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39화 (139/472)

<천검지애 139화>

139화. 서로를 찾는 사람들(2)

“해남도에서 봉황도 가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진을 뺐는데, 아예 이렇게 돌아서 가면 도대체 얼마나 멀어지는 거야?”

구여풍과 단둘이 노를 젓고 있던 마진우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들 정도의 고수라면 아무리 날이 덥다 해도 땀을 흘리지는 않는다. 내공으로 체온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남해 바다에서, 최소 열 명이 노를 저어야 움직일 배를 구여풍과 단둘이 계속 젓다 보니 그들도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악 대협 말씀이 아직 이틀은 더 가야 한다고 하잖냐?”

구여풍도 힘이 드는지 숨을 한 번 깊게 내쉬며 말했다.

빙설초의 잎을 봉황성모의 증세에 맞게 조제한 약을 넘긴 담수련은 즉시 남해성모궁을 빠져나왔다.

봉황성모와 어느 정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조성했고, 해남검문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우의도 다지긴 했다.

하나 상대방이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알고 있고, 잘못하여 자신이 잠룡세가의 여식이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 상황이 급반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차도는 느껴지십니까?”

담수련도 출발 직전, 빙설초의 뿌리로 조제한 약을 한 번 먹었다.

“새편작 어르신의 의서에 따르면 열 번은 먹어야 가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어. 이제 겨우 한 번 먹었는데 차도가 느껴지겠어?”

“한 달에 한 번 먹어야 하니, 열 달은 지나야 하겠군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어르신이 넣으라는 양대로 조제를 했더니 정확하게 딱 열 번 먹을 만큼만 나오는 거 있지? 그분들은 그렇게 긴 세월을 아픈 사람을 위해 이렇게 중요한 의서를 계속 전해 왔는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새편작의 의서는 새편작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의술을 계속 적어 가면서, 후대에도 새로운 의술이나 지식을 얻으면 반드시 기록을 하라고 적어 놓았다.

“이제 아가씨께 전해졌으니 아가씨께서 하셔야지요.”

“소군 말대로 난 의술로 사람들을 구한다 치고, 그럼 소군은 뭘로 사람들을 구할 거야?”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사람들을 구하기까지 하겠습니까? 아가씨께서 좋은 일을 오래오래 하십시오. 전 아가씨 옆에서 아가씨를 보호하겠습니다.”

악불군은 오래오래란 단어를 특히 강조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오히려 담수련을 슬프게 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소군이 어떤 야망도 품지를 않고 있어……. 정말 내가 소군 옆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잠룡세가에서의 소군은 그녀의 보호자이자 안식처였고, 무조건 믿고 좋아하는 단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강호에 나온 후, 악불군은 계속 그녀에게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내며 자신의 호위 무사로 키워졌지만 그 능력은 천하를 담고도 남을 만큼 크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악불군의 앞날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휴우~.’

담수련은 악불군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악불군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계속 압박하는데, 마음은 그를 죽어도 놓고 싶지 않았다.

“……소군,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많은 것 같지 않아?”

“파도까지 잔잔하니 바다에 별들이 반사되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망망대해에서 보는 별은 마치 하늘과 바다를 완전히 메운 듯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싸울까? 인생이라고 해 봐야 일 갑자 정도면 대부분 다 죽는데 말이야.”

담수련은 서로 죽고 죽이는 중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불안한 듯했다.

“아가씨, 마음을 강건하게 잡으십시오. 제가 있는 이상 누구도 아가씨를 불안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악불군의 얼굴을 쳐다본 담수련은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쉿! 알았으니까 잠깐만 이렇게 잡고 있자.”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생각을 했다.

‘아가씨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것입니다.’

‘소군의 손을 죽을 때까지 꼭 잡고 있었으면 좋겠다…….’

* * *

노인은 커다란 바위틈에 숨은 채,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거나 혼절하고도 남을 엄청난 고통을 이를 악물며 참아 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일자로 길게 갈라진 배 거죽에서 튀어나오려는 내장을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당장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추적자에게 걸리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더니 맥박까지 멈추게 했다. 귀식대법을 펼친 것이다.

지금같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귀식대법을 펼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대로 죽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도 못 찾았느냐?”

노인이 숨은 바위 위로 귀면탈을 쓴 남자와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가린 십여 명의 장한들이 나타났다.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장한 중 한 명이 보고하자, 귀면탈을 쓴 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당한 상처를 입고 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주위를 다시 한번 샅샅이 뒤져라.”

“예!”

답한 장한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보 같은 놈들, 그런 실수를 하다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약간 초조한 모습을 보이던 귀면탈을 쓴 자는 눈을 감고는 주위의 소리와 냄새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기를 찾기 시작했다.

일각 이상을 그렇게 주위를 살피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떴다.

‘그 정도 상처면 죽었어야 마땅한데,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을 쳤을까?’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라졌던 흑의 장한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피를 상당히 흘렸을 텐데 피 냄새도 안 나고 피를 흘린 흔적도 없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지?”

