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52화>
152화. 따르는 사람들(2)
“아가씨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귀도신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직후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둘이 분명 특별한 관계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명을 내리고 받는 사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말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저흰 주종 관계는 절대 아니에요.”
귀도신영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자, 담수련은 이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 부언(附言)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귀도신영은 우선 인정하는 대답을 했다.
“노선배님께서는 저희가 무슨 사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전…….”
“걱정 마시고 그냥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느낀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사실은 두 분이 혼인한 사이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노!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다시는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아가씨의 명예에 흠이 가는 말입니다.”
귀도신영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던 담수련의 눈이, 악불군의 다급한 반박에 금방 샐쭉해졌다.
“저, 전 아가씨께서 허심탄회하게 느낀 대로 말하라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소군은 왜 노선배님 놀라게 소리를 치고 그래? 내가 느낀 대로 말하라고 해서 말씀하신 것뿐이잖아?”
“그래도 너무 터무니없는 짐작을 해서…….”
‘에이! 진짜 답답해. 뭐가 터무니없는 짐작이라는 거야? 남들 눈에 그렇게 보였으면 이유가 있겠지.’
담수련은 불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노선배님 잘못은 아니라는 말이야.”
귀도신영은 담수련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기분이 좋은 듯 급히 말했다.
“아가씨께서 노복에게 노선배라고 하시니 많이 불편합니다. 그냥 고노라고 불러 주십시오.”
“노선배님께서 악 대협의 수하지 제 수하는 아닌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제가 느끼기에 아가씨와 공자님은 이미 일심동체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고노, 일심동체라니! 말을 조심…….”
악불군이 깜짝 놀라 다시 질책하듯 말하자 담수련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소군, 우리 생각이 같고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니까 일심동체 맞잖아? 왜 자꾸 예민하게 그래?”
“예민한 것이 아니라, 아가씨께서 기분 나빠 하실 얘기를 자꾸 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쁠지 좋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담수련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휙 돌리고는 귀도신영에게 말했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럼 고노의 보물 창고로 먼저 가야겠네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그쪽으로 방향을 잡겠습니다.”
분위기가 좀 미묘하다는 것을 직감한 귀도신영은 답을 하고는 급히 마차 쪽으로 갔다.
그러자 약간 싸늘한 공기가 악불군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고노 때문에 아가씨 심기가 많이 상하셨지요?”
악불군은 담수련의 얼굴에 냉기가 흐르자 위로한답시고 한마디 건넸다.
“흥!”
담수련이 코웃음까지 치자 악불군은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고노가 다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못하게 하겠습니다.”
“흥! 흥!”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코웃음을 두 배로 터뜨리고는 더욱 냉기를 풍기며 아예 몸까지 돌려버렸다.
‘괜한 소리를 하셔 가지고 아가씨 심기를 이렇게 안 좋게 만들다니……. 수하라고 해서 단순히 좋은 것도 아니군.’
안타깝게도 순진한 악불군은 아직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쯧! 쯧!
* * *
“태상호법님. 궁가방에서 방주님께 만남을 갖자고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남개방의 장로인 헌원신개의 보고에, 사해신개는 자신의 턱수염을 한 번 쓰다듬으며 반문했다.
“우리를 반역도라고 하면서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하더니, 갑자기 먼저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냐?”
“원나라가 하남까지 밀리니 불안해진 것이겠지요.”
“개방 초대조사님의 유훈을 잊고 원나라에 부역한 자들이다. 그자들과는 타협은 없다.”
“하지만 방주님 생각은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르시더냐?”
“아직 궁가방의 세력이 만만치 않고, 조사님들의 위패가 모두 하남 총단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개방의 신물인 용두취옥장을 궁가방주가 가지고 있는데, 계속 몰아붙이다가 그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을까 걱정하셨습니다.”
헌원신개의 말에 사해신개도 시름이 깊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나라는 개방 총단을 함락시킨 후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어용 지휘부를 새로이 꾸렸다.
어용 방주라고는 하나 그 역시 팔결제자 출신의 개방제자였고 특히 개방의 신물인 용두취옥장이 그의 손에 있기에, 많은 개방 제자들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쪽과 다르게 상당히 자유분방했던 남쪽의 개방의 제자들은 원나라에 협조하라는 총단의 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남개방을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초기의 남개방은 북개방에 여지없이 밀렸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반역도로 낙인찍힌 남개방에서 최악의 혈사가 일어났다.
북개방의 개방도들이 남개방을 기습하여 무려 천 명 가까운 제자들이 죽은 것이다.
그 혈사로 개방의 모든 주도권은 북개방에게 넘어가는 듯했으나, 곧 반전이 일어났다. 용두취옥장 때문에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북개방을 따르던 많은 고수들이, 자신의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총단에 실망하여 속속 금분세수를 해 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세력이 삼분지 일로 줄어들어 버린 북개방은 쇄신을 한다면서 궁가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한 번의 악수가 되고 말았다.
용두취옥장에 반기를 드느니 은거를 택했던 개방의 고수들이,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에 완전히 궁가방에 등을 돌리고 속속 남개방으로 붙은 것이다.
이후 궁가방은 어찰단등의 도움을 받으며 남개방을 소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이제 원나라가 떠난다면 궁가방은 남개방에 의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내몰렸고, 그러자 뜬금없이 방주의 영수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다.
“방주님께서 너를 보낸 것은 통보를 하기 위함이냐, 내 의견을 듣기 위함이냐?”
“당연히 의견을 청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만나자고 했느냐?”
