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54화 (154/472)

<천검지애 154화>

154화. 혈응(2)

담수련은 괜찮냐고 말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이런 경우 옆에서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알기에 가슴만 졸일 뿐이었다.

백설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극심한 공포심에 당장 뛰쳐나갈 태세였다.

하지만 악불군의 또 다른 손이 그의 목을 토닥이자 흔들림이 줄어들었다.

호랑이를 만난 말이 주인의 토닥임에 도망을 가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호랑이까지 단숨에 찢어 죽일 수 있다는 혈응이었다.

백설을 달래던 악불군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담수련의 고개도 악불군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순간 담수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눈에 벌건 깃털을 지닌 매의 모습이 드디어 보인 것이다.

사람을 태우고 다닐 정도로 거대한 남해성모궁의 선학보다는 작은 크기였지만, 그 위맹한 모습은 선학이 따를 바가 아니었다.

천천히 하강하던 혈응은 어느 정도 거리가 되자 백설의 머리에 놓인 구슬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와 같아서 찰나간에 계곡의 위까지 도착했다.

‘됐다!’

혈응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주시하던 악불군은, 혈응의 눈과 마주치자 입으로 미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간 단숨에 백설을 덮칠 것 같던 혈응이 속도를 늦추더니 골짜기 꼭대기에 내려섰다. 날개를 접은 혈응의 모습은 대단했다.

‘저게 혈응이야? 와아! 정말 아름답다.’

사납기로 유명한 혈응을 본 그녀의 반응은 사실 의외였다.

두려워해도 모자랄 판에 아름답다니…….

혈응의 눈은 악불군의 눈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담수련이 읽은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혈응은 훈련이 안 되는 새였다. 영물로 불릴 정도로 여러 가지 능력을 지녔고, 거기다 지능까지 대단히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린 새끼일 때 잡힌 혈응을, 혈교의 교주는 반항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공포를 심어 주기 위해 처음부터 고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한 훈련을 시켰다.

혈응이 영물로 불린 이유 중에는 특이할 정도로 강한 가족애도 있었다. 어미는 새끼를 인간을 능가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어미가 늙으면 죽을 때까지 먹이를 구해 갖다 줄 정도였다.

그러나 혈교의 교주에게 자란 혈응은 조금의 사랑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명령과 복종 그리고 공포와 살육만이 모든 것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악불군을 보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은 것이었다.

악불군은 교감이 통했다는 것을 직감하자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혈응은 악불군의 부드러운 손짓이 굉장히 어색한 듯 고개를 계속 갸웃갸웃했다. 그리고 뭔가 혼란에 빠진 듯 백설의 머리에 놓인 구슬을 한 번 보고 악불군을 한 번 보고 하다가,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오르더니 다시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군, 가 버렸네? 아까 그 정도 거리면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혈응이 떠나버리자 담수련은 아쉬운 듯 말했다.

“혈응은 빠르기도 하지만, 도검이 불침하는 깃털에 쇠방패조차 발톱에 걸리면 그대로 찢어지는 강인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손에 잡힐 놈이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계속 감시를 받으면서 가야 해?”

“며칠간 두고 보면 오늘 일이 효과가 있었는지 실패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백설아~ 오늘 너무 고생했다. 미안해.”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고는, 아직도 경직되어 있는 백설에게 다가가더니 목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마 다른 무림인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백설이를 무지 부러워했을 장면이었다.

천하제일의 미녀가 스스로 가서 안아 주고 있으니 얼마나 부럽겠는가…….

* * *

영운산장.

무림 세력이 거의 없는 복건성의 중부에서는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무림 세가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부역을 하지 않고도 태양천의 무림 탄압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정파도 사파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립을 지키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장주님, 이놈들이 우리를 이 안에서 고사시킬 작정인 모양입니다.”

영운산장의 장주인 유성빈은 내당 당주의 보고에 주먹을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에게 서찰 하나가 전해진 것은 보름 전이었다.

거기에는 영운산장의 모든 재산을 헌납하면 영운산장만은 존립하게 해 주겠다는 통보가 적혀 있었다.

유성빈은 백대고수에는 들지 못했지만 천하가 인정하는 초절정 고수였고, 그 밑에 수하도 백 명 넘게 있었다. 그런 그가 서찰 하나에 겁을 먹을 리 없었다.

그는 서찰을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서찰을 보낸 놈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명에 따라 열 명의 수하가 정문 경계 무사에게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는 청년을 찾아 영운산장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문을 연 경계 무사는 혼절을 할 듯 깜작 놀라 소리쳤다. 서찰을 전한 자를 찾으러 떠난 열 명의 무인들의 시신이 정문 앞에 밧줄로 목이 걸린 채 대롱대롱 달려 있었던 것이다.

유성빈은 대노하여 영운산장의 정예 무인들을 외당 당주에게 직접 인솔하도록 하여 다시 내보냈다.

그리고 외곽의 경계도 강화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번에는 아침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외곽을 지키던 무인들과 교대를 하러 나갔던 수하들이 또다시 정문에 달린 시신들을 보고 급히 비상종을 타종했기 때문이었다.

외곽을 경비하던 무인들은 물론 추적을 나갔던 수하들과 외당 당주까지 밧줄에 달려 있는 것을 본 유성빈은 그제야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과 다른 점은 외당 당주의 옷섶에서 또 다른 서찰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역시 서찰에는 영운산장의 모든 재산을 헌납하라는 통보였다. 더욱이 한 푼을 속일 때마다 영운산장의 식솔들을 한 명씩 죽이겠다는 협박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후, 누구든 나가면 시신이 되어 돌아오니 영운산장은 완전히 공포에 휩싸여 버렸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상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말이냐?”

