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50화>
150화. 세력(2)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약간 싱거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건덕지나 있겠습니까? 그저 저희 상황에 맞춰 상식적인 판단을 하자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상식? 소군, 정말 말 잘했다. 그동안 이렇게 단둘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동안 뒤로 미루어 놓았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대화를 좀 해야겠어.”
“……아가씨, 지금 당면한 주제하고 좀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심도 있게 대화할 문제가 아가씨와 저 사이에 있긴 있었나요?”
“왜 없어? 이유 없이 내 눈을 피했던 문제, 다 알면서 몰랐던 척하며 나를 칭찬하던 문제, 내게 숨기고 있는 문제, 그리고 나를 여자로 보냐고 물으니까 다음에 답하겠다고 한 것도 있잖아?”
말이 이어질수록 악불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담수련이 다음에 얘기하자고 하긴 했어도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대화 중에 지나가는 식으로 말한 것들이기에, 그냥 잊고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니…….
“가만 생각해 보니, 수하를 들이면 여러모로 유용할 것 같긴 하네요. 그럼 마 대협과 구 대협도 수하로 삼을까요?”
악불군은 화제를 바꾸려면 좀 강한 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마진우와 구여풍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마 대협과 구 대협만이 아니라 백인막 자체를 소군의 친위 호위로 만들어.”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호위 무사가 자신의 친위 호위를 거느리고 다닌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건 좀 이상하지. 하지만 소군은 호위 무사가 아니니까 괜찮아.”
“아가씨,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로 길러졌습니다. 그리고 전 그것을 제 인생의 최대 임무로 여기고 있고요.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아닌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소군은 계속 나를 호위하는 물건으로 볼 생각이야?”
“황망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감히 아가씨를 어떻게 물건으로 보겠습니까?”
“아냐, 소군은 나를 보호해야 할 물건으로 보고 있어.”
담수련은 팔짱을 끼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가장 불만이 클 때 하는 행동이었다.
“절대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아가씨께서 믿으시겠습니까?”
“내가 여자야, 남자야?”
“당연히 여자시지요.”
“소군에게 여자야, 아니야?”
“아가씨 그건 제가 대답하기가…….”
“봐! 나를 호위하는 표물 정도로 보니까 대답을 못 하잖아?”
“아가씨는 여자 맞습니다. 제 눈에 너무 아름다우신 보석 같은 여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십시오. 제 마음이 아파집니다.”
순간 담수련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정말 내가 소군 눈에 보석같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여?”
너무 빨리 표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본 악불군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아는 담수련은 이런 식으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음절맥이 문제야. 왜 차도가 없는 거지?’
악불군의 얼굴에는 걱정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담수련의 모습이 사랑에 빠진 여인의 전형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수시로 표현하고 있지만 악불군이 언제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니, 그녀 입장에선 악불군의 마음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문제는 그녀조차도 가장 좋아하고 누구보다도 잘해 주고 싶은 악불군에게만 자신이 자꾸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악불군이 담수련에게 사랑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녀의 불안감이 사라질 일이었다.
“왜 대답 안 해?”
‘제 눈에는 아가씨께서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가씨를 여자로 본다면 제가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자신의 눈을 빤히 보고 있는 담수련의 재촉에 살짝 미소를 그렸다. 상황이 어떻든 그녀를 보는 그 자체로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답이 만족스러운지 배시시 웃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만족은 하면서도 괜히 자신이 남사스럽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껴서였다.
분명 귀도신영을 수하로 들이는 문제에서 시작된 대화였는데, 이상한 데로 화제가 빠지더니 결국 대화의 요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기분이 좋으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대화가 아니겠는가…….
“뭐해?”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도 모든 촉각은 악불군에게 향해 있던 그녀는, 악불군이 마차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하늘을 보자 옆으로 붙더니 자신도 창밖을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고 노선배님의 행적을 감시하는 것이 혈응 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홍항에서 꽤 멀리 왔는데, 상점 앞 하늘에 떠 있던 혈응이 지금은 우리 마차 위를 날고 있습니다.”
“어디 혈응이 있어?”
담수련은 고개를 빼고 하늘을 열심히 보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자 의아한 듯 물었다.
“저쪽 끝에 보시면 점 같은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게 혈응입니다.”
악불군이 가리킨 곳을 보던 담수련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물었다.
“저게 뭔지 보여?”
“예.”
“소군, 눈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좋아도 너무 좋은 것 같네?”
“언제 어디서든 아가씨를 찾아내려면 눈이 좋아야지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악불군의 말은 또다시 담수련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악불군에게 담수련은 정말 모든 것이었다.
“나도 눈이 좋아져야겠다. 나도 소군을 어디서든 볼 수 있게.”
좁은 창으로 같이 밖을 보기 위해서는 몸이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동시에 얼굴을 보자 둘의 얼굴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순간 둘은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가 미묘해지는 순간.
[공자님, 추적하는 놈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마진우의 전음이 악불군의 귀에 들려왔다.
“아가씨, 마 대협이 전음을 보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든 담수련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바, 방금 그게 뭐지……. 몽롱하고 몸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찌릿찌릿하고, 그리고…… 내가 그런 망측한 생각까지 하다니?’
담수련은 방금 있었던 잠깐의 상황에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뭔지 모르지만 이유 모를 욕망이 그녀를 잠시 휘감았는데, 그게 신기하게 행복했다.
