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43화 (143/472)

<천검지애 143화>

143화. 귀도신영(2)

혈응은 영물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였다. 다른 영물은 실존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지만 혈응은 사람들의 눈에 이따금 띄기 때문에 더욱 유명했다.

붉은색이 감도는 깃털을 가지고 있으며, 덩치는 독수리보다 컸고, 대단히 흉폭해서 호랑이조차도 혈응을 보며 피한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만 들으면 단순히 강한 동물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 혈응이 영물 반열에 든 이유는 아주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악불군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 경악을 했을 것이었다. 고수들의 눈으로 봐도 그냥 점으로 보이는데, 매라는 것만 안 것이 아니라 색까지 분별해 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계속 주시하던 악불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혈응의 움직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혈응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날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지? 거기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한곳에 떠 있어. 마치 뭔가를 감시하는 것 같이 말이야…….’

악불군은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백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설아. 설마 너, 저 혈응을 보고 이런 거냐?”

악불군은 백설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백설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보여? 말들은 먼 곳은 잘못 본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구나. 내가 보니까 너를 노리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내가 가까이 있는데 뭘 불안해해?”

백설은 악불군의 말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벼 댔다. 악불군은 백설의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풀리는 것을 느끼자 대견하다는 듯 목을 토닥거렸다.

하나, 그의 토닥임은 곧 멈췄다. 수상한 기운들이 속속 그들 주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이자들은 또 뭐지? 우리를 노리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 온 것인가?’

악불군의 얼굴에 약간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가 바다의 변덕에 대해 들었으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돌아 홍항까지 항해해 온 것은, 담수련과 편한 마음으로 북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제발 부탁이니 건드리지 마라. 정말 살생은 더 하고 싶지 않다.’

악불군은 최대한 그들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주위를 보지 않고 백설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백설아. 내가 고삐를 풀어 줄 테니까, 혹시 위험을 느끼면 저기 보이는 산 쪽으로 달려가서 놀고 있어.”

백설은 악불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한 번 보더니 알았다는 듯이 다시 얼굴을 악불군의 어깨에 비벼 댔다.

나타난 자들이 눈에는 그저 말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마부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말을 정말 잘 다루시나 봅니다. 금방 조용해졌네요?”

악불군이 상점 안으로 들어오자 우송탁이 감탄하듯 말했다.

“홍항에도 무림 세력이 있습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우송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왜 갑자기 물으십니까?”

“저는 의원님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이 안전한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입니다.”

“현재는 홍항에 무림 세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안전한 곳은 아니지요. 구천마성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전 여전히 그들이 홍항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악불군은 그 정도면 됐다는 듯 포권을 하더니 담수련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설이가 왜 그래?”

악불군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치료를 끝낸 담수련이 치료 도구들과 약을 챙기고 있었다.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심심하면 산에 가서 놀고 있으라고 고삐를 좀 풀어 줬습니다. 백설이 없으면 아가씨께서 많이 불편하실 것을 알면서도 제 임의대로 결정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불편할 것이 뭐가 있어?”

“오래 걸으시면 힘도 드시고…….”

“내가 왜 힘들어. 힘들 것 같으면 소군이 업어 주면 되지. 좀 머리 좀 써.”

“하하, 그러고 보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군요? 아가씨의 머리는 제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칫!”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 듯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악불군의 아부성 칭찬이 점점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담수련의 미소 또한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분, 살아나실 수는 있겠습니까?”

악불군도 새편작의 의서를 읽어 보았고, 경이적인 기억력 덕분에 그 내용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의서의 내용 중, 귀도신영 같이 큰 자상을 입고 덧날 경우 살기 어렵다는 구절이 기억났기에 물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기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이분은 체력이 엄청 좋으시네. 살아나실 것 같아.”

“그럼 저희는 이제 가도 되겠군요?”

악불군은 밖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만약 자신 때문에 왔다면 아까 자신을 보았을 때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한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온 이유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노인일 것이 분명했다.

처음 귀도신영의 자상을 봤을 때, 악불군은 또 일이 꼬이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의 배를 가른 자상의 상태에서 초절정 고수들도 쉽게 시전하지 못할 대단한 검법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급해?”

담수련과 상관없는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악불군의 마음을, 상황을 모르는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치료가 끝났으면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끝났으면 당연하지. 하지만 이분은 좀 더 경과를 봐야 해.”

“알겠습니다.”

악불군은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이 근처를 포위하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배를 타고 오면서 그동안의 불안을 다 떨쳐 버렸는지 행복해하던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 대협!]

문가로 가서 선 악불군은 마진우에게 전음을 날렸다.

[예, 공자님.]

[지금 이 근처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미 감지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고수는 제가 상대할 수 없는 실력자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악불군은 아직 비몽사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귀도신영을 흘깃 보며 반문했다. 그의 무공 실력 정도에, 마진우가 상대하지 못할 고수까지 동원된 이유를 의아해서였다.

[구여풍이 오면 넉넉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저들의 정체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오늘은 좀 조용히 보냈으면 싶어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전음을 끝낸 악불군은 귀도신영을 쳐다보았다.

그가 신음성을 토해 내며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끝났소?”

“잘된 것 같습니다.”

