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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40화 (140/472)

<천검지애 140화>

140화. 홍항(1)

수련이 끝난 듯 악불군은 어느새 검도 검집에 넣고는 정좌를 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 앉은 위치가 이상했다. 무려 석 자 정도 공중에 뜬 상태에서 정좌를 한 것이다.

경신술을 사용하면 십 장도 우습게 넘나드는 그들에게 석 자 정도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십 장을 나는 것은 바닥을 발로 차는 반동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중에 부양하듯 정좌를 한 채 떠 있는 것은, 전 공력을 전부 뽑아낸다 해도 그들에겐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구여풍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정좌를 한 악불군의 머리 위로는 삼색의 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악불군의 모공에서 하얀 기체가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안 보일 정도로 주위로 퍼지기 시작했다.

[저, 저거 변한다?]

그렇게 반 시진 가까이 떠 있던 악불군이 갑자기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회전을 하던 삼색의 기가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 같은 기체를 흡수해, 원형의 고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금색과 붉은색 그리고 백색의 세 개의 고리를 형성한 기는, 잠시 후 마치 살아 있는 듯 스르르 움직이더니 악불군의 코를 통해 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거 말로만 듣던 삼화취정과 오기조원 아니냐?]

구여풍이 경악한 표정으로 마진우를 보며 물었다.

삼화취정 오기조원은 삼 갑자의 내공만 있어도 만들 수는 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만들었다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불순한 기가 전혀 없는 정순한 내공을 지닌 자만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악불군이 형성한 고리는 그들이 들은 것과는 너무 달랐다.

우선 각 고리가 색이 다르다는 것도 들은 바 없지만, 고리의 크기가 너무 컸다.

[현상은 비슷하긴 한데…… 하지만 막주님 말로는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었을 때의 크기라고 했는데, 저건 두 팔로 원을 만들었을 때의 크기와 맞먹잖아?]

[그만큼 공자님의 내공이 높다는 의미 아닐까?]

[나이가 있는데 그게 가능해? 어! 회전한다.]

마진우는 고리를 완전히 흡수한 악불군의 몸이 선미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침을 꿀떡 삼켰다. 뭔가 평생에 보기 힘든 진기한 광경을 볼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악불군이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자 배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진우와 구여풍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배가 마치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빨리 가면 배가 상당히 요동을 쳐야 함에도 그들이 노를 저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세상에…… 이게 가능한 거야? 이 큰 배를……. 도대체 공자님의 경지가 어느 정도일까?]

마진우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구여풍을 보자, 그는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답했다.

[어떤 경지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냥 우리 같은 자들은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경지라는 게 맞을 것 같다. 난 결정했다. 저분을 나의 주군으로 삼으련다.]

[막주님께서 들으시면 넌 죽어!]

[……죽을 때 죽더라도 나도 한번 주군다운 주군을 섬겨야 하지 않겠냐?]

전음을 마친 구여풍이 악불군을 향해 부복을 하자, 잠시 갈등하던 마진우도 그 옆에 부복을 했다.

[막주한테 죽을 까 봐 무섭다며?]

[내가 언제 무섭다고 했냐? 그리고 네 말대로 저런 분을 한번 모셔 봐야 인생이 좀 덜 부끄러울 것 아니냐?]

무림인들의 부복이란 충성을 바치겠다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평생 남을 섬기기만 하던 악불군에게도 드디어 충성스러운 수하들이 생기고 있었다.

* * *

“소군!”

담수련은 잠에서 깨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큰일이라도 생긴 듯 악불군을 크게 불렀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문 밖에서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그럴 때면 깨자마자 부르는 사람이 언제나 악불군이었다.

“빨리 들어와. 얼굴 보고 싶어.”

담수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느새 악불군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또 악몽을 꾸셨습니까?”

“아니, 그냥 소군이 보고 싶었어.”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면 악불군이 걱정을 많이 하는 것을 아는 그녀는 우선 부정을 했다.

어려서부터 워낙 많은 납치 시도를 당했고, 더구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호위 무사를 많이 봐 온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어쩌면 악몽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모든 공포는 악불군의 얼굴과 목소리만 들어도 사라지니, 그녀에게 악불군은 여러모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은 분명했다.

“아가씨, 새편작님의 의술서엔 악몽을 안 꾸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건 심리적인 이유라서 특별한 치료법이 없어. 새편작 어르신의 의서에 따르면 마음속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초조함을 없애야만 악몽에서 해방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말하던 담수련은 입을 딱 닫았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아가씨의 불안감을 해소해 드려야 하는데 부족해서…….”

이번에는 악불군의 말이 끊겼다. 담수련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어려서부터 누적된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생긴 거라 소군과는 상관이 없어. 그리고 지금 난 소군 때문에 정말 행복해. 그러니까 그런 말하지 마.”

그녀의 말은 악불군에게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벌써 해가 떴네? 얼마나 더 가야 홍항에 도착하지?”

“곧 도착할 겁니다.”

“곧? 하루밖에 안 됐는데?”

“제가 좀 빨리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나가 보자.”

담수련은 소문으로만 듣던 홍항의 모습이 보고 싶은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둘이 나오자 마진우와 구여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저 사람들 왜 저래? 갑자기 무척 공손해졌는데?]

담수련은 의아한 듯 악불군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원래 공손하지 않았나요?]

[그러긴 했지만 뭔가 사무적이었거든.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진정으로 우리를 공경하는 모습이야.]