“방주끼리 만나되 수행원은 각 백 명씩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교활한 놈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을 당할 수는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금 그놈들의 제안은 예전 혈사 때 했던 그 방식이다. 우리에게 회담을 하자고 제안하고는 수행원을 백 명으로 제한하자고 했지. 그리고 그곳에 나간 남개방인들은 그들의 함정에 빠져 모두 몰살하고, 지휘부를 잃은 남개방은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천 명이 넘는 제자가 학살당했다.”
“이번에도 함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방주님께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난 반대다.”
“그럼 반대하신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방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궁가방에 다시 역제안을 하라고 말씀드려라.”
“어떻게 역제안을 하면 될까요?”
“태상호법들끼리 만나는 것으로 한다. 그냥 만남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지를 확실히 가지고 오는 회담이 되기를 원한다고 제안해라.”
헌원신개는 사해신개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려는 것을 직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개방의 대 변화가 시작될지 아니면 또 다시 혈사가 벌어질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원 무림에 영향력이 큰 개방의 움직임은 무림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 * *
“정말 혈응 때문일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계속 마차 위에 떠 있으니까요.”
광동을 벗어나 복건으로 들어선 담수련은 창을 통해 하늘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악불군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약 일주일 동안 그들은 두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무공으로 보아 홍항에서 만난 자들과 같은 편이었다.
다행히 백색마혼이나 악귀도마 같은 고수의 등장은 없었지만, 그들의 연이은 공격은 상당히 귀찮았다.
“저번에 소군에게 죽은 괴인들 있잖아? 이자들이 아직 그들의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하지만 아는 순간 더 무공이 높은 자들을 보낼 텐데,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담수련의 번뜩이는 두뇌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측은 분명 맞을 것이었다.
악불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혈응이 떠 있는 곳은 너무 높아, 악불군이라 해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혈응을 내려오게 할 방법만 있으면 어떻게 손을 써보겠는데, 언제나 같은 높이에만 떠 있으니…….”
“내가 알기로 소군은 혈응을 내려오게 할 방법이 있어.”
“제가요? 전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어려서부터 내가 의아하게 느낀 것이 있는데, 소군은 다람쥐나 새들을 마음대로 다루었잖아? 백설과도 대화를 나눈다며?”
“진짜 대화는 아닙니다. 단지 그들과 교감할 수 있는 정도지요.”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혈응도 결국은 새야. 그렇다면 작은 새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어?”
“하지만 교감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이 서로 눈을 보는 것이고, 만약 눈을 못 보면 목소리라도 전해져야 하는데, 혈응이 떠 있는 높이는 전음을 보내기도 어렵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도 고심이 되는지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혈응이 아무리 영물급에 든다고 하지만 먹기는 해야하지 않을까?”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수록에 기록된 혈응의 특징은 벌건 깃털과 거대한 몸집이지. 게다가 식욕도 대단해서, 하루에 곰 한 마리 정도는 먹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어. 하늘의 새들만 잡아먹으면서 견디기는 어려울 거야.”
“하지만 언제 먹이를 구하러 내려오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만약 밤에 먹이를 구한다면 제 눈으로도 확인이 안 되고요.”
“소군,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아가씨 말씀은 어떤 말을 해도 오해하지 않습니다.”
“내 추측이 맞다면, 혈응은 우리가 쉬는 밤에 먹이를 구하러 내려올 거야.”
“낮에는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니 그럴 것입니다.”
“이제부터 소군은 낮에 자.”
“낮에요?”
“마차 안이니까 내 옆에서 자면 되잖아.”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대신 밤에 자지 말고 혈응을 감시해. 그러다가 혈응이 내려오는 낌새를 느끼면 추적해서 잡아. 사로잡으면 더 좋겠지만 어려우면 죽여. 불쌍하기는 하지만, 악당들의 눈이 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혈응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을 차치하고라도 당장 그들의 행보까지 계속 방해가 되고 있었다.
“낮에 잘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원래 제가 잠이 별로 없으니까요.”
“안 돼. 그래도 자.”
“걱정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난 걱정 돼. 소군이 나 때문에 잠도 못 잔다면, 난 미안해서 혈응 잡으라는 말도 못해.”
“알겠습니다. 잠은 자지 않는 대신, 낮에는 운기조식을 하겠습니다.”
운기조식이 아무리 피곤을 풀어준다 해도, 사람은 잠을 안 자고는 버티기 어려웠다. 하지만 담수련은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좋아. 거기까지는 내가 양보할게. 그럼 지금부터 운기조식을 시작해.”
“그런데, 이제 화는 좀 풀리셨습니까?”
“무슨 화?”
“고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잖습니까?”
“그런 적 없는데?”
“분명 전에…….”
“고노 때문에 화난 적이 없다는 말이야.”
“그럼 그땐 왜 그러셨습니까?”
‘소군 때문에 화난 거거든! 우리가 혼인한 사이 같다는데 왜 어불성설이 되냐고!’
담수련은 자신의 불만을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입밖으로 내놓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소군이 다친 줄 알고 너무 놀라서 기분이 좀 가라앉았던 것뿐이야.”
“그랬군요? 전 너무 안 좋은 얘기를 듣고 기분이 많이 상하셔서 계속 언짢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자꾸 안 좋은 얘기라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안 좋은 얘기야?”
“아가씨같이 귀하신 분을 저와…… 아닙니다.”
말하던 악불군은 그 말을 꺼내는 자체가 불경하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분명 말하지만 난 마음이 탁 트인 사람이야. 그래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못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마음이 탁 트였다는 것과 조금의 가능성이 있으면 포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 사이에서,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악불군은 담수련을 그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하지만 그에게 담수련은 너무 소중한 보물 같은 존재라는 것이, 그의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막고 있었다.
그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까지는 담수련은 답답함을 참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