담수련의 대답을 들은 귀도신영은 자신의 배를 살살 만져 보고는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포권을 했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아니요. 확실히 아까와는 아픔의 강도가 다르오. 고맙소. 제가 꼭 이 구명지은에 대한 보답은 꼭 하겠소이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 의원님의 이름도 제대로 듣지를 못했소이다.”

“못 들으신 것이 아니라 제가 말씀을 아직 안 드렸습니다.”

“노부가 이름이라도 알아야 보답을 하지 않겠소?”

“저희는 보답 같은 것을 바라고 치료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두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의원님 생각이고, 구명지은을 받은 노부로서는 마음의 빚인데 보답을 안 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소?”

‘생긴 것은 도둑 같이 생겼는데, 그래도 도리는 챙기는 것을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네.’

담수련은 귀도신영의 말 속에 진심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며 말했다.

“우선 몸을 추스르는 것이 먼저이니, 그 얘기는 다음에 하지요.”

“아니요. 이 정도면 됐소. 난 이제 떠나야 하오.”

말을 마치고 일어서던 귀도신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배를 손으로 만졌다. 고통이 느껴진 것이다.

“꿰맨 상처가 아물기 전에 움직이면 또다시 터질 수 있어요. 그땐 저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누우세요.”

“의원님은 모르오. 저를 죽이려는 자들은 정말 집요하오. 곧 이곳을 찾을 것이고,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까지 다 위험해질 수가 있소이다.”

“이제 막 신시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직 환한 대낮이고 밖에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리 무도한 자들이라 해도 지금은 아무 짓도 못해요. 하지만 고 대인은 지금 움직이면 진짜 죽을 수 있어요.”

“의원님은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모르시오. 그들은 나를 찾지 못하자 근처에 있는 양민들까지 모조리 죽인 자들이오.”

“알았으니까 우선 누우세요. 고 대인의 체력을 보니까 이틀 정도만 쉬면 움직이실 수 있을 겁니다.”

담수련의 권유를 떠나, 귀도신영도 일어나 보니 도망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운기조식은 해도 되겠소?”

“정좌를 하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움직이는 것보다는 낫겠네요. 대신 등을 벽에 대고 하세요.”

“그러리다.”

도망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귀도신영은 벽에 등을 대더니 곧 깊은 운기조식에 빠져들어 갔다.

무림인들이 매일 하는 가벼운 운기조식은, 효과는 떨어져도 주위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즉시 운기조식을 멈추고 대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운기조식은 무아지경에 빠져 주위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운기조식 중 누가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어, 비밀 장소에서 폐관을 하거나 호법을 세워야만 했다.

귀도신영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깊은 운기조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원기를 많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진기는 가벼운 운기조식으로도 보충이 가능하지만, 원기는 반드시 깊은 운기조식을 해야만 빨리 채울 수 있었다.

귀도신영이 무아지경에 빠지자, 담수련은 악불군을 슬쩍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이분, 지금 굉장히 다급한가 봐? 이런 곳에서 깊은 운기조식을 하다니 말이야.]

[제가 보니까 무공에 비해 내공이 상당히 정순합니다. 운기조식을 끝내면 많이 좋아질 것 같으니, 저희는 슬슬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아.]

[꼭 그러셔야 합니까?]

[간신히 살려 놓았는데 애먼 자들이 나타나 죽이면 내 수고가 너무 아깝잖아? 그리고 소군도 방금 들었지?]

[무엇을 말하시는지요?]

[무공을 배운 자들이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했잖아? 소군은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있어?]

[아가씨. 제가 계속 말씀드리지만, 세상 모든 부조리를 우리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세상 부조리를 우리가 어떻게 다 고쳐?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고쳐야지. 이런 인연을 하늘이 만들어 준 이유가 있지 않겠어?]

[하지만 저희는 아직 이분과 이분을 쫓는 자들 중 어디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잘잘못은 상관없어. 그들이 양민을 죽였다는 것이 문제지. 그리고 난 고 대인이 한 말을 믿어.]

[…….]

[왜 대답 안 해?]

[아가씨, 요즘도 악몽을 꾸고 계십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자꾸 피를 보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소군에게는 내 안전이 최우선이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게는 최우선이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가씨니까요.]

[그럼 내 말을 따라 줘. 힘들다 해도 나 혼자잖아? 하지만 나쁜 자들을 없애면 수많은 사람들이 편해져. 오음절맥에 걸린 사람은 마음이 편해야 오래 산대. 그런데 그런 자들을 알면서도 나 혼자 편하라고 그냥 간다면, 난 죄책감이 들어서 못 견딜 거야.]

악불군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후우~ 내가 아가씨를 어떻게 이기겠나…….’

[알았습니다. 무공을 배운 자가 양민을 해쳤다면 당연히 징치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아가씨, 제가 힘이 부친다 싶으면 무조건 아가씨를 안고 도망을 칠겁니다. 그건 아가씨께서 안 된다고 하셔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소군인데. 소군이 당할 수 없다면 내가 먼저 도망가자고 할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 봐. 내가 고집 부려서가 아니라, 소군도 이자들 용서하기 싫잖아?]

[예, 저도 그런 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호호호~ 가만 보면 소군과 나는 생각까지도 참 잘 맞는 것 같아.]

‘아가씨만 좋으시면 일치 안 해도 전 일치합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웃음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리자 다시 한마디 했다.

[그리고 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소군만 옆에 있으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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