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57화>
157화. 국면 전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구천마혈의 반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공중으로 뜬 상태에서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장주님, 저거 구천마성의 탈혼검진 아닙니까?”
유성빈과 함께 담을 넘는 구천마혈과 싸우던 도치열은 눈앞에서 펼쳐진 장관에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불군을 가운데 두고 흩뿌려진 단검들은 마치 우박처럼 그를 향해 쏟아졌다.
게다가 남아 있던 자들이 괴이한 진형을 밟아 가며 검을 휘두르자, 악불군이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문에 듣기로, 탈혼검진은 구천마성에서도 최정예들만이 펼칠 수 있다고 하던데…….”
유성빈도 말로만 듣던 탈혼검진의 엄청난 위력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진 안에 있던 악불군의 주위로, 눈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검광이 번쩍였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으나, 나타난 검광의 수는 기백을 넘어서는 듯했다.
“네, 네, 네놈이 누구기에…….”
왕흉은 경악한 눈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악불군의 주위로 탈혼검진을 펼쳤던 이십 명의 수하들이 몸 곳곳이 잘린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진을 함께 구성하지 않았던 왕흉과 오성규 역시 성하지 못했다. 악불군을 향해 날아갔던 단검들이 악불군의 검막에 막혀 튕기면서 그들의 몸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고수인 왕흉은 그나마 대여섯 개의 단검만 박혀 있었지만, 오성규는 가슴에 열 개가 넘는 단검을 맞으며 이미 즉사해 있었다.
“구천마성과는 여러 가지로 악연이 겹치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네, 네놈이 천호무적검?”
악불군은 이미 구천마성의 척살 일 순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왕흉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악불군이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가 목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와아!”
마진우와 구여풍의 도움으로 산장을 직접 공격한 구천마혈까지 모두 전멸시키자, 악불군의 싸움을 보고 있던 영은산장의 모든 사람들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순간 천호무적검은 더 이상 그들에게 소문이 아니라, 전설 그 자체였다.
“대협, 대협께서는 영은산장과 백 명이 넘는 저희 가족들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성빈을 비롯한 간부들은 다급히 악불군의 주위로 몰려들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한 문파의 주인이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둘의 사이가 거의 주종 관계에 필적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직 끝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모두 산장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혹, 제가 불리하더라도 절대 도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역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귀도신영이 안색이 굳어졌다.
“유 제, 또 다른 적이 오고 있는 모양이네. 빨리 안으로 들어가세.”
“하지만…….”
“어허! 공자님께서 무조건 들어가라고 할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방해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세.”
귀도신영의 재촉에, 모두는 감사가 미흡했다는 생각에 아쉬웠지만 산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혈응을 주시했다.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그의 눈으로도 볼 수 없었지만, 보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자들의 정체가 뭐길래 이렇게 고수가 많은 거지?’
그는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조금 전 구천마혈이 아닌 귀도신영을 쫓던 자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전체 세력도 아닌 일개 전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악불군으로서도 심히 놀랐을 것이었다.
* * *
“저곳이 확실하냐?”
“혈응이 원체 높이 떠 있어서 정확한 한 지점을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산이니, 사람의 통행이 많은 현보다는 찾기가 쉬울 것입니다.”
혈응접사의 말에 선풍마강은 염라마부들에게 가자는 듯 눈짓을 하고는 몸을 날렸다.
“우리도 신법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사자님들과는 상대가 안 되네.”
하늘을 나는 혈응들을 따르다 보니 빠른 자들을 위주로 혈응접사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조차 사자들을 쫓으며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말한 접사는 망원통을 꺼내 혈응이 있는 곳을 주시했다. 혈응은 거의 하루 동안 한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 * *
“으으으…….”
담에 숨어 악불군을 보고 있던 유성빈이 창백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장주님, 왜 그러십니까?”
내당 당주는 유성빈이 온몸을 떨자 급히 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그이기에, 지금 악불군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는 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느낀 것이다.
“유 제, 왜 그러는데? 정신 좀 차려!”
귀도신영도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를 급하게 불렀다.
“형님,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들이 지금 나타났습니다. 일부러 마기를 흘리는 것 같은데, 태어나서 이렇게 지독한 마기는 처음입니다.”
유성빈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왕흉이 이끄는 구천마혈에게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아직 모습도 보이지 않은 자들이 뿜어내는 마기에 제일 고수인 유성빈이 이렇게 넋을 놓을 정도로 경직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들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마진우와 구여풍도 마기를 느끼고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번에 나타난 자들하고 맞먹지?]
[응. 우리는 한 명도 당해 낼 수 없는 자들인데, 아무래도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아. 공자님께서 이길 수 있을까?]
이미 악불군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이번만은 불안했다. 그만큼 지금 느껴지는 마기는 지독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놈! 잘도 도망을 쳤지만 드디어 잡히는구나!”
선풍마강은 장원 앞 공터에 서 있는 악불군을 보자 당장 자신들이 찾는 천호무적검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의 앞에 섰다.
‘조금 전에 뭔 일이 벌어졌나 본데…….’
그는 악불군의 주위에 토막이 나서 널브러져 있는 수십 구의 시신을 보자 검미를 찌푸렸다.
“제가 도망을 친 것이 아니라, 선배님들이 제 꽁무니를 부지런히 따라오신 것이지요. 저를 자꾸 귀찮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뭐야? 감히 본 교의 사자와 수십 명의 전사를 죽이고도 그 죄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냐?”
