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41화>
141화. 홍항(2)
“으음……. 빨리 의원을 찾아야지, 이러다가는 치료해 줄 의원을 찾기도 전에 먼저 죽고 말겠다.”
귀도신영은 꿰맨 곳에서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침음성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놈의 검법이 어느 문파의 것이기에, 신출귀영으로도 피하지 못한 거지?’
자신의 상처를 살피던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상한 자들이 수레째 맞교환하는 장면을 본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열 수레와 한 수레의 교환.
그는 한 수레가 더 귀한 물건이라는 판단 하에 그것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광동의 성도인 광주의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장원이었다.
자신의 육감이 계속해서 강력한 위험 신호를 보내왔지만, 그는 무시했다.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들어간 비밀 창고에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놓인 자리에 만들어진 그곳의 흔적들로 보아하니, 단순히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어디론가 옮기기 전 잠깐 머무는 장소로 보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닥치는 대로 자루에 넣고는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위기감을 느낀 것 자체가 의아할 정도로, 모든 일은 너무나도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처음에는 간단히 따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추적은 대단히 빨랐고 정확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몸에 천리향이라도 묻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목욕도 여러 번 했고 옷도 완전히 갈아입는 등 자신이 아는 모든 추적 방식을 감안한 도피를 했지만 그들은 빠르면 이삼 일, 늦어도 보름 안에는 그를 찾아냈다.
만약 그가 변장술을 몰랐다면 이미 그들에게 잡혔을 것이 분명했다.
귀도신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자를 만났던 순간이 기억이 나서였다.
그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을 한 후 상인 무리에 섞여 홍항 쪽으로 가고 있었다. 추적하는 자들의 입에서 도문이라는 말이 나와서였다.
이대로라면 도문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장 가까운 홍항 지부로 가는 중이었다.
그때 정말 너무 하얀 남자가 검을 팔짱 안에 끼운 채 나무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피부가 뽀얀지, 나이조차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강한 위험 신호를 느끼고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모른 척 걸었다.
상인으로 변장을 한 이상, 산에서 무기를 든 무림인과 마주쳤는데 겁 없이 그를 쳐다본다는 것은 자신이 상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얼굴을 바꾼 지 한 시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좀 더 안심하고 있었다.
백면의 괴인은 슬쩍 고개를 들고는 상인들을 한 명 한 명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신법에는 자신이 있는 그조차도 섬뜩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어떤 놈인지 참 대단한 놈이야.”
괴인의 말에 무리를 이끌던 상인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 저희는 그냥 상인입니다.”
“알아. 그런데 너희들 중 한 놈이 겁 없이 우리 물건을 건드렸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 놈은 알아서 앞으로 나서라.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는 놈들 다 죽는다.”
괴인의 말에 상인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얼굴도 섬뜩한데 목소리까지 저절로 공포감이 들게 하는 자였다.
귀도신영은 그자의 목소리에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어차피 버텨봐야 죄 없는 상인들만 모두 죽을 것이니, 자신이 도망을 쳐서 상인들 목숨이라도 구하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운이 좋았는지, 상인들 중 그 말고도 변장한 무림인이 있었다.
무림인은 백면의 괴인이 정말 죽이려고 하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무공만으로 치면 귀도신영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너무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몸이 사분오열이 되는 데는 삼 초면 충분했다.
그의 죽음 덕에 귀도신영은 몸을 피할 찰나의 시간을 벌었다.
그때 그는 자신을 보며 씨익! 웃는 괴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신(死神)의 얼굴이었다.
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자 전력을 다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걸리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망친 지 일각도 안 되어 곧 도망을 포기하고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내장이 나올 정도로 큰 자상을 배에 입은 것을 그때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언제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당한 것이다. 심지어 상처가 벌어진 것도, 그가 도망을 치고 약간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뭔가를 건드린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그리고 나를 추적한 자들은 그 괴인이 아니었어……. 어쩌면 대단한 세력까지 가진 자들 같은데……?’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생각만으로도 공포가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지혈을 하고 금창약까지 덕지덕지 발랐음에도 또 다시 피가 새어나오자 귀도신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이번 위기만 벗어나면 네놈들을 그냥 안 둔다. 도둑놈이 강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이를 바드득 간 그는, 자신이 들어갔던 장원에서 했던 행동을 하나하나 반추하기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는 걸 보면, 절대로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될 뭔가를 자신이 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 * *
“백설은 타지 말고 그냥 걷자.”
담수련은 백설이 배 안에서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육지에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 걷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백설은 제가 끌고 아가씨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나 지금 괜찮아?”
담수련은 지난 시간 하지 않고 있던 남장을 다시 하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들을 추적하는 자들이 일남일녀를 쫓았기에,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수였다.
쫓기며 협행을 하는 와중에도 남장을 하지 않았던 둘이기에, 분명 추적하는 자들의 정보에 혼선이 생길 것을 유도한 것이다.
“아가씨는 학사 차림이 진짜 잘 어울리십니다.”
“소군은 무조건 다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못 믿겠어.”
“저보다는 아가씨께서 더 무조건이시지요.”
“내가 뭘 무조건 했는데?”
“무조건 너무 예쁘시잖아요?”
“그런 말이었어?”
담수련은 금방 활짝 웃었다. 누구보다도 악불군이 예쁘다고 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그녀였다.
“제 생각인데, 아가씨께서는 추녀로 역용을 하셔도 예쁘실 겁니다.”
‘피! 추녀로 역용했는데 어떻게 예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담수련은 속으로 구시렁댔지만 여전히 기분은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함박 피어 있었다.
