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49화>
149화. 세력(1)
이미 실세가 담수련인 것을 직감하고 있던 귀도신영은 급히 입을 열었다.
“악 대협께 없는 것을 제가 보충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요? 노선배님의 말씀이 맞다면 도문은 무림 조직이 아니라 도둑들이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뭉친 모임 같은 정도인데, 어떻게 보충할 수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저희들은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는 따위의 결속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도움은 무한정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정보와 연락입니다.”
“정보와 연락이요?”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정보가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끝에선 결국 정보가 뛰어난 조직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정보를 얻는다 해도 연락 체계가 없으면 어떻게 전달을 하겠습니까?”
“지금 저희는 개방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설마 도문이 개방보다 더 나은 정보와 연락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예전의 개방이라면 대단했지요. 하지만 지금 개방은 둘로 나뉘어 싸우느라 정보와 연락 체계가 많이 무너졌습니다. 무엇보다 협조라는 것은 말 그대로 협조일 뿐입니다. 개방의 이익에 반한다 싶으면 그 관계는 그냥 무너질 것입니다.”
“노선배님은 안 그런다는 말인가요?”
“전 협조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악 대협을 주군으로 모시면서 제 이익이나 손해에 연연하지 않고 충성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금입니다. 제가 가진 재화는 중원 제일의 부자와 맞먹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현금화시키려면 악 대협께서 저를 좀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장물이라서 위험한가 보지요?”
“도문은 양민들의 물건은 훔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족이나 귀족 같은 권문세가나 무림 세력 같이 무력을 가진 자들의 추격을 받는 일이 다반사지요. 그들에게 훔친 물건을 현금화시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노선배님께서 지금 말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저희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환영받고 크게 쓰이실 것 같은데, 굳이 악 대협을 선택하신 이유가 뭔가요?”
“노부를 이용하려고 한 자들은 많았지만 환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릴 자들뿐이었지요. 노부가 악 대협의 수하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사람을 못 만나셨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평생 도망만 다니던 인생, 한번 큰 소리도 치고 사람대접도 받으면서 죽기 전까지 살아 보자는 생각은 언제나 있었지만, 저를 진정 수하로 받아들이실 분은 찾지 못했습니다.”
“노선배님, 제 수하가 된다고 해도 사람대접은 몰라도 큰소리치거나 하는 생활은 어렵습니다.”
듣고 있던 악불군이 안 되겠다 싶은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담수련이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차단을 하기 위해서였다.
“악 대협께는 지금 수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노부가 첫 수하가 되는 것이니 이후 높은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큰소리는 제가 알아서 칠 겁니다. 악 대협께서 사람대접만 해 주시면 됩니다.”
담수련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노선배님께서는 정말 사람을 잘 보시네요. 다른 것은 몰라도 악 대협께서는 인간적이신 분이고, 한번 맺은 의리는 절대 저버리지 않으시지요. 아마 노선배님께 최대한의 공경과 배려를 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실 것이 있어요. 배신을 하면 엄청 무서워지십니다.”
“노부가 이 나이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누구도 배신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모시는 것이 어렵지, 모시면 죽음으로 충성할 것입니다.”
“좋아요. 악 대협께는 노선배님 같은 조력자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악 대협의 첫 번째 수하로서 그 몫을 잘해 주세요.”
“아가씨!”
역시 예상에 벗어나지 않은 담수련의 결정에 악불군이 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담수련은 태연하게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어머! 설마 제 부탁까지 거절하실 거예요?”
담수련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악불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담수련의 말이라면 부탁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말도 기억하고 따르는 그가, 부탁이라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아가씨? 역시 저 소저가 실세야.’
“노복 고철황, 주군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고노라고 불러주십시오.”
“노선배님의 배분이나 명성을 생각하신다면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아시지요?”
“다른 것은 모르겠고, 이제 제가 안전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압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땐 후회하셔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상황은 제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관계를 맺은 이상 거기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불군까지 정식으로 허락하자 귀도신영이 넙죽 다시 부복을 했다.
“그러…….”
악불군이 다시 내공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담수련이 그의 소매를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놔두라는 의미였다.
[소군, 저분이 저 나이에 그런 결심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니까 그냥 받아 줘. 대신 소군도 저분께 잘해 주면 돼.]
정보와 연락망 그리고 자금까지, 거기다 귀도신영의 경험과 강호의 지식은 덤으로 따라오는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담수련은 악불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자신의 계획에서 귀도신영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우리가 한 발 늦었다.]
어느새 쫓아온 마진우와 구여풍은 귀도신영이 악불군의 수하가 되는 장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저 노인은 한 명이고 우린 조직이야. 무게가 다르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또 다른 놈이 먼저 들어가면 안 되니까 빨리 결정해야 해.]
[우선 연락을 했으니까 기다려 보자고. 대신 이제부터 우리도 좀 적극적으로 싸우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좀 보여 줘야지, 안 되겠다.]
[우리가 싸울 틈을 안 주시잖냐?]
[지금 쫓아오는 놈들을 우리가 처리하자.]
마진우와 구여풍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의기투합을 한 듯 스르르 사라졌다.
신흥 방파가 커질 때의 첫 현상은 자발적으로 수하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의 걱정은 담수련에게 특별한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 * *
악불군 일행이 북상을 하는 동안 중원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원나라가 하남 지역에 전선을 구축하고 숨고르기에 들어가자 반란군들끼리 세력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가장 강성한 군세를 자랑하던 진우량이 군세가 약한 주원장을 흡수하기 위해 계속 압박하면서, 장강 이남의 치안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관의 통치가 사라지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무림 세력이었다. 정파와 마도 그리고 사파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시신이 사방에 뒹굴며 악취와 함께 역병까지 유발되고 있었다.
