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56화>
156화. 영운산장(2)
“형님,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영운산장 안에 계시네.”
“그렇다면 빨리 모셔야지요!”
“보면 못 믿을걸세. 너무 젊으셔. 그래도 절대 무례하게 굴면 안 되네.”
“형님의 주군인데 어찌 무례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기에 형님께서 주군으로 삼으셨습니까?”
“내 생명을 구해 줬지. 그리고 나를 인간 대접해 줬고, 무엇보다 강해. 내 경험상 무림의 절대자가 되실 분이야. 이런 분이시라면 내가 좀 약하더라도 대우를 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지. 한 십 년 후면 아마 난 상당한 권력자가 되어 있을 걸세.”
“무림에 이미 알려진 분이십니까?”
“유 제도 들은 적이 있을 걸세. 천호무적검이라고.”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천마성의 호법과 장로 세 명을 혼자 제거했다는 전설적인 무용담이 이미 중원 전역으로 소문이 퍼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지금 포위한 자들이 그들의 예측대로 구천마성이라면 그들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빨리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모두가 귀도신영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의 문이 열리며 악불군과 담수련이 밖으로 나왔다.
악불군은 안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악불군입니다. 장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전 그냥 담 공자라고 불러 주십시오.”
“전 영운산장의 장주인 유성빈이라고 합니다. 천호무적검 악 대협께서 이렇게 본 장을 방문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신세를 지려고 온 객들인데 영광이라고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자님, 지금 영운산장에 일이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노와 이렇게 가까우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악불군이 너무 선선히 승낙하자 유성빈의 얼굴이 활짝 폈다. 천호무적검이 소문대로의 강자라면, 그에게는 천군만마보다도 더 든든한 원군이었다.
“안으로 드십시오. 총관.”
“예!”
“빨리 식사 준비부터 하게.”
“진수성찬으로 곧 준비하겠습니다.”
허대공도 천호무적검이라는 말에 힘이 났는지 크게 대답을 하고는 부엌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냥 소채와 만두만 주셔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양하려던 악불군은 담수련이 소매를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했다.
유성빈과 함께 둘이 빈청으로 들어가자, 간부들은 사방으로 퍼져 수하들에게 천호무적검이 도움을 주기 위해 왔다고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포에 빠져 사기를 잃고 있던 그들은 희망을 발견한 듯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소군, 겸양도 좋지만 그것이 너무 과하면 무게감을 잃어.]
빈청의 자리에 앉자 담수련이 슬쩍 전음을 보냈다.
[제게 내세울 무게가 있겠습니까?]
[소곤은 이따금 보면 너무 자신을 모르는 것 같아? 지금 저 사람들 표정 못 봤어? 소군은 지금 이들의 구원자라고. 거만은 상대에게 반감과 불쾌감을 주지만, 지나친 겸양은 상대를 무시한 것이 돼.]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된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우선 차부터 드십시오.”
둘의 대화는 유성빈이 차를 가져오면서 멈췄다.
“장주님께서 직접 차를 가져오시다니, 너무 송구합니다.”
담수련이 급히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담 공자님이라고 하셨는데, 명호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유성빈은 아까부터 담수련이 궁금했다. 천하의 천호무적검이 그녀에게만은 무척 공경하게 대하는 것을 그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 제, 담 공자님은 진짜 중요하신 분이니까 예의를 잃으면 안 되네.”
담수련이 곤란해할 만한 질문을 던지자 귀도신영이 급히 끼어들었다.
“제가 무례한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성빈이 급히 사과하자 담수련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고노와 호형호제하시는 분인데 못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제가 누군지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 명호는 천상신녀예요. 이름은 말씀드릴 기회가 생기면 그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유성빈도 천호무적검이 천상신녀를 보호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은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천상신녀 여협이셨군요. 변장을 너무 잘하셔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치채지 말라고 남장을 했는데 당연히 눈치를 못 채셔야지요.”
“하하하! 그렇군요.”
유성빈의 얼굴에 보름 만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나타났다.
악불군 일행과 만난 지 채 일각이 지나기 전에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 * *
“불쌍한 놈! 그깟 돈에 목숨을 걸다니…….”
왕흉은 영원산장의 전경이 보이는 곳에 서더니, 안 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영원산장이 순순히 중원상단의 지분을 넘기더라도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받고 온 터였다.
그 의미는, 늑대가 토끼에게 입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지 않아서 아프게 잡아먹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오성규!”
“예!”
“묘시면 우리가 통보한 마지막 시각이다. 그때 총 공격을 한다. 유성빈과 그 가족은 되도록 사로잡는다.”
“알겠습니다!”
오성규는 드디어 자신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에 전율을 느낀 것이다. 그는 타고난 살인마였다.
* * *
묘시면 동이 뜨기 시작하는 새벽이었다. 하지만 산속은 아직 어둠이 남아 있어 사위가 여전히 어두웠다. 더욱이 새벽안개까지 끼어, 십 장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 대협과 구 대협은 이번에 실력 발휘 한번 해 보십시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빈청의 지붕에 은신하고 있던 마진우와 구여풍은 악불군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아가씨, 이제 저희도 나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담수련을 숨길 대나무를 챙긴 악불군이 담수련을 보며 말하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담수련과 악불군이 방에서 나오자, 유성빈과 간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하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들이 오고 있습니까?”