귀면탈을 쓴 자도 자신이 쫓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철수한다.”

“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바위에 다시 귀면탈을 쓴 자와 장한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안 나타난 것을 보면 이 근처에 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괜한 시간만 여기서 너무 보냈다. 예상보다 상처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다. 내 이놈을 반드시 잡아서 뼈와 살을 발라 버릴 것이야! 가자!”

귀면탈을 쓴 자는 대단히 화가 난 듯 바위를 발로 한 번 차더니 공중으로 몸을 날려 남쪽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장한들도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샅샅이 뒤졌는데 어떻게 자신들이 서 있는 바위틈에 숨은 노인을 못 찾았을까?

놀랍게도 노인이 숨은 바위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바위와 색이 같은 천으로 교묘하게 가려 놓았던 것이다.

어쨌든 귀면탈을 쓴 자 같은 대단한 고수가 그런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노인의 은신술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다시 반 시진쯤 지나고 산속이 어두워질 무렵 노인은 귀식대법을 풀고 눈을 떴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긴장이 풀린 듯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나온 것은 옷을 꿰매는 바늘과 실이었다. 강호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으으음…….”

노인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 침음성을 흘리며 자신의 배를 꿰매 나가기 시작했다.

‘내장이 잘리지 않은 것은 그래도 다행이군. 하긴,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데…….’

노인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운이 좋음을 자랑스럽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명의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의원을 하루 안에는 만나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 *

담수련이 선실에 들어가 잠이 들자 악불군은 배 뒤로 향했다.

“두 분도 이제 좀 쉬십시오.”

마진우와 구여풍은 악불군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희가 쉬면 배가 멈춥니다. 공자님이나 들어가서 쉬십시오.”

‘공자님?’

언제나 악 대협이라 부르던 마여풍의 달라진 호칭에 악불군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대협이라는 말도 사실 그의 나이에 듣기에는 높은 호칭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무공이 자신이 높다 싶으면 대협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자님은 달랐다.

양민들에게는 귀해 보이는 사람에게 붙이는 일반적인 호칭이었지만, 무림인들에게 공자님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을 때만 붙이는 경칭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태어나서 공자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귀한 사람도 아니고요. 원래대로 호칭하십시오.”

“아닙니다. 저희들에게 공자님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그러니 이곳은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들어가서 쉬십시오.”

“무공 수련을 할 겸 일정도 좀 단축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무공 수련이요?”

마진우와 구여풍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들에게 노를 젓는 일은 무공 수련과는 전혀 관계없는 노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공 수련이라고 하시니까 피해 드리자고.]

구여풍의 전음에 마진우는 노를 노대에 걸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저희들은 아직 안 졸린데, 옆에서 공자님 수련하는 모습을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동안에도 숨어서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본 그였지만 이번에는 좀 가까이 보고 싶었다.

“그거야 상관있겠습니까?”

흔쾌히 허락을 한 악불군은 배 후미에 서더니 마보 자세를 취했다.

[무공 수련을 하신다고 해서 특별한 것이라도 보나 했는데, 그냥 기본적인 수련을 하시려나?]

[지금까지 마보로 시작하는 수련을 본 적이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둘이 의아하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악불군의 몸 주위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불군이 검을 빼 들더니 현란한 몸짓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것 때문이었다.

그동안에도 검을 빼들고 수련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본 그들이었지만, 이제까지의 수련에서는 답답하리만치 천천히 움직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의 몸짓은 너무 빨라, 초절정 고수인 마진우와 구여풍의 눈조차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들은 악불군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악불군이 보이는 것은 진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진화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들의 놀라움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망망대해.

악불군은 그동안 주위의 눈 때문에 직접 수련은 못하고 머리로만 연구하던 천륭검보의 무공들을, 억제해 왔던 힘까지 최대한 끌어올리며 펼치고 있었다.

순간 악불군의 검에서 금빛강기가 무려 일 장 가까이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보았다면 일 장이나 되는 긴 장검을 휘두른다고 보일 정도였다.

[강기의 색이 변하고 있어!]

구여풍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강기의 색이 빨갛게 변하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살기가 그들의 몸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만약 악불군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살기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검기의 색깔이 이번에는 하얗게 변하면서 주위의 공기가 악불군의 몸을 향해 빨려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무공이야?]

마진우는 다른 사람이 배운 무공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악불군이 수련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끝까지 보는 구여풍과는 달리 언제나 중간에 잠을 자곤 했다.

그런 그도 지금만은 악불군이 펼치는 무공의 연원이 궁금할 정도였다.

둘은 이제 감탄이 아니라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악불군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다.]

[나도 그래……. 무공 수련이 아니라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 동작 한 동작은 자세를 잡기도 어렵고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이 모두 초식으로 연결이 되자 아름다운 검무로 변해 버린 것이다.

[저, 저, 저거 저게 뭐야?]

놀랄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구여풍이 전음을 더듬으며 악불군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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