주님이 드실 약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담수련은 어느새 하추수가 연구하느라 탁자에 널려놓았던 약초들까지 다 외운 듯했다.

* * *

“사부님, 무슨 일인지 저희들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악불군과 담수련이 빈청으로 돌아가자 하추수는 봉황성모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후에 말해 줄 것이니 기다리거라.”

“사부님, 제자가 궁주가 된지도 어언 이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사부님께서는 궁주는 궁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정보를 취합하여 제자들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분명 사부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본 궁의 사활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큰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궁주인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제자들의 안전을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하추수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만약 담수련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악불군이 천륭검가를 멸문시킨 자들 중 한 세력의 제자라면…… 의심하려고 든다면 의심할 거리가 열 가지도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 가지만 사실로 밝혀져도, 그것을 침묵한 남해성모궁은 정파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궁주인 하추수에게 전말을 확실하게 알리고 만약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수도 있었다.

“궁주.”

“예.”

“천상신녀에게 최대한 예의 있게 대해라.”

“예에? 그게 무슨?”

“악불군이라는 아이. 모든 것이 천상신녀로 시작해서 천상신녀로 끝나더구나. 그 아이에게 최대 약점일 수도 있지만, 최고의 힘이 천상신녀일수도 있다.”

“사부님, 솔직히 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도 사랑이란 것을 한 번쯤은 할 기회를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그게 나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란 생각이 드는구나.”

하추수는 갈수록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봉황성모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랑…… 그래, 악불군 같은 아이를 그렇게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사랑밖에 없어. 그런데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단 말이야……?’

봉황성모는 악불군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악불군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어떤 욕심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돌아간 후 봉화성모는 둘의 관계를 드디어 정리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지를 그녀도 경험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다는 평소의 지론이, 그녀가 악불군을 믿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 * *

“아가씨, 약 제조에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십니까?”

“이삼 일 정도?”

“더 빨리 안 될까요?”

“왜?”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습니다. 사화들이 무척 기다릴 것입니다.”

“내가 오면서 너무 시간을 끌어서 그렇지? 미안해.”

“아가씨께서 미안하실 일이 아니지요. 제가 늦은 거니까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내가 시간을 끌어서 소군이 늦은 건데 왜 소군이 죄송해?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아가씨의 행보는 모두 제 책임입니다.”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마! 이건 소군이 아니라 내 잘못이야.”

“…….”

악불군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담수련은 다시 약초들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새편작의 의서는 대단히 정밀해서, 배합하는 데 저울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왜 아무 말 안 해?”

한참을 배합하던 담수련은 악불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마음이 안 좋은지 슬쩍 물었다.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아까고 지금은 말해도 돼. 난 소군이 너무 조용하면 심심해.”

“원래 말은 아가씨께서 다 하시는 편이었습니다.”

실지로 악불군과 담수련의 대화는 대부분 담수련이 하고 악불군은 짤막하게 답만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소군의 목소리를 들어야 편하단 말이야.”

“알았습니다. 그럼 말하겠습니다. 빙설초의 잎은 정말 아가씨께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까?”

“그냥 말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습니다.”

담수련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자 다시 함구령을 내리고는 약초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중구난방 이어지는 어린애 같은 말싸움, 그리고 불리하면 입을 막는 담수련.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말을 하라는 그녀의 모습은 악불군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였고 청량제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 대협,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담수련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