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47화>
147화. 급변하는 정세(1)
악불군은 팔을 들어 다가오는 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
이들의 최선임인 홍시국은 악불군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중한 물건을 도둑맞고 그것을 찾는 분들 아니십니까?”
“네가 그 도둑놈이냐?”
‘대단하신 분이군.’
홍시국의 말에 악불군은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 나타난 자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심지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자들의 무공은 더욱 높았다. 거기다 그 수가 최소한 삼십 명은 넘어 보였다.
그런데 겨우 귀도신영의 경지로 이런 자들에게 얼굴까지 들키지 않고 도망다닌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악불군 자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지금껏 도망다니지 못했을 것 같았다.
‘기회가 되면 도망치는 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군.’
악불군이 대답이 없자 홍시국이 인상을 구기며 다시 물었다.
“네놈이 감히 우리 물건에 손을 댄 도둑놈이냐고 물었다!”
“당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감히라는 말은 좀 과한 것 같군요.”
“네놈이 맞았구나!”
홍시국은 당장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흑의인이 급히 홍시국에게 전음을 날렸다.
[저놈은 아닙니다. 그 도둑놈은 사자님의 검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저놈은 너무 멀쩡하지 않습니까?]
[아니더라도 연관은 있는 놈이겠지.]
“전음은 끝냈습니까?”
“뭐야?”
“의논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시지요. 이 정도에서 끝내고 돌아가신다면 살려 드리겠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홍시국의 표정에 노기가 나타났다.
“눈에 피눈물이 흘러야 상황을 파악할 놈이구나! 제압…….”
소리치던 홍시국의 말이 멈췄다. 그의 주위로 이십 명이 넘는 흑의인과 얼굴을 반쯤 가린 중년인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홍시국은 급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교통님, 저놈이 그 도둑놈을 아는 것 같습니다.”
보고를 마친 홍시국은 곽흠의 뒤로 가서 섰다.
“강호를 주유하다 보면,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큰소리를 치는 놈들이 있지. 보통은 그 행동이 제 명줄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곽흠은 말하면서 악불군과 상점 주위를 살폈다. 혹시 매복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지를 살핀 것이다.
“말을 들어 보니 양민들도 죽인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양민? 우린 양민이고 뭐고, 우리 일을 방해하는 놈들은 다 죽인다. 특히 너 같이 나대는 놈들은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한 후에, 죽여 달라고 사정을 하면 그때 죽여 주지.”
“제가 원래 두말하지 않는 성격인데 오늘은 그 원칙을 깨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 전 살려 준다고 했는데, 취소해야 할 것 같네요. 오늘 당신들은 여기서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놈…….”
어이없다는 듯 말하던 곽흠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목울대를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학살에 가까운 살인이 일어났다. 무려 사십 명에 가까운 전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있었던 또 한 번의 각성은 그의 무공은 놀랍게 진보시켰다. 그의 천륭검법은 더욱 빠르고 현란해졌으며 환영전궁보에 배교의 탈혼귀무를 혼합하여 새롭게 만든 그의 보법은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악불군의 무공을 가까이서 본 귀도신영은 턱의 아래 위가 턱턱 부딪칠 정도로 떨고 있었다. 그것은 경악을 넘어 공포에 가까웠다.
놀라기는 담수련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만에 더 강해졌어……? 도대체 소군의 한계가 어디기에…….’
무공이 약한 그녀가 보기에도 남해성모궁에서 진소혜와 비무를 할 때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모조리 제거한 악불군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백색마혼과 영존이 있는 곳이었다.
[당신들 거기에 있는 거 압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서 이쯤에서 끝낼 생각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추적하는 분은 나와 친분이 있습니다. 또다시 그분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본래였다면 악불군도 둘을 끝까지 잡아 없앴을 터였다. 하나 너무도 먼 거리이기에 쫓았다간 놓칠 가능성이 높아 경고를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둘을 쫓는 사이 담수련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무리하지 않았다.
전음을 끝낸 악불군은 몸을 돌려 상점 앞에 서더니 말했다.
“의원님, 끝냈습니다. 이제 가시지요.”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 악불군의 말이 끝나자 담수련은 귀도신영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작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노선배님은 체력이 좋으셔서 상처가 금방 아물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심한 운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히 싸움도 피하셔야 하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 한 필만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가져가십시오.”
악불군이 담수련을 말에 태우고 북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마진우는 급히 구여풍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구 호, 정신 차려! 공자님하고 아가씨 가신다!”
“난 요즘 공자님의 무공만 보면 넋을 잃게 된다. 저러다가는 사대무황까지 이기는 거 아니냐?”
“막주님 얘기 못 들었어? 사대무황은 우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무공을 사용한다고 했잖아? 공자님께서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이가 있으시니 아직은 비교하기 어렵지. 하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십 년 안에 진짜 사대무황도 능가하실 것 같다.”
“사 호, 막주님께 연락해라. 백인막을 아예 공자님 주위로 옮기자고.”
“막주님 성격에 그게 먹히겠냐?”
“우선 연락해서 일 호와 이 호를 보내달라고 해. 그들도 공자님을 보면 결국 반하게 될 게다.”
“하긴, 일 호와 이 호까지 그러자고 하면 막주님도 생각이 바뀌실 수 있겠지. 그런데 이제 한 마리밖에 안 남았는데, 그걸 사용하면 연락이 완전히 끊기는데?”