악불군을 지금까지 마음으로만 좋아했는데 처음으로 육체까지 반응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악불군이 더했다.
그는 잠시 동안이지만 몸까지 경직이 되었다. 만약 적이 그때를 노렸다면, 그는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거기다 그 짧은 순간 자신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
‘악불군, 너 왜 이러냐? 아가씨의 보호가 사명이라는 놈이, 감히 아가씨의 명예에 큰 오점을 찍을 수도 있는 생각을 하다니…….’
둘은 마진우의 전음이 정말 고마웠다. 물론 진짜 고마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쫓아온 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냈습니까?]
마음을 추스린 악불군이 마진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나같이 마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마도인들 같은데, 정체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 막에서 수집한 정보에는 없는 세력 같습니다.]
[무림에 그런 세력들이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암약하는 비밀 조직은 꽤 많습니다. 저희 백인막도 따지고 보면 그런 조직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이들처럼 한 명을 추적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수하들을 보낼 정도로 큰 조직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우리 둘이 협공을 한다 해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두 분 덕분에 조용한 여행을 하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공자님을 위해 뭐든 할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 두 분을 귀찮게 하는 자들이 있다면 저희들이 다 청소하겠습니다.]
[……?]
악불군은 마진우의 말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잠시 입을 닫았다.
‘나를 위해 뭐든 할 마음이 되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지? 설마……?’
악불군은 뭔가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또 생길 것 같다는 느낌에 검미를 찌푸렸다.
* * *
“어떻게 되어 가느냐?”
“도검이 불침하는 강력한 피부를 갖추었습니다.”
“철포삼이나 금종조와 비교하면 어떠냐?”
“그런 것은 혈독불사마공이 만든 불침의 피부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천독마의가 말을 끌자 사도중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머뭇대지 마라. 보고는 간결하고 빠르게 하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의 모습이 너무 흉측하게 변해서 그게 좀…….”
“남자 놈이 좀 흉측하면 뭐가 어떠냐? 강하면 모든 것을 상회할 수 있다. 천하의 영웅이 미인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잘생겨서가 아니라 강해서다. 그딴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언제쯤 시술이 끝날지나 말해 봐라.”
“지금 혈독에 몸을 담갔습니다. 백 일 후면 내장까지 불괴가 되어 새롭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백 일이라……?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사방이 천지인데 아직도 백 일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짜증 나는군.”
중얼거리는 사도중명의 얼굴에는 시술이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는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비류에 대한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하하하! 천하의 백색마혼이 도움을 청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군!”
병적으로 하얀 피부를 가진 백색마혼의 앞에 그와는 반대로 유난히 검은 피부를 가진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나타나더니 반갑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악귀도마, 그따위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지금 나는 전주님의 특명을 받고 나왔다.”
“그놈의 지위 타령이냐? 네가 비록 나보다 지위가 높다 해도 내게 명령 따위 내릴 생각은 마라. 나도 명령을 받고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악귀도마는 불쾌하다는 듯이 받아쳤다.
“명령이 아니라,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구천마성 놈들하고 시비라도 벌어졌냐?”
“아니, 아직 정체는 모르지만 짐작 가는 놈은 있다.”
“누군데?”
“천호무적검.”
“어쭙잖은 헛소문만 무성한 그놈 말이냐?”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놈의 무공이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너를 부른 거다.”
그제야 악귀도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가 아는 백색마혼은 자존심 덩어리라,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하더냐?”
백색마혼은 자신이 직접 본 싸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교통을 포한 삼십 명의 전사를 일각도 안 돼서 전멸을 시켜?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는데 그런 무공을 어디서 익힌 거지?”
“교에는 이미 보고를 했다. 우리의 정보망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초절정 고수의 존재는 변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천상신녀도 봤냐?”
악귀도마는 음탕하기로 혈교 내에서도 소문난 자였다.
“지금 계집이 생각이 나냐?”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천호무적검이 천상신녀라는 절색의 미녀를 호위한다는 것은 이미 퍼진 소문이다.”
“보진 못했다. 하지만 소문이 맞다면 근처에 있겠지.”
“좋다. 도와주지 대신 그놈을 제거하면 그 계집은 내 거다.”
“마음대로 해라.”
악귀도마는 백색마혼의 말에 혀를 빼 입술을 한 번 훔쳤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본 짐승과 같은 모습이었다.
* * *
홍항을 떠난 지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혈응은 여전히 그들의 마차 위에 떠 있었지만, 따라오던 자들이 모두 죽은 후 더 이상 추적은 없었다.
“너무 조용하다. 세상이 이 자연처럼 평화로웠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할 텐데.”
“조용한 것 같지만 저 안에서도 치열한 약육강식의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이 답했다. 그는 같은 지역에 사는 개들끼리도 서로 대장이 되겠다고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어렸을 때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하긴 싸움은 어쩌면 모든 생물의 기본 특성일지도 몰라. 한낱 미물인 벌레들도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니까. 하지만 사람은 살기 위한 살상이 아니니까 문제지.”
“욕심 때문이지요. 남들 위에 서고 싶은 권력욕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들 마음에 존재하는 한, 싸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지금 나타난 자들처럼 말입니다.”
악불군의 얼굴이 굳어지자 담수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군가 그들을 막았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었다.
담수련이 만끽하고 있던 평화는, 결국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