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46화>
146화. 알 수 없는 세력(2)
악불군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결례라니요? 절대로 그런 거 없었습니다.”
“노부가 운이 좋다고 언제나 떠벌렸지만, 오늘이야말로 진짜 운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동안 어떻게든 살 길을 찾기 위해 나름 고심을 했던 그는 적들이 이 근처를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구원의 손길이 나타난 것이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포위한 자들의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더구나 고수들도 많이 왔고요.”
“그럼, 그럼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귀도신영의 말투가 순식간에 극존칭으로 바뀌었다. 무림에서는 나이나 배분도 중요하지만 역시 강한 자가 가장 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그였다.
“선배님.”
“예!”
“지금 여기서 싸울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귀도신영과 우송탁의 고개가 떨어졌다.
도문은 무림인들에게 무림 문파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고수의 수가 적었다.
장로급인 귀도신영조차 경신술은 대단하다는 말을 듣지만 무공 자체는 초절정급에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분타는 남들의 눈을 의식해 토박이들을 점원으로 쓰고 있었다.
“말해 봐라. 몇 명이나 되냐?”
귀도신영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지금 이곳에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지닌 제자는 없습니다. 제가 가장 강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이대로 싸웠다가는 괜한 피해만 생길 것이니, 도망을 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저들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있겠지요?”
도둑들의 분타이니 당연히 비밀 통로가 있을 것으로 믿고 물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도 우송탁은 고개를 떨궜다.
“분타를 이곳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래서 비밀 통로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분타를 세울 때 무엇보다도 비밀 통로를 먼저 만들라고 하지 않았냐?”
귀도신영은 약간 창피한지 질책을 하듯 말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어수선해서 도문의 수입이 격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총단에 돈이 별로 없습니다.”
도문은 대단한 부자로 알려 있었고, 실제로도 처분하지 못한 보석과 귀중품을 창고에 쌓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비싼 물건일수록 현금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용할 현금은 언제나 부족했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지하에 뚫으려면 돈도 많이 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했고 거기서 나오는 돌과 흙들을 처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뚝딱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도망도 어렵고 결국 싸워야겠군요. 그럼 숨을 장소는 있습니까?”
“그런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뒤지면 찾을 수 있을 텐데요?”
“뒤지지 못하게 해야지요. 노선배님 말이 맞다면 그들은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만약 싸움이 나면 상점도 많이 부서지겠지만 희생자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숨는다기보다는 싸울 동안 안전을 위해 잠시 피할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지하 창고라서 이 건물이 무너진다 해도 안전할 겁니다.”
“됐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도문 분들을 모두 그곳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당장 말입니까?”
“예, 좀 빨리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자들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빨리 명하신 대로 하지 않고 뭘 꾸물거려? 당장 나가 봐!”
“예! 알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할까요?”
우송탁이 나가자 귀도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의견으로는 아직 상처도 심하시고 하니 지하 창고에 가서 숨어 계시는 편이 나아 보이지만, 노선배님께서 따르실 것 같지가 않군요.”
“노부가 비록 도둑놈이고 상처도 심하긴 하지만, 저를 위해 악 대협께서 이런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고 도움을 주시는데 숨어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습니다.”
악불군은 당연히 그런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노선배님.”
“말씀하십시오.”
“갑자기 제게 극존칭을 붙이시고 그러시니까 제가 많이 어렵습니다. 그냥 아까처럼 말씀하십시오.”
바로 강호의 선배이자 나이도 훨씬 많은 귀도신영의 극존칭이 무척이나 어색했던 것이다.
“노부가 갑자기 표변(豹變)해서 이중적인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악 대협, 노선배님 말씀을 좀 더 들어 봐요.”
답하려던 악불군은 담수련이 옷을 살짝 잡아당기자 말을 멈췄다.
천호무적검이 천상신녀를 보호한다는 소문은 이미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그녀에 대한 행동은 보호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했다.
‘대단한 명성을 가진 고수를 말 한마디로 움직이게 한다? 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지. 실세는 저 소저로군.’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무림인답게 귀도신영은 악불군과 담수련과의 관계 정립을 순식간에 끝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악 대협께서는 무림을 왜 처절한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죽고 죽이는 것도 해당이 되겠지만, 사실은 누가 공경을 받고 누가 무시를 당하는지도 약육강식의 일종이지요.”
“노선배님께서 정말 좋은 얘기를 하시네요. 계속해 주세요.”
담수련이 맞장구까지 쳐 주자 귀도신영은 신이 나는지 장광설(長廣舌)을 펼치기 시작했다.
“모든 동물들은 호랑이만 보면 도망을 갑니다. 그건 호랑이보다 더 나이가 많건 덩치가 크건 큰 상관이 없습니다. 싸움 자체가 안 되니까요. 하지만 짐승이 아닌 사람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런 강자를 보면 도망을 택하기도 하지만, 최대한 공경을 해서 친해지려고도 하지요. 그리고 친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진심이 담긴 공경을 해야 한다는 것이 노부의 생각입니다. 그러니 노부를 말리는 것보다는 악 대협께서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시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귀도신영의 말은 강호 경험에 입각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영민한 악불군이기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제나 윗사람들에게 명을 받던 그로서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아셨죠? 악 대협은 이미 예전의 악 대협이 아니라고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악불군과는 달리 담수련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미소까지 지어 가며 말했다.
