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1화>
161화. 새로운 사건(1)
[아가씨,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보셨습니까?]
[저 뒤에 잠룡세가 사람이 있어. 이 시기에 왜 여기 와 있지?]
세가를 나서기 전 담무룡은, 종리화를 통하지 않고 잠룡세가의 인물을 강호에서 만나면 되도록 피하라고 주의를 줬었다.
[아가씨는 지금 역용을 해서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기억엔 없는 인물입니다.]
악불군은 주루 안에 들어올 때 한 번 훑어보며 모두의 얼굴을 머리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외견만으로 날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잠룡세가 사람이라면 내 눈을 알 거야. 그래서 눈은 안 마주치려고.]
절대 역용을 할 수 없는 부위가 바로 눈이었다. 그리고 담수련의 눈은 유난히 예뻤다.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이름은 아십니까?]
[정확하지는 않는데 흑야신이라고 했던 것 같아.]
[흑야신이요? 그럼 잠룡단 대주 아닙니까?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은데?]
흑야신은 잠룡세가의 무력 집단인 잠룡단 외단의 대주로, 대부분을 외부에서만 활동을 한 자였다.
[소군이 육관에서 수련할 때, 나에 대한 납치 시도가 한 번 있었던 거 기억나?]
[기억합니다.]
수련 중 그 말을 전해 들은 악불군은 육관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그가 탄탄한 기초를 쌓은 것도 사실은 담수련을 빨리 호위하고 싶다는 마음이 큰 동기였다.
[그 당시 나를 납치 시도했던 자들을 저자가 추격해서 전멸을 시켰다고 들었어. 그 덕에 세가에 들어와 아버님께 칭찬도 받았고, 나와 인사도 했어.]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볼까요?]
[지금 상황이 그런 거 물어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담수련의 말대로 이미 몇몇 무인들 간에 기 싸움을 벌이는 정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사파 출신들은 눈만 마주쳐도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눈을 피하면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꼬리를 문 것이 되어 그냥 넘어가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상대할 경우는 대부분 칼부림으로 변하는 것이다.
[고노한테는 제가 그냥 나가라고 전했습니다.]
[잘했어.]
방금 주루 안으로 들어서던 귀도신영이 그냥 나가는 것을 보고 이미 짐작하고 있던 담수련은 다시 앞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주위에 신경을 안 쓴다는 듯 계속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여인에게 잔을 권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잔 드시지요?”
사실 여협에게 남자가 함부로 말을 거는 것은 무례였다.
“전 술은 안 먹습니다.”
여인의 답은 상당히 차가웠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무척이나 험한데 혼자 강호행을 하시는 겁니까?”
“저보다는 그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군요.”
“제가 보기에는 빌빌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여협께서는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다른 사람 눈엔 남자가 여인에게 치근덕대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질문들만 던지고 있었지만, 담수련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강호행을 하면서 궁금한 것이 많으면 일찍 죽는다는 말은 못 들으셨나 봅니다.”
“그래도 궁금해서 죽는 것보다는 알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인은 담수련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말했다.
“제가 누군지는 알고 묻는 건가요?”
“여협께서 말을 안 해 주셨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만약 사파였다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거예요. 강호에서 정체를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것도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에요.”
여인은 대단히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는 담수련에게, 악불군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질문을 좀 이상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상해? 난 이 여협이 너무 까칠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까칠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둘의 대화는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에 끊어지고 말았다.
“너희들! 싸울 거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 거면 눈깔아! 사내새끼들이 왜 서로 노려보면서 으르렁만 대는 거야!”
그때 한 중년 무인이 눈싸움을 하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눈싸움을 하고 있던 무림인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넌 뭔데 참견이냐?”
“참견? 하하하! 나 시견혈유검이 오랜만에 강호 구경을 하려고 나왔더니 별 어중이떠중이 놈들이 개기네? 진짜 참견 한번 해 줄까?”
일어섰던 무림인들은 시견혈유검이라는 말에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낭패다!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시체처럼 보이는 얼굴만 봐도 그가 진짜 시견혈유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견혈유검! 지금 네가 무슨 대단한 고수라도 된 것처럼 까부는데, 함부로 나서지 마라.”
“음산여검, 네놈이 끼어 들 줄 알았다. 음산파가 망한 뒤 거지가 돼서 천하를 헤맨다고 들었는데, 미안해서 어쩌냐? 난 네놈에게 동냥 줄 기분이 아니거든!”
시견휴혈검은 이미 음산여검이 나설 것을 짐작한 듯, 즉시 받아쳤다.
둘은 서로 간에 원한이 있는지, 눈싸움을 하던 자들과는 달리 벌써 서로에게 살기를 날리며 험악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네놈이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렇게 저승에 빨리 가고 싶으냐?”