“본 교라는 말은 전에도 들었는데, 정확한 이름을 알려 줘야 제가 죄를 지은 것인지 상을 받을 일을 한 것인지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본 교의 이름을 듣는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게 될 게다.”
“그거야 말을 해 주셔야 증명이 될 일이지요. 아무래도 말하실 용기는 없는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어린놈이 어른의 화를 돋우는 데 재간이 좀 있구나! 하지만 노부는 너 같이 말 많은 놈을 아주 싫어하지. 그래서 너 같은 놈을 만나면 혀부터 뽑아 버린다.”
“제가 보기에는 선배님께서 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럼 전 노선배님의 혀를 뽑아야 하는 걸까요?”
악불군은 조금도 지지 않고 말을 받으며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네 명의 사자는 악불군이 선풍마강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혈응이 너를 주시하는 것을 보니, 그 도둑놈이 훔쳐 간 물건을 네가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순순히 물건을 내놓는다면 최대한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어떤 물건을 말하시는지 전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노선배님께서는 대화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안 그렇습니까? 교의 이름을 들으면 오줌을 지릴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시면서 막상 어떤 교인지 말도 못하시고.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시면서 어떤 물건을 내놓으라는 것인지 말해 주지 않으시니, 제가 심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이놈, 곧 이해하게 해 주마!”
소리를 친 선풍마강은 손에 든 섭선을 쫙 피더니 악불군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선풍이 악불군을 향해 뿜어졌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선풍이 지나가는 자리의 땅들이 마치 태풍이 지난 듯 한 자나 파였고, 그와 동시에 돌과 흙이 악불군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줄이 달린 낫을 빙빙 돌리고 있던 사신혈겸의 낫이 그의 등을 노리며 날아왔다.
“넌 오늘 살아서 못 돌아간다!”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날린 염라마부의 거대한 도끼가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남은 둘은 아직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그 위력은 누구라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단하군! 역시 천하에 기인이사들이 많다고 하더니, 갈수록 강한 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
위태롭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악불군은 강력한 공격을 받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하나의 희열이었다.
그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승부사의 기질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악불군은 즉시 천륭검보의 자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연구하고 홀로 수련했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그가 만든 초식들이 드디어 선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저 엄청난 공격을 단 한 자루의 검으로 다 막아 내고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냐?]
그의 말대로 악불군의 검은 대단히 현란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검막으로 선풍을 막은 그는 보법을 이용해 사신혈겸의 낫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리고 검막을 형성하던 검이 어느새 염라마부의 도끼를 막아 내고 있었다.
마진우의 전음에 구여풍은 답을 하지 못했다. 싸움을 집중하여 보고 있는 그의 주먹은 악불군에 대한 걱정과 긴장으로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놀라고 있기는 귀도신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색마혼과 악귀도마를 제거하는 것을 이미 본 그는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신위는 그때와는 또 달랐다.
싸움이 삼십 초를 넘어갈 즈음,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두 명의 사자가 악불군의 빈틈을 발견한 듯 빠르게 공격해 들어갔다. 한 명이 노린 것은 악불군의 겨드랑이였고, 또 한 명이 노린 것은 오른발이었다.
세 명의 공격도 간신히 받아 내며 수세를 보이던 악불군에게 또 다른 두 명까지 합세하자 전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어느덧 선풍은 마강으로 변했고, 그를 찍어 내리는 단순한 공격만 이어지던 혈겸의 낫은 갑자기 기묘한 변화를 보이며 수십 개의 낫이 공격하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 냈다.
염라마부의 도 역시 지금까지의 공격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힘을 담고 악불군을 압박했다.
거기다 다른 두 명의 사자들은 악불군의 움직임을 방해하려는 듯,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 싸움을 보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서서히 떠오를 정도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그때 모두를 경악시키는 뜻밖의 반전이 벌어졌다. 악불군의 모습이 다섯 개로 변한 것이다.
악불군이 심혈을 기울여 수련한 배교의 분신십이수였다. 하지만 원래의 분신십이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배교의 무공은 사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악불군의 분신 십이수는 천륭검법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콰쾅!
연달아 지각이 울릴 정도로 강력한 파열음이 산장을 덮었다. 구경을 하던 영은산장의 제자들 중 몇몇은 압박을 견디지 못해 담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몇몇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통스럽게 신음을 뱉기도 했다.
‘이, 이런 터무니없는……. 도대체 저놈의 사문이 어디기에, 듣도 보도 못한 절기들을 연달아 시전을 한단 말인가?’
거대한 격돌과 함께 전장은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선풍마강을 비롯한 사자들은 악불군의 분신술을 보자 네 개는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차피 시작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허상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운래 분신이라는 자체가 눈속임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십대인 악불군이 스스로 무공을 창안해 내는 천재적인 종사의 능력을 지녔을 줄은 누구도 짐작을 못했다.
지금 선을 보인 악불군의 무공들은 천륭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봤어도 긴가민가할 정도로 새롭게 해석된 것들이었다. 거기에 배교의 무공까지 접합했으니, 그들로서는 악불군의 무공의 근원을 알 방법이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악불군은, 배울 만큼 배웠다고 판단이 들자 검을 곧추 잡았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럼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군요.”
말하는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