점점 그녀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 대협, 애들이 모두 숨었습니다.”
그때 우송탁이 들어오며 마치 악불군이 원래부터 상전이었던 듯 보고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이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사자님, 진입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곧 들어갈 것입니다.”
“…….”
상점 거리의 전경이 모두 보이는 장소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백색마혼은 귀면탈의 보고를 들었지만 대답도 없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왜 이러시지?’
귀면탈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도둑을 쫓아 홍항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랜 만의 외유가 마음에 드는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심지어 상처까지 입은 귀도신영을 놓쳤을 때도, 그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한 후 갑자기 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이다.
“사자님, 무슨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눈치를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다. 교내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불안함은 더 가중되고 있었다.
그때 백색마혼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새어 나왔다.
“위험 신호가 계속 울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귀면탈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사람들 중 유난히 육감이 발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무공을 익히면 저절로 신체가 반응하는 위험 감지 능력이 생긴다.
백색마혼은 그런 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이렇게 강한 위험 신호는 내가 느껴 본 적이 없다.”
“구천마성에서 나타난 것일까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뭐지? 이곳에 뭐가 있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위험 신호는 냉정하기로 유명한 그조차도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악불군은 천천히 밖으로 나와 상점의 정문 앞에 팔짱을 끼고는 섰다.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군.’
악불군은 안채로 들어가는 문 옆, 나무 근처에 있던 백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피식 웃었다. 싸움이 벌어지리란 걸 벌써 눈치채고는 자리를 피한 것이다.
“오늘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때 어부 한 명이 상점 앞으로 다가오자 악불군은 손을 뻗어 막으며 말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닌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우송탁이 대외적으로 하는 장사는 어부들이 사용하는 어구(漁具)를 파는 것이었다.
“나도 급하단 말이오. 그물만 하나 삽시다.”
“제가 여기 점원 같습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어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주의가 좀 산만한 듯, 그제야 악불군의 등에 매인 검을 본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어부가 사라지자 악불군은 한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시오! 싸우려고 온 것 같은데, 괜한 곳에 들어갈 필요 없으니 이쪽으로 오시오.”
그들은 곽흠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척 떨어져서 왔지만 악불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악불군의 말을 듣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자식 뭐라는 거야?]
[우리한테 한 얘기야?]
그들은 다급히 전음을 나누었다.
“보아하니 사람을 죽이려고 온 것 같은데, 찾으려는 분이 여기에 있으니 이리로 오라는 겁니다!”
[우리가 같은 편인 것을 저놈이 어떻게 알았지?]
[저놈, 우리가 여기 온 이유도 아는 것 같은데?]
그들은 악불군이 있는 상점에 그들이 찾는 자가 있다는 것을 직감한 듯 모두 악불군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무림인들 싸움 났다. 도망치자!”
그 모습을 본 한 행인이 상황을 눈치챈 듯 크게 외치며 도망치자, 다른 행인들도 급히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악불군이 굳이 그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크게 소리 친 것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행인들이 가까이 있다가 개죽음을 당하거나 심하게 상처를 입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 * *
“교통님, 변수가 생긴 모양입니다.”
수석전사인 양규호는 각 상점으로 들어가라고 명을 내린 수하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한 상점으로 모두 움직이자 뭔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급히 곽흠에게 보고했다.
“나도 보고 있다.”
곽흠의 시선은 그 상점 앞에 서 있는 악불군에게 꽂혀 있었다.
“저놈이 뭔가 소리를 질러 수하들을 그쪽으로 유인했다. 저놈이 누구인지 빨리 알아내라.”
“예!”
양규호가 급히 사라지자 곽흠은 다른 수하에 말했다.
“너희는 모든 전사들을 저 상점 쪽으로 이동시켜라.”
“알겠습니다.”
둘이 나가자 곽흠은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소매에서 마치 삼지창처럼 생긴 기이한 무기가 튀어나오더니 그의 손목에 철컥 걸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거지?’
백색마혼보다 늦기는 했지만 그도 드디어 위험 신호를 느끼기 시작했다.
* * *
“소저, 악 대협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악불군은 아무리 위험한 곳을 가더라도 담수련을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있게 했다. 조금이라도 위기가 닥친다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그녀를 안고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쉬어야 한다는 담수련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귀도신영이 그녀를 따라 상점까지 나온 것이다.
그의 말투는 악불군만이 아니라 담수련에 대해서도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담수련은 악불군과 달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담수련의 악불군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단지 악불군의 무공이 강하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군, 다치면 안 돼…….’
하지만 적들이 악불군의 앞으로 다가올수록 그녀 역시 불안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