거대 상단들은 사병을 자체적으로 조직하거나 무림 세력과 연계를 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했고, 작은 상단들이 표국에 기대면서 표사를 수백씩 거느린 무림 세력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거대 표국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니!”
서류와 지도를 비교하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종리화는 천화궁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식이라도 들어왔어?”
지금 그녀가 애타게 기다라는 것은 담수련과 악불군에 대한 소식이었다.
“악불군이 소군이 분명한 것 같아요.”
무공 수위가 자신이 아는 것과 너무 달라 미심쩍어 하기는 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의 여러 정황상 이미 악불군이 소군이라고 인정하고 있던 종리화에게 그 말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소군과 아가씨는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행적이 여전히 이상해요. 지금 해남도로 들어갔다는 말이 있어요.”
“해남도를 왜 들어가?”
“저야 모르죠. 해남도 안에는 천화궁 소속의 기녀들이 없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소군아, 도대체 뭘 하는 거냐?’
종리화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행적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니, 소군이 딴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요?”
“소군은 아가씨를 배신할 아이가 절대 아니다.”
“배신은 하지 않더라도, 아가씨의 미모가 그렇게 뛰어나니 흑심은 품을 수 있잖아요? 내가 남자들의 심리는 잘 아는데, 남자들끼리는 목숨까지 내 놓을 정도로 의리를 지키던 자들도 미인에게는 자제력을 잃더라고요.”
“다른 남자들이 전부 그래도 소군은 아니다. 그 아이는 내가 본 아이들 중 가장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어. 무엇보다 그 아이의 아가씨에 대한 충성심은 나보다 더하다.”
“도대체 어떤 아이길래 혈의나찰이라 불리던 언니를 이렇게까지 믿게 할까? 정말 보고 싶네.”
그때 밖에서 당주인 신송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님, 급보가 들어와서 달려왔습니다.”
“아가씨 소식인가 봐요. 들어와.”
종리화가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 보고하는 경우는 모두 담수련에 대한 것들이었다.
신송화는 들어서자마자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가봐.”
“예.”
신송화가 나가자 천화궁주는 쪽지를 펼쳤다.
“뭐야? 이게 말이 되나?”
“뭐라고 쓰여 있는데 그래?”
종리화가 다급히 물었다.
“악불군이 홍항에 나타났다는 보고예요. 해남도에 들어간 아이가 왜 갑자기 홍항?”
잠시 생각하던 종리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하다.”
“가능해요?”
“응, 해남도에서 홍항까지 상당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시간상 가능해.”
“하긴, 언니는 그곳 뱃길에 대해서는 빠삭하지요?”
“옛날일이다. 그래 홍항에 나타난 것은 어떻게 안 것이냐?”
“도문하고 엮였나 봐요.”
“도문?”
“도문하고 우리 천화궁은 모두 다 하오문 소속이잖아요. 그래서 알음알음 소식이 전부 들어와요. 자세한 말은 없는데 소군이 도문의 인물을 구해 준 모양이에요.”
“소군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다고 하더냐?”
“직접 자신이 천호무적검이라고 말한 모양인데요?”
“그럼 아가씨에 대한 말은 없느냐?”
“천호무적검에게 동행이 있었는데, 젊은 남자 의원이었다고 하네요.”
“아가씨께서 변장하신 것일 게다. 의술이 아주 뛰어나시거든. 어디로 갔는지는 적혀 있느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방향은 북쪽으로 향했다고 하네요. 물론 가다가 방향을 바꿀 확률은 존재하겠지요?”
“북상하는 것이 분명하다. 천화궁의 정보망을 총 가동해서 움직이는 행적을 알아보거라. 만약 악양으로 오는 거라면 중간에서 만나야겠다.”
“남쪽이라면 제약이 많이 없어서 가능할 거예요.”
“그래, 부탁한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언니거든요! 또 부탁하니 하는 말하면 정말 섭섭해져요.”
눈을 살짝 흘기며 나가는 천화궁주를 보며 미소를 짓던 종리화는 의자에 등을 대며 오랜만에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다시 북상을 하는 것 같자 마음이 좀 편해진 것이다.
‘소군의 무공이 정말 소문대로 강하다면 가주님의 계획을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담수운이 잠룡밀을 상단으로 변신시킨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담무룡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크게 나빠질 것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천하 정세로 미루어 탁월한 선택으로 보였다.
“아가씨만 오시면 잘될 거야.”
종리화는 다시 몸을 펴더니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 *
“솔직히 전 아가씨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노를 수하로 들이는 바람에 지금 편하지 않아?”
귀도신영은 담수련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말을 듣자 가장 먼저 구해 온 것이 마차였다.
그리고 악불군을 굳이 마차 안에 타게 만들었다.
악불군의 성격상 마차 안에 담수련과 단둘이 타고 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악불군이 모습을 드러내고 움직이면 담수련만 숨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귀도신영의 말에 결국 마차를 타고 말았다.
“편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무슨 수하를 들입니까?”
“소군이 뭐가 어때서?”
“전 잠룡세가의 소속이고 아가씨의 호위 무사입니다. 세상에 어떤 호위 무사가 자신만의 수하를 데리고 다닙니까?”
“소군이 그렇게 말하니까 잘됐네. 그럼 왜 내가 허락했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봐.”
순간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야기를 해서 그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