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8화 (138/472)

<천검지애 138화>

138화. 서로를 찾는 사람들(1)

“저 여자가 왜 소군을 부르는 거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소혜였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떡해. 부르는데 나가 봐야지.”

나가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가씨께서 나가지 말라고 하면 안 나가겠습니다.”

악불군도 이제 눈치가 좀 생겼는지, 그녀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남해성모궁에 있는데, 안 나가면 이상하지? 나가 봐.”

“멀리는 안 가겠습니다.”

“알았어.”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 담수련은, 악불군이 나가자마자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왜 여자가 남자를 부르는 거야? 짜증 나게…….”

담수련은 자신의 봐도 예쁜 편인 진소혜가 악불군을 따로 찾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아~ 수련아~ 너 왜 점점 이상해지니? 이것도 부작용인가?’

진소혜가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나, 자신이 나가라고 했음에도 진짜 나가는 악불군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 왜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음절맥이 활성화되며 나타나는 부작용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병에 대해 적혀 있는 새편작의 의서에도, 사랑의 부작용에 대한 구절은 없었다.

* * *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딱딱한 악불군의 말투는 그렇지 않아도 비무의 승부로 마음이 불편한 진소혜의 심기를 확실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진소혜는 남해성모궁에서 평생을 자랐지만 외부로 나간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간 남자들은 경탄으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고, 여인들은 부러움과 시샘으로 가득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특히 남자들이 보내는 음탕한 눈길은 그렇지 않아도 남자들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더욱 안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그녀에게 전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보이는 행동은 그녀를 귀찮아 한다는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잠깐 저와 대화 좀 해요.”

“하십시오.”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하자는 겁니다.”

“저는 아가씨를 호위하는 입장인지라 이곳에서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얘기를 하든지, 꼭 단둘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 죄송하지만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소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해성모궁은 그녀의 집이었고, 소성모인 그녀는 주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지위였다.

‘이자가 지금 이곳의 주인이 자신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진소혜는 입술을 잘근 씹었지만, 봉황성모가 직접 예의를 지키라는 명을 내린 이상 평소 성질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대화하지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짧게 해 주십시오. 지금 아가씨께서 약을 조제하고 있어서 제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진소혜는 악불군의 입에서 계속 아가씨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화가 났다.

“짧게 말하라니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전 오늘 비무의 승패에 대해 동의할 수 없어요. 악 대협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설마 악 대협께서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나요?”

“사문의 최고 어르신이 내린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존장에 대한 항명이 될 수 있습니다.”

“전 지금 항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을 묻고 있는 거예요!”

“전 봉황성모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겼다는 그분의 의견을 받아들인 겁니다.”

“악 대협은 자신의 생각은 없나 보지요? 지금 당신의 생각을 묻는데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세요?”

“그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마 비무를 다시 하고 싶다는 말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요? 비무를 다시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설마 피하시고 싶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가 주십시오. 전 바빠서 이만.”

말을 마친 악불군은 그대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던 진소혜였지만, 자기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리려는 악불군의 모습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개인적인 호승심으로 성모 어르신께서 저희와 맺은 우의를 망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다음 대 남해성모궁을 이으실 소성모로서 자질을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악불군은 그녀가 손을 쓰려고 하는 것을 직감하고는 엄중한 목소리로 질책하듯 말했다.

진소혜는 악불군의 몸에서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을 느끼자 온몸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악불군은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제 말을 이해하신 것 같으니 전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그녀가 행동을 멈춘 것이 자신의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공이 아니야……?’

악불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위압감.

그것은 그녀의 말대로 무공에 연유한 것이 아닌, 그의 몸에서 저절로 풍겨 나온 것이었다.

당연히 악불군은 그런 것이 나타났다는 것도 모르고 들어갔고, 담수련이 그 위압감의 정체를 안 것은 한참 후였다.

그것은 절대자만이 보일 수 있는 기도였다.

* * *

“아가씨? 지금 뭐하십니까?”

방 안으로 들어 선 악불군은 담수련이 깜짝 놀라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악불군과 진소혜가 무슨 대화를 하나 듣기 위해 문 옆에 서 있다가, 악불군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늦어진 것이다.

“아~ 계속 앉아서 약 조제를 하다 보니까 다리가 좀 아파서 운동 좀 하는 중이야.”

“많이 아프십니까?”

악불군은 깜짝 놀라 물었다. 담수련이 아프다는 말보다 악불군을 더 놀라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제 괜찮아.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왔어?”

담수련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자리에 앉더니 슬쩍 물었다.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어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얘기도 아닌데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소곤소곤 얘기했어?”

자신도 모르게 엿들으려고 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담수련이었다.

“아가씨께서 궁금하신 줄 알았다면 소리가 들리게 할 걸 그랬군요.”

“나 하나도 안 궁금했어!”

“그럼 소곤소곤 얘기한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거야 여기서 안 들리니까 그랬지!”

“남들이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제가 소리를 막았습니다.”

