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2화>
162화. 새로운 사건(2)
“아~ 그러고 보니 여협도 계신데 의견을 안 물었군요. 그래, 세 분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색혼수사는 등을 보이고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보다는 정면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의 명호에 들어 있는 색혼이란 단어는, 바로 그가 색마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여러분들과 같이 행동할 생각이 없습니다.”
창밖을 보고만 있던 그녀는 답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길 것을 직감한 듯,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색혼수사를 보며 말했다.
“오호! 우리와는 다르다? 정파라는 얘기요?”
비꼬는 듯 말하는 색혼수사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파라서가 아니라, 표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분명 상관이 없으면 손을 들라고 했을 텐데? 그럼 표물에 관심이 없는데 이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계속 버틴 이유가 뭘까? 혹 이상한 걸 바라는 건가?”
짧아지던 말투는 결국 반말이 되었고, 심지어 마지막 말은 희롱의 의미가 다분했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무기를 빼 들 듯 검에 손을 댔지만 결국 뽑지 못하는 모습에,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군.]
[예.]
[저자들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야?]
[영운 산장에서 싸운 자들하고 비교한다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럼 됐네.]
[뭐가 됐다는 말씀이신지?]
[이자들이 통성명을 하자고 했으니, 소군이 일어나서 누군지 말해 줘.]
[다짜고짜요?]
[저 자식 명호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목소리는 더 듣기 싫어. 입 닥치게 해. 안 닥치면 죽여도 돼.]
악불군의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색혼수사의 끈적한 말투에서 이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그녀였다.
[알겠습니다.]
담수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는 언제나 지상 명령 그 자체였다
일어난 악불군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루에 앉아 있던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의 시선이 모두 악불군에게 쏠렸다.
“왜?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다는 표정인데, 말해 봐라.”
색혼수사는 악불군을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더니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 듯 거만하게 물었다.
“색혼수사라고 하셨죠?”
“하셨죠? 이 자식 아주 어이없는 놈일세? 지금까지 우리 대화를 다 들어 놓고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나를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건데, 이 어르신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줘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잃지 않던 그가 악불군에게 대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강자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척하며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약자는 무자비하게 짓밟는 전형적인 사파인의 모습이었다.
“이분께서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다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말하지 마십시오.”
순간, 주루 안에 있던 모든 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어이없어 하는 자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저놈 이제 죽었군.’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무모한 자가 어떻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까?’
담수련의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은 악불군이 자신 때문에 나섰다는 것을 느끼고는 탄식했다.
그녀 역시 악불군이 이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색혼수사가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분이라는 자가 거기 앉아 있는 놈이냐?”
하지만 가장 어이없어 하는 자는 색혼수사였다.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살소를 그리며 물었다.
“쯧!쯧!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참 말을 안 듣는군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색혼수사를 징치하려던 악불군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향했다.
휭!
팍!
입구에서 무엇인가 날아오더니 주루의 중앙에 박혔다.
순간 주루 안에 있던 자들이 사색으로 변하며 벌떡 일어났다. 심지어 계속 여유만만 하던 연산일괴조차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중앙에 박힌 것은 뻘건 봉에 달린 깃발이었다.
[소군, 우리를 쫓아온 것일까?]
주루의 분위기가 일변하자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린 담수련은, 깃발을 보자 악불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글쎄요?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잠시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깃발에는 선명하게 구천마성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감히 본 성의 구역에 들어와 허튼 짓을 하려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이렇게 많다니, 어이가 없구나.”
그때 주루 안으로 한 명의 노인이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구천마성의 장로인 잔양마도였다.
구천마성이 태양천의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숨기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신마급의 마도인으로, 이곳에 있는 자들 중 누구도 그와 견줄 만한 자는 없었다.
잔양마도는 경직된 듯 서 있는 모두를 보더니 한 명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연산일괴, 어찰단이 북쪽으로 철수하니까 좀 살 만하더냐?”
“구천마성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가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오. 용서를 해 준다면 이대로 떠나겠소.”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연산일괴는 갑자기 표변하여 호랑이 앞의 쥐새끼로 변해 버렸다.
잔양마도가 대단한 고수이기는 하지만 연산일괴도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싸운다면 이기기도 힘들지만, 어찌어찌 도망을 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구천마성의 추격을 받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숨는 것 외에는 살아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대로 가겠다? 하하하! 연산일괴가 듣던 대로 시세(時勢)를 파악하는 데 탁월하긴 하군. 그렇다면 하나만 묻자. 황룡표국에서 운반하는 표물이 뭐냐?”
잔양마도가 나타난 것은 악불군을 추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 그게…….”