“참, 배를 처분해야지.”
뭔가 생각이 난 듯 담수련은 마진우와 구여풍을 이리저리 보더니 결정한 듯 말했다.
“아무래도 마 대협보다는 구 대협께서 더 잘 팔 것 같네요. 이 배를 팔고 오세요.”
“팝니까?”
“더 이상 배를 탈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이고 다닐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에는 좀 비싼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팔리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싸게라도 빨리 팔고 오세요.”
“그러겠습니다.”
담수련과 악불군이 먼저 배를 내리자 마진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야! 구 호.”
“왜?”
“우리가 아가씨하고 장사에 대해 말한 적 있었나?”
“장사는커녕 대화조차 거의 없었잖아?”
“그런데 네가 더 잘 팔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아신 거지?”
“그러게? 가만 보면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정말 정확하신 것 같아. 그런데 넌 안 가냐?”
“공자님과 아가씨께서 어느 정도 가셔야 뒤를 따르지. 우리는 그림자 호위 아니냐?”
마진우는 자신이 말하고도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말하고 자기를 대견해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너 죽을래?”
“나 죽이는 것은 다음에 하고, 빨리 가 봐라. 뭔 일 생긴 것 같다.”
구여풍의 말대로 악불군과 담수련이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을 보자, 마진우는 급히 몸을 날렸다.
“소군, 이분 빨리 옮겨.”
담수련은 급하게 말했다.
“그래 봐야 못 살립니다. 상처가 너무 커요.”
그 모습을 보던 한 선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담수련의 앞에는 한 선원이 피를 철철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배에서 작업 중 떨어지면서 큰 쇠갈고리에 배를 심하게 찔린 것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노력은 해 봐야지요.”
“의원이신 모양인데, 그 친구 돈도 없어요.”
또 다른 선원의 말에도 담수련은 답하지 않고서, 선원을 안은 악불군을 보며 빨리 움직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까운 곳에 제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는데, 거기 빈 방이 있습니다.”
그때 상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안내하십시오.”
중년인은 급히 그들을 안내했다.
* * *
“장로님!”
귀도신영은 의원을 찾아 나갔던 홍항분타주 우송탁이 방에 들어서자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을 구했느냐? 이러다가 나 죽을 것 같다.”
“오늘 운이 좋으려니까 포구에서 생각도 못한 의원을 만났습니다.”
“운이 좋았다면 네가 아니라 날 게다. 그런데 어떤 의원인데?”
“선원 한 명이 쇠갈고리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상처가 장로님 상처와 비슷했습니다. 누가 봐도 죽을 상처였는데, 갑자기 의원 한 명이 고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옆방에서 치료 중이니까 비밀경을 통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문의 분타들은 도둑들이 가져온 장물을 처분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장물이란 것이 비밀을 요하는 것이다 보니 도둑들은 대부분 독대를 원했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그들의 행동을 다른 방에서 살필 수 있는 비밀경이었다.
“무림인 같지는 않더냐?”
“학사 차림의 청년과 호위무사 같은 무인 둘입니다. 무림인들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것을 사용하면 되느냐?”
그가 있는 우송탁의 집무실에는 비밀경을 볼 수 있는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
“이걸로 보시면 됩니다.”
* * *
“아가씨의 어진 마음은 저도 이해를 하지만, 다친 사람들을 무조건 다 치료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담수련이 쇠갈고리에 크게 찢긴 상처에 약을 뿌리고 꿰매는 것까지 다 끝내자, 악불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살릴 수 없는 상처였다면 나도 그냥 갔을 거야. 하지만 내가 보기에 치료하면 살 수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냥 간다면 살인자와 뭐가 다를까? 더구나 이들은 무림인들이 아니라 양민이야. 그리고 난 새편작 어르신의 의서를 물려받은 책임이 있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만……”
“말 안 해도 알아.”
담수련은 악불군이 선원을 여기까지 안고 오고 자신이 상처를 다 치료할 때까지 기다린 것은 그 역시 선원을 구해 주고 싶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우태균이 안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났습니까?”
“대인께서 이런 방을 제공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직도 대인 같이 어려운 사람을 구해 주려고 발 벗고 나서는 분이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군…….’
담수련의 칭찬에 우송탁은 약간 죄책감이 드는지 급히 말을 돌렸다. 사실 귀도신영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죽건 말건 모른 척 지나갔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보기에 의원님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신의 같습니다. 누가 봐도 죽었을 사람인데 살리시다니 말입니다.”
“제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었다는 것이 더 다행이었지요.”
말을 마친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악 대협, 이제 가지요.”
“예.”
담수련이 몸을 일으키자 우송탁이 급히 앞을 막으며 말했다.
“의원님, 사실은 이곳에도 심각한 부상자가 있습니다. 오신 김에 잠깐 진맥이라도 한번 해 주십시오.”
“많이 아프신가요?”
“이곳으로 오던 중 산적을 만났는데 큰 자상을 입으셨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런 편의까지 제공하셨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어디 계신가요?”
“옆방에 계십니다. 제가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아프신 분을 오게 하는 것은 의원의 도리가 아닙니다. 가시지요.”
‘자꾸 저러시면 안 되는데……?’
자신이 말릴 새도 없이 담수련이 승낙을 하자, 악불군은 말도 못하고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나가던 그의 눈이 한쪽 벽으로 향했다.
귀도신영이 그 방 안을 살피던 비밀경이 연결된 벽이었다.
천하제일의 도둑과 악불군의 만남 또 어떤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