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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60화 (160/472)

<천검지애 160화>

160화. 혈응

한적한 산길로 접어든 악불군은 마차를 멈추게 한 후 담수련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혈응이 여전히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어?”

담수련은 하늘을 보며 물었다. 물론 그녀 눈에는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혈응이 우리를 따르는 방식이 좀 달라졌습니다. 제 눈에도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따라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제나 마차 바로 위에서 떠 있던 혈응이 보이지 않은 지는 꽤 됐다. 하지만 악불군은 혈응이 그들의 마차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악불군은 자신과 교감을 한 후 혼란을 느낀 혈응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따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혈응을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 우리를 추적할 텐데, 오늘 확실하게 매듭을 짓자.”

담수련 말대로, 혈응이 따라오는 것을 그대로 두고 움직였다가는 계속적인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러려고 합니다. 저들이 다시 사람을 보내려면 며칠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안에 처리하겠습니다.”

“……음, 소군.”

담수련은 뭔가 고심하는 듯 생각하더니 악불군을 불렀다.

“예.”

“혈응을 죽이지 않고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담수련 자신을 주시하던 늠름한 모습의 혈응을 생각하자,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훈련을 시킨 자들이 문제지, 혈응은 죄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결국 혈응이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혈응하고 대화할 수 있어?”

“아가씨께서도 백설과 대화를 나누시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입니다.”

“백설이야 우리와 친구가 됐으니까 서로의 마음이 통해서 가능한 거지만, 혈응은 다르잖아?”

“혈응과 친구가 되면 같은 거지요.”

“진짜 친구 될 수 있어? 난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악불군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예전 백설을 보며 그렇게 좋아했던 담수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악불군은 너무나 기뻤다.

오음절맥으로 성격에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본성만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고노.”

“예!”

“마차를 몰고 다음 현에서 기다리십시오.”

“어디 가시게요?”

“혈응을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담수련과 함께 백설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백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듯, 숲속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저놈의 말은 진짜 대단해. 숲속이건 바위 더미건 어디든 평지처럼 달린단 말이야.”

귀도신영은 사라지는 백설을 보며 감탄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우린 이제 어떡하지? 공자님을 따라가야 하나, 마차를 따라가야 하나?”

마차가 사라지자 마진우와 구여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설이를 따라갈 수나 있어? 저놈이 맘 먹고 달리면 우리 신법으로는 절대 따라가지 못해.”

“그럼 마차를 따라가야겠군.”

결정을 내린 마진우와 구여풍은 마차가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 * *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악불군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껴안은 담수련은 궁금한 듯 물었다.

백설이 계속 험한 숲속 길을 전력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혈응을 유인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달리면 유인이 되나?”

“혈응이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해도, 나무에 가려 저희가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악불군은 혈응이 자신을 볼 수 없도록,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백설이 전력으로 달리게 했다.

아무리 눈이 좋은 혈응이라 해도, 시야가 가린 상황에서 백설을 타고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결국 가까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악불군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가씨, 혈응의 날갯짓 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아가씨 혼자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서?”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의 곁을 잠시라도 떠나면 불안해했다.

“백설의 고삐만 잡고 그냥 타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백설이 알아서 달리다가 제게 돌아올 것입니다. 길어야 일각 정도면 될 것입니다.”

“알았어.”

담수련이 대답을 하자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악불군은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악불군의 모습이 사라지자 뭔가 다급해진 혈응은 백설이 달리는 숲의 바로 위까지 내려와 빠른 속도로 백설을 쫓기 시작했다.

“카우욱!”

혈응의 감각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예민했다. 파리가 날면서 만들어 내는 공기의 파동조차 즉각 감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튀어 올라온 악불군에게 자신의 다리가 붙잡히자 당황한 듯 크게 울며 공중으로 날아올라갔다.

다리에 매달린 악불군은 혈응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정해. 난 친구야.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혈응이 악불군의 말을 이해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 담긴 따뜻함과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떨어진다면 아무리 악불군이라 해도 위험할 수준의 높이까지 순식간에 날아올라간 혈응은, 계속되는 악불군의 전음을 들으며 갈등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혈응의 포악성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다리에 붙은 악불군을 공격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특이하고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차가운 물 한 잔 마실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혈응은 지상의 숲이 단지 파랗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그런 뒤 퍼덕이던 날갯짓을 멈추고 쫘악 폈다.

그러자 혈응은 고정이라도 된 듯 공중에 딱 서고 말았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알잖아? 난 너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

악불군은 다람쥐와 새들에게 하듯이 부드럽게 다시 말했다. 그러자 악불군이 다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듯 딴청을 부리던 혈응이 드디어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악불군과 눈을 마주친 것이다.

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통하고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을 어루만지는 듯한 악불군의 다정한 눈에 혈응은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꺄우우욱!”

