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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48화 (148/472)

<천검지애 148화>

148화. 급변하는 정세(2)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말 한 마리에 둘이 타다 보니 담수련은 악불군의 품에 폭 안기다시피 한 상태였다.

악불군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담수련은 눈을 살며시 뜨며 반문했다.

“왜, 불편해?”

“좁은데 둘이 같이 타고 가니까 말입니다.”

“소군은 불편해?”

“전 하나도 안 불편합니다.”

“그럼 됐네. 난 지금 아주 편해.”

말을 마친 담수련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얼마간 달렸을까…….

담수련이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소군.”

“예.”

“백설이는 힘이 좋고 크잖아?”

“다른 말들에 비해서는 그렇지요.”

“그럼 굳이 두 마리를 힘들게 할 필요 없이, 우리 둘이 백설이 등에 같이 타고 다니면 어떨까?”

그녀는 악불군의 품에 안겨 타 보니까 상당히 좋았던 것 같았다.

“남녀가 같이 한 말을 타면 사람들이 좋지 않은 눈길로 볼 것입니다.”

“아무도 안 보잖아?”

그들이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은 홍항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관도로, 사람의 통행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슬쩍 슬쩍 다 보고 있습니다. 지금 아가씨께서 남장을 했으니 그 정도이지만, 만약 본래의 모습을 보였다면 모두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남녀가 같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사람들은 안 좋아하니까요.”

“그럼 계속 내가 남장을 하고 있으면 되겠네?”

“아가씨께서 남장을 하신다 해도 제가 알지 않습니까?”

“뭔 소리야? 소군이 아는 것은 난 상관없거든!”

“아가씨의 명예에 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이 타고 가잖아?”

“특별한 상황이지요. 그러나 계속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소군은 나를 여자로 생각은 해?”

“…….”

악불군은 뜻밖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물어보는 말에도 대답 안 할 거야?”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가씨께 여자라는 말을 하는 자체가 큰 무례입니다.”

“그럼 고개만 끄덕여. 나를 여자로 보긴 봐?”

“아가씨,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말 돌리지 마.”

“지금 아가씨께서는 정말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답은 제가 생각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여자한테 여자라고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라는 거야? 다른 거는 정말 시원시원한데, 왜 이런 얘기만 하면 답답해지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담수련은 현명한 여인이었다. 어렵다는데 자꾸 강요를 한다면 자신의 생각과 달리 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어렵다니까 우선 지나가지만, 이 문제는 내가 꼭 짚고 넘어갈 거니까 답을 생각해 놔.”

‘큰일났군…….’

악불군의 얼굴에 수심이 살짝 드리웠다. 어느새 담수련이 그에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문제가 한두 개가 쌓인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쫓아오는 자들은 누구야?”

“제게 죽은 자들과 같은 편입니다.”

“그자들, 내가 보기에 어찰단은 아니었어.”

“구천마성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굴까? 그 정도 고수들을 수십 명씩 몰고 다닐 정도면 상당히 큰 세력인데? 나 때문에 자꾸 적을 만들어서 미안해.”

“어차피 양민을 벌레 죽이듯 하는 자들을 살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가씨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저희와는 적이 될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군 말대로 모든 부조리를 우리가 고칠 수 없잖아? 나쁜 자들이라고 다 죽인다면 세상은 시산혈해가 될 거야.”

“그럼 이제 그런 시비는 피하실 겁니까?”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솔직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나쁜 자들은 모른 체 넘어갈 수 있는데,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발걸음이 안 떨어져.”

악불군은 살짝 미소를 지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전 아가씨께서 원하시면 다 따를 것입니다.”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굵직한 악불군의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을 아까부터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악불군의 말은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행복감마저 주고 있었다.

‘소군이 있어서 난 정말 좋아…….’

담수련은 이미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악불군의 팔을, 자신의 몸을 더 꼬옥 감싸라는 듯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악불군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자 담수련이 들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 * *

“놓쳐?”

“예, 혈랑사자까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행방불명? 그 정도로 정보망이 완전히 망가졌느냐?”

“장강 이남은 어찰단은 물론 원나라 관원들조차 모두 철수했습니다. 장사성이 칭왕하면서부터 저희를 돕던 협력 세력들조차 등을 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군.”

금잔화가 기막히다는 듯 말하자 금령사자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군주님, 그쪽보다 지금 절강이 더 문제가 많습니다.”

그 말에 금잔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머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모든 계획은 언제나 그녀가 예측한 대로 흘러갔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도자와 책사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근래 깨닫고 있는 그녀였다.

잠룡세가를 장악하는 데까지는, 여러 불상사는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영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담무룡은 겉으로 봤을 때 공포 정치를 한 것 같지만 자신의 심복에게만은 확고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명령은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실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명령은 언제나 반발을 불렀다. 그녀의 명을 따르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데려온 금령무뿐이었다. 담무룡을 배신한 자들조차 대공의 명은 따를지언정 그녀의 명을 듣지 않았다.

금령사자의 말에 금잔화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의자에 등을 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평소 상황을 분석할 때 취하는 자세였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금령사자.”

“예, 군주님.”

“잠룡세가의 문을 연다.”