얼굴이라도 본다면 죽기 살기로 싸워 보기라도 하련만, 적의 실체를 전혀 모르니 한자리에 모인 간부들조차 공포에 사색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장주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당 당주의 말에 유성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너는 지금 이놈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지금 이놈들은 본 장의 숨은 재산까지 다 달라고 이러는 거다. 만약 준다면 그로써 우리는 이미 다 죽은 게야. 안 주고 있기에 우리를 살려두고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해!”

유성빈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인정한 내당 당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문파는 눈에 보이는 재산 말고도 숨은 재산이 많았다. 그것은 문파를 몰살시킨다면 절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돈이 필요한 것을 보면 구천마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총관이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이 더욱 사색으로 변했다.

“만약 구천마성이라면 여기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간부가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느냐?”

“구천마성이 근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십 년 간을 숨어 있다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유성빈의 말에 다른 간부들의 표정은 절망감으로 덮여 버렸다. 진짜 구천마성이라면 그들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복건성에는 구천마성과 견줄 만한 무림 세력이 전혀 없었다.

“구천마성을 상대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장 가까운 곳은 화룡세가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보름의 시간을 주었으니 빨리 달려간다면 그 전에 화룡세가의 원군이 올 수도 있습니다.”

총관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나가기만 해도 죽는 판에 도움을 청하러 갈 방법도 없었거니와, 화룡세가와 영운산장 간에는 특별히 도움을 줄 친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성빈의 눈에는 시산혈해로 변한 영운산장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휴우~ 할아버님께서 세운 후 백 년을 버텨 온 영운산장이 내 대에서 결국 망하고 마는 것인가? 정녕 우리를 구원할 귀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유성빈은 무기력하게 운이 따르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상황에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 * *

“소군! 저기 봐!”

이틀 간 순조롭게 북진하던 중, 여느 때처럼 창문을 통해 밖의 경치를 구경하던 담수련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 중인 악불군을 불렀다.

운기조식하는 사람을 부르거나 건드리는 것은 금지 사항이지만, 악불군과 담수련은 거기에 구애 받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악불군은 어떤 방식의 운기조식은 하더라도 담수련이 부르면 즉시 깼다.

악불군은 담수련이 왜 불렀는지를 알면서도 모른 척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저, 저거 혈응 아니야?”

언제나 까마득한 공중에만 떠 있던 혈응이, 상당히 먼 거리이기는 하지만 분명 바닥에 착륙해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악불군은 혈응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혈응과 헤어진 후 이틀간 악불군은 거의 하루 종일 운기조식을 하며 혈응을 부르고 있었다. 한 번 교감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는 거리의 구애를 처음처럼 많이 받지는 않았다.

악불군의 미소를 본 혈응은 또다시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하더니 다시 날갯짓을 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또 사라진다?”

“동물들과 마음이 통하려면 급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하늘에서 우리를 감시하던 혈응이 스스로 우리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것만도 굉장한 발전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이 기대감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소군.”

“예.”

“혹시…… 진짜 혹시인데…….”

“말씀하십시오.”

“내가 혈응과 친해지고 싶다면 해 줄 수 있겠어? 안 되도 상관없으니까 부담은 갖지 말고.”

아무리 악불군이라도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담수련은 나름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까지 따다 줄 태세인 악불군에게, 그녀가 꺼내는 말은 모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그에게 바란다는 것은, 악불군에게는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안 되어도 되게 해야지요.”

악불군의 답에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원한대로 되건 안 되건,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안 되도 되게 한다는 악불군의 대답이 무조건 그녀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정말이지~?”

애교가 넘치는 그녀의 반문에, 악불군은 목에 힘까지 주며 말했다.

“제가 느끼기에 가능성이 분명 있습니다. 만약 이 방법이 실패하면 제가 하늘을 날아올라가 혈응을 잡아 오겠습니다.”

담수련이 너무 좋아하자 자신도 모르게 너무 나아가 버린 악불군이었지만, 놀랍게도 담수련은 그의 말을 진짜 믿는 듯 다시 물었다.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어?”

그녀의 놀라운 머리로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말을 믿는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의 악불군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가능성이 있건 말건 무조건 행복하게 이어지던 둘의 대화를 귀도신영이 깨버렸다.

“공자님, 지금 상황으로 계속 가면 산속에서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작은 고을이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쉬지요.”

“삼 일 전에 지난 고을이, 객잔이 있는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저 산을 넘기 전까지는 쉴 곳이 없습니다.”

귀도신영의 말에 악불군은 검미를 좁혔다.

이미 노숙을 한 지 삼 일이 됐기 때문이었다.

적의 추적이 있을 것이라며 강행군을 지시한 담수련의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노숙을 하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담수련의 건강 때문이었다.

“난 괜찮아. 노숙해도 돼.”

악불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직감한 담수련이 먼저 괜찮다고 나섰지만, 악불군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때 다시 귀도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이 산에 제가 아는 산장이 하나 있습니다.”

“산장이요?”

“예, 유성빈이라고 무림에서는 대력신권이라 불리는 권의 고수인데, 산장의 장주입니다.”

“그럼 거기서 하루 신세 좀 지도록 하지요.”

구원자를 바라던 유성빈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을까. 진짜 구원자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