보름의 시한이 오늘이지만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밤새도록 경계를 서던 그들로서는, 악불군이 계속 방에만 있자 초조해하던 중이었다.
물론 귀도신영이 적들이 오면 알아서 나오실 거니 걱정 말라고 계속 말했지만, 그들로서는 마냥 편하게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대략 오륙십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담 공자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포진은 하고 있지요?”
“예, 말씀하신 그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담수련은 적들의 무공이 영운산장의 제자들보다 많이 강하다는 전제하에, 그들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방어진을 알려 주었다.
“그럼 적들은 제가 처리할 것이니 제자들은 방어에만 치중하라고 하십시오, 절대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도 저희들도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성빈이 비록 정파는 아니지만, 도움을 주는 악불군만 싸우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꼭 도움을 주시고 싶으시면 싸움이 끝난 후 도와주세요.”
담수련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싸움이 끝나면 악 대협께서 어떤 요구를 하시더라도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유성빈으로서는 영운산장을 존속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가씨께서 또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군.’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뭔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 말 없이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악불군의 뒤를 따르는 유성빈을 포함한 간부들은 악불군이 들고 있는 여러 크기의 대나무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상대는 대단한 고수들일 텐데 대나무로 싸운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지금 상황에서 감히 악불군에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오자 두 명의 영운산장의 제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악불군과 담수련이 정문 앞에 서자 다시 문이 닫혔다.
“오고 있어?”
“예, 움직임을 보니 마 대협과 구 대협의 움직임과 비슷합니다.”
“살수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는 말이네?”
“그런 것 같습니다.”
“영운산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가 있었네. 무공도 높은데 살수행까지 했으니, 막을 방법이 있었겠어?”
“아가씨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문과 담이 마주치는 구석에 담수련이 서자 대나무를 꽂기 시작했다.
* * *
삼십 명의 수하를 은밀하게 장원 쪽으로 접근을 시킨 오성규는 이십 명의 수하를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신경을 집중시킨 후에 은밀하게 다가간 수하들은 담을 넘어 안을 교란시킬 예정이었다.
“영주님, 정문에 웬 놈이 혼자 서 있습니다.”
수하의 말대로 영운산장의 정문에는 한 인영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지금 혼자서 우리와 싸워 보겠다는 거야 뭐야?”
그냥 경계를 서는 놈이라면 검만 빼 들고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혼자 그런다는 것은 미친놈이나 할 법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죽여!”
“예!”
오성규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악불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보름이나 매복을 한 그들로서는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악불군은 안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명줄을 재촉하고 만다.
휭!
달려가던 그들은 강력한 파공음에 잠시 멈칫했다. 소리만으로도 대단히 위협적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너무 늦었다.
“헉!”
맨 앞에 있던 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악불군이 던진 검이 가슴에 박힌 것이다.
“으억……!”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어느새 달려온 악불군은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빼 들더니 가차 없이 적들을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면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왕 죽일 바에는 최대한 고통을 덜어 주자는 악불군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죽은 자들이 그 배려를 알 리 없겠지만……
순식간에 십여 명이 죽어 나가는 동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그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악!”
그때 뒤로 물러서던 자들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에 서 있던 오성규가 물러나는 수하의 등에 도를 내려친 것이다.
“구천마혈에게 도망은 없다! 당장 놈을 죽여라! 놈을 못 죽이면 너희들이 내 손에 죽는다!”
오성규의 잔혹한 외침에 물러나던 수하들은 다시 악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영운산장의 담 쪽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다가간 자들이 담을 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들이 넘어가려는 담에는 이미 영운산장의 제자들이 담수련의 명을 받아 방어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담까지 간 자들도 열다섯 정도에 불과했다. 담까지 가는 동안 이미 거의 반이 마진우와 구여풍에 의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네놈은 절대 살려 둘 수가 없겠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들은 모두 제거한 악불군은 오성규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수하들에게는 도망은 없다며 가차 없이 죽인 그가, 막상 모두 죽고 혼자 남자 뒤로 살살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은 용서하지 않는 자들의 특징은 바로 악랄하면서도 비겁하다는 것이었다.
오성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악불군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뒤로 이십 명의 괴인들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대, 대주님!”
“바보 같은 놈!”
“……보, 보통 놈이 아닙니다.”
“포위해라!”
오성규의 말에 답 없이 왕흉은 수하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악불군의 주위로 퍼지며 그를 포위했다.
‘이게 육관에서 배웠던 구천마성의 탈혼검진이라는 것인가?’
악불군은 자신을 포위한 자들을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모두의 팔목에는 촘촘하게 작은 단도가 끼어 있는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육관시절 조심해야 할 협공 중 하나로 배웠던 탈혼검진을 구성하는 자들의 모습이 분명했다.
‘미련한 놈, 진이 구축될 때까지 기다리다니……. 강하긴 하지만 강호 경험은 전혀 없는 놈이군.’
왕흉은 악불군이 탈혼검진의 위력을 직접 보기 위해 일부러 기다렸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포위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자 왕흉은 회심의 미소를 지며 소리쳤다.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