혈응은 마치 악불군에게 말이라도 하듯 혈응 특유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겠다. 이제부터는 나랑 행복하게 살자꾸나. 이제 내려가자.”

악불군이 달래듯 말하자 혈응의 발이 악불군의 등을 잡아 왔다. 여기서 뿌리친다면 지금까지의 교감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혈응이 악불군을 공격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악불군은 혈응을 믿기로 했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교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다는 진정성을 보이는 것도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였다.

그리고 혈응은 악불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혈응은 악불군이 떨어지지 않도록 옷을 발톱으로 잡은 것이다. 그것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까칠한 놈……. 이제야 마음을 여는군.’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혈응의 배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악불군이 혈응을 잡자마자 백설은 어떻게 알았는지 방향을 바꿔, 이번에는 혈응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백설아, 소군은 안 보이는데?”

드디어 백설이 섰다. 하지만 악불군도 혈응도 안 보이자 담수련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러자 백설은 앞발을 들어 공중에서 몇 번 허우적거렸다. 백설의 앞발을 따라 고개를 든 담수련의 눈이 커졌다.

그곳엔 거대한 혈응의 발에 악불군이 매달린 채 내려오고 있었다.

* * *

“혈응이 또 사라졌다!”

망원통으로 혈응을 살피던 혈응접사 조창명은, 혈응이 안 보이자 깜짝 놀라 또 다른 혈응접사 석구통에게 소리쳤다.

“뭐야? 아까까지 떠 있는 것을 내가 분명 봤는데?”

석구통은 망원통을 뺏다시피 잡아채더니 눈을 갖다 댔다. 하지만 그라고 없는 혈응이 보일 리 만무했다.

망원통에서 눈을 뗀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혈응이 이상 행동을 계속 보이는데, 이걸 어떡하지?”

그들은 며칠 전부터 보인 혈응의 이해 못할 행동을 보고하지 못했다. 교주가 알면 혈응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그렇게 됐다며 그들의 목을 칠 우려가 많아서였다.

“혈응을 불러들여서 왜 그러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긴 한데…….”

조창명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혈응을 부를 수도 없었다. 아수라마전에서 나온 사자 네 명이 모두 죽은 이상, 곧 또 다른 사자들이 출동할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혈응을 불렀다가 그들의 행적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그들이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혈교의 책임 추궁은 대부분 죽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고통 없이 죽느냐 아니냐뿐이었다.

수하를 공포로 다스릴 경우 나타나는 전형적인 복지부동이었다.

“이대로 혈응이 다시 나타나기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찾아보자.”

“사자님 네 분의 합공도 물리친 놈이다. 우리가 더 가까이 가면 당장 걸릴 거야. 며칠 전에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었으니까, 이번에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조창명과 석구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곤혹스런 상황에 다시 망원통에 눈을 갖다 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다시는 혈응을 못 보게 될 것이라고는 아직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 * *

악불군은 큰 현을 최대한 피하고 작은 현의 주루와 객잔을 이용해 왔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오십 호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현의 주루.

마차가 다가서자 마동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인사를 했다.

마차에서 내린 악불군과 담수련이 주루 안으로 들어서자, 귀도신영은 백설의 고삐를 풀어 주고는 마동에게 동전 한 푼을 건네며 말했다.

“저 하얀 말은 알아서 먹을 것이니 가까이 가지 말고, 얘는 여물을 푸짐하게 주거라.”

“예! 걱정 마십시오!”

동전 한 푼의 위력은 마동에게는 대단했다. 그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며 크게 외쳤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군요.”

주루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작은 현의 주루에 손님이 꽉 차 있자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합석을 하시면 안 될까요?”

점소이는 악불군의 등에 메인 검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쩔 수 없지요. 안내하세요.”

담수련이 먼저 허락을 한 이상 악불군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소군, 이자들이 우리를 노리는 자들은 아닌 것 같지?]

[그런 것 같긴 한데, 이 작은 현에 웬 무림인들이 이렇게 모였을까요?]

악불군의 말대로 주루 안에 있는 손님들 대부분은 무기를 든 무림인들이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손님께서 다행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점소이가 안내한 곳은 다행히 담수련이 좋아하는 창가의 자리였다. 그런데 먼저 와 앉아 있는 손님이 여인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담수련은 포권을 하고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담수련이나 악불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여자, 고수야?]

여인이 자신들을 쳐다보지도 않자 담수련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상당한 고수인 것 같습니다. 좀 수상합니까?]

[그것 때문은 아니야. 여기 상황을 보니까 여인 혼자서 올 곳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녀의 말대로 주루 안에 있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사파나 마도인으로 보였다.

하나같이 흉악한 인상을 가진 그들은 마기와 사기를 감추지 않고 보란 듯이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주루 안은 서로를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퍼져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무공이 강하다 해도 여인들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녀는 주위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 여인에게서는 다행히 마기나 사기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은 주위를 살피다가, 한 인물과 눈을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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