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53화 (153/472)

<천검지애 153화>

153화. 혈응(1)

악불군이 가진 문제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그녀에게 예전과 다른 모습이 보이면 모두 오음절맥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가씨,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무래도 좀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것이 담수련에게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 생각하고 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왜 매번 답은 저러는 거야……. 정말 나를 여자로는 전혀 안 보나 봐.’

담수련이 대답 없이 창밖을 보자 악불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가씨께서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어떻게 풀어 드리지?’

악불군이 고심을 하고 있을 때.

‘주군께서 저 나이가 되도록 여인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얼핏 보기에도 어떤 상황인지 척 알겠던데……. 내가 한 수 가르쳐 줘야 하나?’

마부석에 앉아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귀도신영은 너무 안타까워 입이 들썩거리는 것을 참느라 힘들어 하고 있었다.

* * *

“전주님, 백색마혼과 악귀도마 사자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수라 조각상이 사방 벽에 서 있는 정청.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점잖아 보이는 노인이, 아수라의 탈을 쓰고 태사의에 앉아 있는 자에게 공손히 보고를 했다.

아수라탈을 쓴 자는 혈교의 사대마전 중 하나인 아수라마전의 전주인 아수마종이였다.

얼굴에 쓰인 탈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그가 대노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충분했다.

“야명독효.”

입을 연 아수마종의 목소리는 어찌나 기괴한지 사람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예, 전주님.”

“도둑놈 하나를 못 잡아서 사자들까지 보냈는데 오히려 죽어? 도둑놈에게 죽지는 않았을 터, 범인이 누구냐?”

“죄송합니다. 아직 범인을 특정짓지 못했습니다.”

“백색마혼하고 같이 갔던 놈들은 누구 짓인지 봤을 것 아니냐!”

“같이 갔던 영존과 교통 그리고 삼십 명이 넘는 전사들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순간 정청 안이 엄청난 마기로 덮였다. 아수마종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그의 몸에 뿜어져 나온 마기였다.

“죽은 곳이 어디냐?”

“교통과 전사들은 홍항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분 사자의 시신은 홍항에 약 사백 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제 추측으로는 범인을 쫓다가 당한 것 같습니다.”

“구천마성이냐?”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곳은 구천마성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정황을 분석한 결과, 구천마성은 아니라고 판명이 되었습니다.”

“혈응이 쫓는 놈의 짓이란 말이냐?”

“그놈에게 조력자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선풍마강 사자와 염라마부 사자 두 분의 출동을 허락해 주십시오.”

“백색마혼과 악귀도마가 당했다면 둘로 어렵다. 다섯 명의 사자의 출동을 허락할 테니, 네가 선정해서 보내라.”

“다섯 분이 한꺼번에 움직이시면 본 교의 존재를 들킬 위험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교주님께서 아끼시는 혈응을 우리에게 보낸 것은 장보주(將寶珠)를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계속 혈응을 이곳에만 묶어 둘 수 없는 상황이다. 당장 보내서 본 교의 제자들을 죽인 놈을 처리하고, 장보주를 회수해서 돌아오라고 해라.”

“존명!”

야명독효는 허리를 숙이며 크게 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 갑자 전 갑작스런 원나라와 태양천의 등장 때문에 대계를 포기하고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또다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런데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광동을 갑자기 어떤 놈들이 눈독을 들이는 거지?’

야명독효가 사라지자 아수마종은 태사의 탁자를 주먹으로 톡톡 치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혈교의 사대마전은 그 몸집을 사등분하여 은밀하게 세력을 키워 왔다. 특히 아수마종은 교주에게 직접 칭찬을 들을 정도로 아수라마전의 세력을 탄탄하게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장보주를 도둑맞은 일로 그동안 교주에게 받은 신임을 다 잃게 생겼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 * *

“소군, 저기 좀 꽃들이 너무 예쁘지?”

“예, 정말 예쁘네요.”

악불군이 동조하자 담수련은 신나서 말했다.

둘은 이미 화해를 한 듯 아주 즐거워했다.

“난 저런 곳에 집을 짓고 꽃을 많이 키우면서 살고 싶어.”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소군도 나랑 같이 꽃 가꾸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

“전 아가씨 옆에만 있으면 무조건 좋고 재미있습니다.”

“나도! 나도 소군만 옆에 있으면 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미소를 지었다.

부부싸움은 물로 칼베기라고 했던가?

담수련은 삐친다 해도 반 시진 이상 간 적이 없었고,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 악불군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곤 했다.

악불군 역시 그런 것을 아니 그녀가 삐쳤다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이지만, 그는 그녀가 찰나라도 삐치거나 표정이 안 좋으면 안절부절못했다. 그만큼 그녀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아가씨 곁을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답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은 담수련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혈응에 관해 얘기한 지 삼 일이나 지났는데 아직 따로 발견한 건 없어?”

“아직 밑으로 내려오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른 방면으로 진전이 좀 있습니다.”

“어떤 진전인데?”

“백설이가 신기하게 혈응에 반응을 하더군요.”

“나도 봤어. 뭔가 위협을 느끼는지 수시로 하늘을 보는데, 혈응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백설이를 통해서 혈응과 교감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해?”

“모르지요. 그냥 시도나 해 보려고요.”

“소군이 생각했다면 무조건 되는 거지! 역시 소군은 정말 대단해. 내가 자랑스럽다니까. 빨리 해서 혈응을 제거해야 해. 이제 슬슬 적들이 우리에 대해 눈치채기 시작할 거야. 그런데 혈응을 부리는 자들까지 합세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고. 내 예상대로라면 저번에 죽은 자들과 비슷한 무공을 지닌 자들이 최소한 다섯 명은 이번에 올 거야.”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곤혹스럽게 변했다. 사실 말 그대로 시도나 한번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담수련이 자랑스럽다고까지 하니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부담이 생긴 것이다.