[아가씨는 그게 느껴지십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담수련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마진우와 구여풍의 행동이 좀 더 공손하기는 했지만 전과 특별히 다른 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사무적인지 진짜 공경인지를 어떻게 느꼈는지 그녀도 스스로 의아했던 것이다.

‘빙설초를 먹었는데도 뇌의 활성화가 멈추지 않나 보네……. 계속 먹으면 나아지려나?’

그런 그녀를 보며 악불군은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와아! 진짜 다 왔네? 멋있다 정말.”

중원 삼대 무역항 중 하나인 홍항은 그 경관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전경은 소문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특색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아름답기는 하네요. 저렇게 높은 누각은 처음 봅니다.”

멀리서도 보이는 십 층짜리 누각은 홍항의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참! 백설이는 괜찮아?”

“계속 갑판 아래에만 있어서 심심해하기는 하지만 건강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다른 말들은 배를 오래 타면 아주 괴로워해서, 악불군은 자신의 말은 해남도에 두고 백설만 태워서 온 터였다.

“도착하면 또 우리를 쫓는 자들이 나타나겠지?”

담수련은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부터 부단히도 그녀를 괴롭히던 공격에서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긴 거리를 항해해서 우회할 줄은 몰랐을 것이니 얼마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용모파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곧 따라붙는 자들이 나타나긴 할 겁니다.”

“소군.”

“예.”

“꼭 악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

“가주님께서 제게 무공을 전수하면서 신신당부한 명령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안 가면 사화가 계속 악양에서 버틸 것인데, 그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모르겠어. 난 무림과 연관되는 삶은 살고 싶지 않은데…….”

“아가씨께서 가주님의 명을 따르지 말라고 명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겐 아가씨의 명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니까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천성적으로 효녀인 그녀는 담무룡의 방식이 언제나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지금 담무룡의 생사마저 확인이 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쩌면 유지(遺志)일 수도 있는 마지막 명을 거스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명이 없다면 악불군은 우직하게 담무룡의 명을 따르기 위한 행동을 이어 갈 것이 뻔했다.

아버지냐, 사랑하는 연인이냐……

그녀로서는 정말 결정하기 어려운 갈등이었다.

* * *

“저희가 믿을 수 있는 의원들 중 제법 유명하다는 의원들 주위는 이미 수상한 자들이 감시하고 있답니다.”

다급하게 밀실로 들어선 상인 차림의 중년인은 배를 천으로 감싼 노인을 보며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군. 내가 이곳 홍항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장로님, 그자들이 도대체 누군데 장로님께 이런 상처를 입힌 것입니까?”

“몰라.”

“예? 그게 무슨…….”

“몇 년 전에 한 곳을 침입했다가 수상한 것을 봤어. 어찌 됐건 짭짤하게 수입을 올려서 별 불만은 없었는데, 이놈들이 나를 추적하더란 말이야.”

“장로님께서 뒤를 허락하실 만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게 그렇지 않더라.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놈들이 신기할 정도로 내 주위를 조여 오더란 말이야. 아마 내가 누군 줄 알았다면 이미 잡혔을 거야.”

“천하의 귀도신영(鬼盜神影)을 추적하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귀도신영, 무림인들의 물건만 훔친다는 도문(盜門)의 장로이자 천하에서 가장 은밀한 자로 알려져 있었다. 실지로 그의 얼굴은 백 개가 넘어서, 같은 도문 사람들조차 그의 진실한 얼굴을 모른다는 자였다.

더구나 그의 독문 신법인 신출귀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신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마디로 그가 도망을 치면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도둑맞은 물건들을 찾으려고 하는 줄 알았다. 괜히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놈들이 추적하는 길목에 훔친 물건들을 다 놔뒀다. 대신 더 이상 쫓지 말라는 쪽지도 남겼지. 그런데 이놈들이 계속 추적을 하더란 말이야.”

“그럼 도문에 도움을 청하셨어야지요? 문주님께서 장로님께서 몇 년째 모습을 안 보이신다고 걱정을 얼마나 하셨는데요?”

“무서웠다.”

“예?”

중년인은 천하의 귀도신영이 무서웠다는 말에 경악한 눈으로 반문했다.

“도문에 도움을 청했다면 그놈들은 당장 나의 정체를 알아냈을 게다. 나 때문에 도문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었다.”

“천하의 어찰단에서조차 저희를 추적하다가 포기했는데, 누가 있어 저희 도문을 건드린다는 말입니까? 만약 건드리면 순식간에 거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으음…… 안 되겠다. 대화는 다음에 다시 하자.”

귀도신영은 고통이 심한지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우선 금창약을 발랐으니 얼마간은 더 견디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문 사람들에게 검상에 좋은 약을 가지고 있으면 당장 가지고 오라고 연락했으니,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전 다시 나가서 의원을 한 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절대 데려오지 마라.”

“예, 걱정 마십시오.”

중년인이 나가자 귀도신영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얼굴 하얀 자…… 그런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누구였을까?”

예리한 관찰력과 빠른 상황 판단, 거기에 눈치와 인간이 가진 오감을 장시간 사용해도 진이 빠지지 않을 체력까지 두루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도둑질이었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은 필수였다.

귀도신영은 그런 도둑들 중에서도 특출한 자였다. 특히 배짱만은 스스로 천하제일일 거라고 자부할 정도로 두둑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보며 씨익! 웃던 그자의 눈을 생각하자 다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것이다.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 그런데 어디서 찾지?’

귀도신영은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지금 홍항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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