“왜?”

담수련은 소리를 막았다는 말에 급히 반문했다. 하나도 안 궁금했다면서 궁금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완전 아기씨 때를 보는 것 같군.’

“왜 웃어?”

“아, 아닙니다. 진 소저가 오늘 비무 결과에 대해 불만이 좀 있었나 봅니다. 다시 비무를 했으면 하는 것 같아서 거절하고 들어오는 중입니다.”

“나 같이 무공이 약한 사람이 봐도 완전히 졌던데 무슨 불만이 있대? 웃기는 여자네.”

“웃긴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 같았습니다.”

“피! 자존심은 그런 데 부리는 게 아니지!”

담수련은 또 뭐가 못마땅한지 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갑자기 약초들을 열심히 섞기 시작했다.

악불군은 그녀가 다시 조제를 시작했다고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담수련이 고개도 안 돌리고 지나가는 척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진 소저는 내가 봐도 정말 예쁘던데, 소군은 어떻게 봤어?”

어쩌면 그녀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이것 이었을지도 몰랐다.

“전 여자들 얼굴 잘 안 봅니다.”

“그럼 진 소저 얼굴을 기억도 못해?”

“자세히는 안 봤다는 얘기입니다.”

“보긴 봤다는 말이네?”

“‥‥‥.”

그제야 악불군은 뭔가 위기를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담수련은 집요했다.

“그럼 예쁜지 안 예쁜지 정도는 생각했을 거잖아? 안 그래?”

그런 면에서는 눈치가 전혀 없는 악불군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경험이 쌓인 터였다.

“솔직히 제 눈에는 아가씨 외에 예쁜 여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약초를 섞으면서도 악불군의 답을 기다리던 담수련은, 그녀가 원하는 답이 나오자 회심의 미소를 살짝 그렸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를 본 악불군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살짝 터졌다.

* * *

대장부들을 능가하는 배짱으로 여간한 상황에서는 눈썹조차 꿈쩍하지 않던 금잔화의 아미가 바짝 좁아져 있었다.

“군주님, 무슨 일이신데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한번 뚫리기 시작하니까 사방에서 펑펑 터지고 있구나.”

“그 정도로 안 좋습니까?”

“반란군은 호북을 경계로 대치 상황이라 우선 숨을 고르는 상황으로 보이지만, 이미 장강 이남은 통치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황군이 건재하고 각 지역의 군단들도 속속 황군에 합류하고 있다고 하니, 반란군만 토벌하면 쉽게 정리가 될 것이다.”

금잔화가 뜻밖에도 긍정적으로 판단을 하자 금령사자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그렇게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시는 게 표정이 어 두우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림이 문제야. 구천마성과 혈해사계의 힘이 너무 커졌어. 내가 두 세력을 없애자고 계속 주장했는데, 정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놔두는 것이 낫다고 그냥 둔 것이 결국 화를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금잔화는 대공에게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를 그냥 두면 결국 뒤통수를 맞게 될 것이라며 제거하자고 주장해 왔다.

대공이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정파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었다. 하나, 진짜 이유는 그들을 제거하려면 너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마룡세가와 화룡세가에 그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두 세가와 그들 간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다. 태양천에서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겠지.”

“마룡세가에게 정면에서 싸우도록 하고, 새외 연합으로 하여금 혈해사계의 뒤를 치게 하면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염화마제가 우리 말을 순순히 들을 것 같으냐?”

“새외연합까지 말을 안 듣는다면, 우리가 오히려 지금 고립무원에 빠진 것이 아닙니까?”

“아직까지는 우리의 힘이 그들의 힘을 압도하고 있다. 문제는 그 힘을 이끌고 싸울 용사가 없다는 점이다.”

무림인들 간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강한 고수가 무리를 이끄느냐였다.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절대적으로 우월한 무공을 바탕으로 적의 수뇌를 무력화시킨다면, 그 밑의 수하들은 전의를 잃고 스스로 지리멸렬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그 역할을 대공이 맡아서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러기에는 대공의 나이가 너무 많았고, 그 뒤를 이어야 할 후기지수들은 아직 약했다.

“철룡세가의 소가주가 신분이나 무공으로 미루어 맡길 만하지 않겠습니까?”

“철무정은 아직 모자라.”

“그럼 혹시 마음에 둔 자라도 있으십니까?”

금령사자의 말에 금잔화는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에 둔 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악불군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요새 왜 이러지? 왜 자꾸 악불군…… 그자가 생각나는 거야…….’

금잔화는 일개 호위 무사 따위가 자꾸 생각이 나는 것 자체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던 그녀는, 다시 악불군의 얼굴이 자신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나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자가 나를 보필해 준다면 진짜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해 줄 수 있겠건만……. 천하를 한 손으로 요리한다고 자부하는 내가 어찌 그런 자 하나 회유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거야!’

근래 악불군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금잔화는 그의 생각을 부쩍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더욱 일에 몰두해 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뇌리에 너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를 머리에서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