“이런 식이면 반년도 안 돼서 방파 하나를 세울 정도로 공자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질 거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공자님의 심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빨리 연락해.”
“공자님, 이미 사라졌다니까?”
“연락하고 가도 안 늦다.”
지금 구여풍의 말은, 백인막이 악불군의 단순 협력 세력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그의 수하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해남도에 가기 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마진우는 당장에 미쳤다고 하면서 거절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젠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사, 사자님.”
귀면탈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백색마혼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로 미루어 사색이 되어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위험 신호를 느낀 이유가 바로 저놈이었군.”
“이대로 보내실 것입니까?”
“저 먼 거리에서 우리를 느끼고 전음까지 보내 협박을 한 놈이다. 당연히 그냥 보낸다면 백색마혼이 아니지.”
“그, 그럼…… 어떡할까요?”
“지금 전사들이 몇 명이나 있느냐?”
“열 명 정도 남아 있습니다.”
“전사들에게 미행을 하게 해라. 우선 저놈의 정체부터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악귀도마가 가까운 곳에 있다. 당장 연락해서 오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영존이 떠나자 백색마혼의 입가에 싸늘한 살소가 떠올랐다.
“감히 혈교를 건드린 네놈이 계속 웃을 수 있을까 보겠다.”
중얼거림과 함께 사라진 그의 주위의 풀들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남긴 살기가 지독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
혈교.
만약 무림인들이 그 단어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 *
“이쪽으로 가십시오.”
철무정은 안내인이 가리킨 시커먼 통로를 보자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성도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지만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통로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괴이한 음향과 함께 자신이 들어온 곳에 철문이 떨어지며 막혀 버렸다.
그러자 통로는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완전히 갇혔군.”
누구라도 불안해할 상황이었지만 철무정은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하며 태연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가에 돌아온 그가 가주의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최고 간부 십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모두 그를 쳐다보았지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인사하려고 하자 철장표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처음 보는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를 데리러 온 안내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 단주의 일은 아주 중요한 사안인데 그 말을 꺼내지도 않으셨어. 거기다 내가 어디 가는지도 말씀을 안 하셨고.’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따금은 그 믿음이 깨질 때가 있었다.
철무정이 얼굴이 확 굳었다.
미세한 파동음.
분명 그를 향해 날아오는 뭔가가 만드는 것이었다.
탕!
어느새 뽑힌 철무정의 도가 보이지도 않는 암기를 정확하게 쳐 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그에게 날아오는 암기는 그 수를 헤아릴 수거 없을 정도였다.
차르르르륵!
철무정의 도가 회전하며 그의 앞에 도막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전진했다.
이런 좁은 통로 안에서 계속 막기만 했다간, 그 끝엔 자신이 지칠 것을 잘 알기에 정면 돌파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렇게 달리던 그는 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슁!
그러자 간발의 차이로 그의 앞에 커다란 삭월도가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의 몸은 반쪽으로 잘렸을 것 이었다.
‘이건 단지 시험이 아닌데…….’
철무정은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공격은 점점 더 심해졌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창의 공격,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독 등, 조금만 방심하면 죽을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 연이어 가해졌다.
‘큰일이군. 이제 방향 감각마저 잃었으니, 계속 이런 식이면 제풀에 지쳐서 죽겠군.’
철무정은 대단히 당황한 듯했다.
계속되는 공격을 잘 받아 낸다 해도,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어두운 통로에서 방향 감각까지 상실한다면 결국 굶주림과 지침에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십 번이 넘는 공격이 더 이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포기하려는 순간, 앞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철무정은 급히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나라 복식에 채두변발까지 한 아홉 명의 노인들이 원형 탁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태양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구대전왕이었다.
탁자를 지나 안쪽 높은 단상위 상석에 앉아 있는 또 한 명의 노인을 보자, 그는 급히 부복을 했다.
“철무정,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시험이 어렵지는 않았느냐?”
말하는 대공의 머리 위에는 태양천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빛나고 있었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큰소리치는 철무정이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은 대공은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여기에 왜 왔는지는 아느냐?”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태양천에서는 다음 대 천주를 뽑기 위해 많은 후기지수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조건에 맞는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해 보겠느냐?”
보통은 대공이 점지하는 순간 상대의 의견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철무정은 신분이 달랐다. 특히 칭기즈 칸의 후예라는 것은 대단한 뒷배가 아닐 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
“초원의 영웅이신 칭기즈 칸의 피를 이어받은 저입니다. 죽은 따위는 저를 막지 못합니다.”
“시간이 없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고통도 견뎌 낼 것입니다.”
철무정은 자신이 그렇게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어나라.”
철무정이 일어나자 대공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으로 들어가라. 단, 들어가는 순간 대성을 하든 죽든 두 가지 외에는 나오지 못한다.”
“예!”
대답을 한 철무정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 전왕이었다.
“천주님, 저 아이의 무공이 대단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습니다. 태양천의 천주가 되기에는 좀 부족한 듯싶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기는 어렵다. 태양천을 지켜 주신 조사님들이 어떤 힘을 저 아이에게 줄지 기다려 보자.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모두가 봉합이 되었다. 이제 태양천의 위엄을 만천하에 보일 시기이다. 시작하라.”
“예!”
대답한 전왕들이 모두 몸을 일으키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수십 년 전 무림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태양천이 또 한 번 무림에 혈풍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