“그리하시면 담무룡의 죽음이 천하에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세력들이 절강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 텐데, 괜찮겠습니까?”

“담무룡은 죽지 않았다.”

“그게, 무슨?”

“그는 대공 전하의 장을 맞고 천장 절벽으로 떨어졌지만, 끝내 시체는 찾지 못했어. 비록 넓은 지역이긴 했지만 핏방울 하나 안 남기고 시신이 사라질 수는 없다. 난 그가 살아 있다고 확신한다.”

“대공 전하의 태양파열장을 맞고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림 십대고수 중 일인이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라. 심한 부상을 입었을 수는 있지만, 꼭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 전하의 추측이기도 하다.”

“지금 잠룡세가의 상황상, 담무룡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둘로 쪼개질 확률이 큽니다.”

“그래서 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절강에 들어온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물론 그 전에 색출하는 것이 먼저겠지.”

“생각보다 강한 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금잔화의 입가에 냉소가 살짝 그려졌다.

“영웅회에서 절강성에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챘겠지. 하지만 태양천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전세가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겠군요!”

“그게 그렇지가 않다.”

“태양천은 무적입니다. 그들이 반란군의 수괴들을 척살하기 시작하면, 구심점을 잃은 반란군들은 그대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양천이 두 달만 빨리 움직였다면 그럴 수도 있었지. 하지만 원나라가 너무 밀리자 반란군에 무림 세력들이 붙었다.”

“영웅회가 그들을 돕고는 있지만, 그 세가 아직은 약합니다.”

“영웅회만이 아니다. 내가 심어 놓은 정보원들의 말에 따르면, 심산유곡에 은거했던 자들까지 속속 합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자들이 합류한다고 해서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중원의 인구는 우리 인구의 열 배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저력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그동안 원나라가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분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강 이남의 중원인들을 계속해서 남인 취급하며 천시하다 보니, 그들의 반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들이 합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되고 있는데 어사대는 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입니까?”

근령사자는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어사대는 원나라 황실의 친위 군단으로, 무림인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어찰단조차 어사대의 하부 조직에 불과할 정도로 전력이 엄청난 곳이었다.

“황제가 바보 같으니 어찌하겠느냐? 그들은 지금 황제를 보호하느라 움직이지 못한다.”

말하는 금잔화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태양천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지만,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 * *

“호호호~ 백설아!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온 거야?”

담수련은 백설을 보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에서 내려 꼭 껴안았다. 백설도 좋은지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부벼 댔다. 마치 헤어진 지 몇 년은 된 것 같이 반가워하는 둘을 보며 악불군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놈이 점점 영물이 되어 가나?’

악불군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괜히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게, 둘이 탄 말이 산기슭으로 다가오자 백설이 먼저 달려온 것이다.

중얼거리던 악불군은 뭔가를 발견한 듯 한쪽을 주시하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나오시지요.”

악불군의 말에 시선을 돌린 담수련은 누구를 발견했는지 아미를 좁히며 약간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말 안 들으시네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무공을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나무 뒤에서 빼꼼 하고 고개를 내민 사람은 뜻밖에도 귀도신영이었다.

“아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두 분을 보내서, 이렇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불군의 무공에 넋이 빠진 귀도신영은 담수련이 간다고 할 때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부리나케 그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경신술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아픈 몸을 이끌고도 말을 달리는 그들보다 앞서 와 있었던 것이다.

“그 몸으로 어떻게 저희보다 먼저 오셨어요?”

“제가 지름길을 좀 압니다.”

“그럼 인사를 했으니 이제 돌아가세요.”

담수련의 말이 떨어지자 귀도신영은 갑자기 그 앞에 넙죽 엎드리며 크게 외쳤다.

“악 대협, 저를 수하로 받아 주십시오.”

“노선배님, 갑자기 이런 황망한 행동을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악불군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살짝 뒤집었다. 그러자 귀도신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엎드린 자신의 몸이 강력한 힘에 의해 저절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악 대협, 이러신다 해도 노부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노선배님의 상처를 치료해 주신 분은 의원님이신데, 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노부가 평생 무림인 취급도 받지 못하고 도망만 다니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두려우면 얼굴이 백 개나 되겠습니까?”

“이미 도문의 장로라면서 어찌 제 수하가 되신다는 겁니까?”

“도문은 이름 그대로 도둑들의 모임이라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뭉쳐진 곳입니다. 서로 도움은 주지만, 다른 문파에 적(籍)을 두는 것에 대해서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노선배님께서도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는 지금 집도 절도 없이 강호를 떠도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무슨 수하를 거느리겠습니까? 애초에 전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악 대협께서는 이미 위치에 올라 계십니다. 무림에서의 위치는 명성과 무공입니다. 그리고 수하란 원래 한 명 한 명 늘어 가는 것입니다. 광동에서 제일 크다는 구천마성도 구천마황이 젊을 적 홀로 강호를 횡행하면서 한두 명씩 쫓아온 추종자들을 모아 만든 것입니다.”

“전 문파를 만들 마음을 먹어 본 적도 없습니다.”

“노부가 너무 부족해서 이러십니까?”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노선배님, 악 대협께서 노선배님을 수하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때 둘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 생각하던 담수련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녀의 눈엔 총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악불군을 도울 기회라도 잡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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