“아가씨 그게…….”

“알아, 알아. 쉽지 않은 거. 그러니까 내 말에 부담 느끼지 말고 확실히 성공시켜. 내가 아는 소군에게는 불가능은 없잖아. 그렇지?”

부담 느끼지 말라면서 부담을 팍팍 주는 담수련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악불군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 멈춰서 시도해 보겠습니다.”

대답한 악불군은 마차의 앞문을 열더니 귀도신영을 불렀다.

“고노.”

“예, 말씀하십시오.”

“지리를 잘 안다고 했지?”

“천하 대부분의 지리를 다 알고 있습니다. 특히 광동과 복건은 제 손금 보듯 잘 압니다.”

귀도신영의 큰 소리에 악불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허풍을 쳐도 너무 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나서 말하는 사람의 김을 뺄 필요는 없었다.

“이 근처에서 인적이 드문 계곡 같은 곳이 있으면 거기로 가자고.”

“계곡이라? 아! 한 군데 있습니다. 그쪽으로 몰겠습니다.”

‘허풍이 아니고 진짜인가?’

한 성의 면적은 정말 대단히 컸다. 매번 다니는 길이라면 몰라도, 전 지역을 손금 보듯 한다는 그의 말은 악불군조차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계곡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억해 내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해남도를 찾아가면서 길을 찾는 데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던 악불군으로서는 정말 필요한 수하가 아닐 수 없었다.

* * *

“이미 복건성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더 북진하면 다른 전의 구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 전에 놈들을 잡아야 한다.”

아수라마전의 사자인 선풍마강은 다른 사자들에게 독려하며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선풍마강의 옆에 붙은 염라마부는 무조건 달리는 것이 못마땅한지 물었다.

“혈응이 따라가고 있다고 했다.”

“우린 혈응의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잖아?”

“혈응접사들이 주위를 따르고 있다고 했다. 우선 이 방향으로 달려가면 어디로 가라고 연락이 올 거다.”

“혈응은 교주님께서도 아끼시는 영물인데, 왜 이 일에 투입이 된 거지?”

“굉장히 중요한 물건을 어떤 도둑놈이 훔쳐 갔다고 하더라.”

“혈응이 투입될 정도면 정말 대단히 중요한 물건인 모양이네?”

“우리 사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처리하려고 한 것을 봐서 대단히 중요한 물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주님께서는 잘못하면 화가 될 수도 있으니 일부러 알려고 하지는 말라고 하셨다. 분명한 것은, 다른 놈들이 알게 되면 일이 아주 복잡해지니 최대한 빨리 회수해야 한다는 거다.”

“어찌 됐건 그 도둑놈 덕분에 이렇게 밖에도 나와 보고, 좋긴 하네.”

“백색마혼과 악귀도마가 당했다고 했다. 보통 놈들이 아니니 절대 개인행동은 금한다.”

이렇게 빨리 달리면서도 마치 담소하듯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내공이 대단히 심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담수련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백색마혼과 비슷한 무공의 고수들이 다섯 명은 올 거라는 그녀의 짐작이 이번에도 너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누군가 그녀와 적이 된다면 정말 두려운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 * *

계곡에 도착한 악불군은 담수련과 백설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까지 들어가기에는 좁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좁지 않아?”

“일부러 좁은 계곡을 찾은 것입니다.”

“왜~?”

“혈응과 눈을 마주 보려면 혈응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리게 해야 하는데, 넓은 곳은 그게 안 됩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눈을 어떻게 맞춰?”

“저는 못 맞춥니다. 하지만 혈응은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럼 고노를 데리고 왔어야 하지 않나?”

혈응이 귀도신영을 따라다니니, 그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혈응이 사물을 한 번 보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문헌만 생각하고, 고노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며칠간 관찰을 해 보니 혈응이 저를 따라다니고 있더군요.”

“혈응이 소군을 따라다닌다고?”

“예.”

담수련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당장 그 이유를 짐작해 냈다.

“고노가 깜빡했다는 그 구슬. 지금 소군이 가지고 있지?”

“제가 간수하고 있습니다.”

“혈응이 따라다니는 것은 바로 그 구슬이네.”

“저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품 안에 있는 구슬을 어떻게 알고 따라다닐까?”

“사냥개들이 냄새로 목표물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 구슬에 저희는 느끼지 못하지만 혈응은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건데?”

“이제 백설이 도움을 받아야지요.”

머리가 좋은 담수련도 이번만은 뭘 하려고 하는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악불군은 구슬을 주머니에서 꺼내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는 하늘을 보며 계곡을 왔다 갔다 했다. 좁은 계곡 때문에 하늘은 아주 좁게 보였다.

그렇게 이각 가까이 계곡을 왔다 갔다 하던 악불군의 걸음이 한곳에 멈추었다.

“백설아, 이리와.”

악불군이 부르면 어디서든 반갑게 달려오던 백설은 이번에는 왠지 쭈뼛거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악불군이 한 자리에 세우자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소군, 백설이 겁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괜찮을까?”

“제가 옆에 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대답한 악불군은 언제 준비했는지 풀로 만든 그릇을 백설의 머리에 붙이더니 그 위에 구슬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백설의 머리에 손바닥을 붙인 그는 눈을 감았다.

일각쯤 지났을까…….

악불군을 보던 담수련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호에 나와 수많은 싸움을 했지만, 악불군이 얼굴에 이렇게 힘든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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