“하하하! 이놈아, 내가 무서워서 슬슬 피한 게 네놈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본 사람이 없으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자리에서 일어났던 무림인들은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더니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시비를 건 자들은 절대 살려 주지 않는다는 시견혈유검을 만나고도 음산여검 덕에 쉽게 물러날 수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십 년의 목숨을 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견혈유검과 음산여검이라는 초일류급 고수의 등장에 무공이 약한 자들의 표정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이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섭선을 든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나서자 음산여검과 시견혈유검은 ‘넌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참! 제가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전 색혼수사라 합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의 목적은 아마 다 같겠지요?”
색혼수사라는 명호를 듣자, 음산여검과 시견휴혈검의 표정이 움찔했다.
예의 바른 말투와는 달리 대단히 잔인하고 집요한 자가 바로 색혼수사였다. 특히 그는 암수와 음모의 달인으로 누구든 그와 엮이는 것을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목적이 같다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소이다.”
음산여검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소군, 목적이 같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뭔가를 노리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은데, 뭘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다는 거야. 좀 더 들어 보면 뭔가 나오겠지.]
전음을 나눈 담수련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황룡표국의 표물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닙니까? 만약 아니신 분이 계시다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색혼수사는 좌중을 들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진한(?) 악불군이 손을 들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담수련이 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이 여인도 그 표물 때문에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담수련은 여인을 살폈다. 그녀도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표물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색혼수사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모두 같은 목적이라는 말이 맞군요.”
“색혼수사! 또 무슨 간교한 음모를 꾸미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냐?”
그때 일행들이 있는 다른 자들과는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괴팍하게 생긴 노인이 짜증어린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하하하! 연산일괴 선배님께서 후배가 나서니 좀 거슬리는 모양이군요. 후배가 빨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조용히 계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안 했습니다.”
색혼수사는 이미 노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던 듯, 듣자마자 포권을 하며 말했다.
연산일괴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연산일괴는 각 성에서 이름을 떨치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중원 전체에 이름을 올린 사파의 고수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찰단의 제거 명단에 오르면서 거의 십 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던 듯했다.
“황룡표국의 표물은 아주 극비로 운반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너희 같은 놈들에게까지 알려졌는지 모르겠구나.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그냥 두고 보려고 했지만 시끄러워서 안 되겠다. 당장 표물에 관심 끊고 사라져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모두 내 손에 죽는다.”
연산일괴는 이곳에 모인 자들을 손바닥 안의 벌레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누구도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비록 그들이 연산일괴보다 명성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한 마디 말에 꼬리를 말고 도망칠 정도로 약한 자들은 아니었다.
더구나 연산일괴는 혼자였고, 그들은 모두 세네 명씩 동조자를 데리고 온 터였다.
그러자 색혼수사가 섭선을 펼쳐 얼굴을 한 번 부치고는 말했다.
“선배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지금 표물을 표왕 평위광이 황룡 칠 표두를 이끌고 직접 운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 생각으로는 아무리 연산일괴 선배님이라 해도 좀 벅찬 상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색혼수사의 말에 연산일괴는 물론 다른 자들도 표정이 굳어졌다.
표왕 평위광은 비록 표국에 몸담고 있지만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황룡표국의 칠 표두는 모두 초일류급의 무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진짜 평위광이 직접 오고 있다는 말이냐?”
“제가 생각보다는 정보망이 제법 정확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 누구도 독자적으로 평위광을 물리치고 표물을 빼앗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전 저희가 힘을 합쳐 표물을 빼앗은 후, 다시 우리끼리 누가 표물을 가져갈지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나 하는 겁니다.”
색혼수사의 말에 모두는 다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진짜 평위광이 온다면 독자적으로 그를 이기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다 황룡표국이 자랑하는 일곱 명의 표두까지 합세했다면 오히려 그들이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문제는 색혼수사였다. 무림에서 가장 비열한 자 중 한 명인 그가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한다는 자체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을 어찌 믿겠느냐?”
모두가 염려하는 말을 연산일괴가 묻자, 시선이 색혼수사에게 향했다.
“모두 합세해서 표물을 강취한 뒤 우리끼리 배분하든지 싸워서 누가 독차지하든지 하자는 것인데, 음모가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쭙잖은 잔머리 굴리다가 들키면 죽는다!”
“제가 아무리 미련해도 천하의 연산일괴 선배님을 속이겠습니까? 전 벌써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색혼수사는 능글맞게 말했지만 연산일괴를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너희들은 어쩔 거냐?”
연산일괴는 색혼수사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음산여검과 시견혈유검을 보며 물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했다.
둘은 절대 협력이 불가능한 원한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명분을 중요시하는 정파가 아니라 이익을 먼저 따지는 사파인이였다.
그리고 여기서 거절할 경우 연산일괴가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우리도 동참하겠습니다.”
둘까지 호응을 하자 다른 자들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자, 그럼 모두 한편이 된 기념으로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색혼수사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리더니 모두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음산여검이 한쪽을 보며 말했다.
“저쪽도 의견을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거기에는 두 명의 청년과 한 여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