연산일괴가 잠시 머뭇대자 색혼수사가 급히 끼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복건성 다루가치가 보관하던, 금자 십만 냥을 상회하는 가치를 지닌 황금 덩어리입니다.”
잔머리가 발달한 색혼수사는 구천마성이 나타난 이상 모든 계획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직감했고, 이제 목숨이라도 살려면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넌 누구냐?”
“소생은 색혼수사라고 합니다.”
연산일괴는 난데없이 끼어들어 자신의 말을 가로챈 색혼수사를 당장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색혼수사? 여자만 보면 환장한다고 소문난 놈이군.”
“구천마성이 이곳까지 이미 접수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려 달라는 말이냐?”
“제가 이번 정보만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정보도 알고 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아주 유용하게 쓸 데가 있으실 겁니다.”
잔양마도는 색혼수사의 간사함에 경멸의 눈빛을 보냈지만, 이런 자일수록 써먹기는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정보는 어디서 얻었는지 말해 봐라.”
“예! 청내현 정보 상인들에게 들었습니다.”
“다른 놈들도 정보 상인에게 들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색혼수사의 민첩한 임기응변에 부러운 눈빛을 보내던 다른 자들도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잡았다고 생각한 듯 커다랗게 대답을 했다.
“정보 상인이란 말이지? 감히 이놈들이 본 성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희들에게만 정보를 팔았다는 말이군.”
화가 난 잔양마도의 몸에서 마기가 품어져 나오자, 주루에 있는 자들의 얼굴은 더욱 사색으로 변했다. 도저히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정보는 뭐냐?”
잔양마도는 눈알을 굴리며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색혼사를 보며 다시 말했다.
“여기서 말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다.”
“다루가치가 이번에 보내는 금보다 더 많은 금을 비밀 장소에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정말이냐?”
혼란의 시기.
세력을 확대하려는 구천마성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금이었다. 아무리 고수가 많다 해도 먹지 않고서는 싸울 수 없었다.
거기다 옷과 망가지는 무기들, 그리고 고수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만족할 만한 대우도 제공해야 했다.
한마디로 조직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수였다. 그런 그에게 색혼수사의 정보는 정말 유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구천마성이 상대에게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깃발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흑색기는 당장 사라지면 살려 준다는 의미였고, 적색기는 도망치면 죽인다는 뜻이었다.
지금 주루에 박힌 것은 적색기였다.
적색기를 본 자들은 대부분 살려 두지 않기 때문에 구천혈살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 주루에 있는 자들이 경직된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이유였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천마성의 위세가 정말 대단하네요.”
[아가씨!]
며칠간 추적자들이 없어 기분 좋은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악불군은 구천마성을 굳이 자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역에서나 힘 좀 주는 주루에 있는 무림인들과 달리, 구천마성을 건드렸다가는 자신들의 행적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들 우리 살려 둘 생각이 없어. 조용히 한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을 전음으로 부른 이유를 안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떡할까요?”
“뭘 어떡해. 깃발 하나 던져 놓고 마치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듯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자들인데. 죽여!”
담수련의 ‘죽여!’라는 말에 악불군의 표정이 꿈틀했다. 오음절맥의 부작용이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걱정이고 명령은 명령이었다.
검을 빼든 악불군은 고개를 양 옆으로 한 번 움직이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분께서 구천마성을 무척 싫어하신다. 그래서 너희들은 오늘 죽어야겠다.”
담수련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듯 할 말을 잊고 있던 잔양마도는,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대노한 듯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저 두 놈을 잡아서 포를 떠라.”
순간 잔양마도의 뒤에 서 있던 열 명의 흑의인들이 악불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몸을 날리는 한 동작만으로도 주루 안에 있던 자들은 가슴을 덜컹하고 있었다. 잔양마도 한 명만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인데, 그 열 명조차도 연산일괴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들보다 더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일어난 상황은 그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악불군은 달려드는 그들 사이를 몇 번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그런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보이지도 않았건만 모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잔양마도는 단번에 악불군의 정체를 알아챘다.
“네놈이었구나……. 천호무적검!”
“내가 구천마성과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자주 부딪치는군요. 그런데 더 안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볼 때마다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말을 끝낸 악불군의 검이 쏜살같이 잔양마도를 향해 날아갔다.
잔양마도가 도망을 치기 위해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강한 장로와 호법들이 합공을 했음에도 다 당했다는 것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괜히 개죽음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커억!”
하지만 악불군 앞에서 등을 보인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만약 싸웠다면 최소 십 초는 버틸 수 있었지만, 최악의 수를 두면서 그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빨라도 날아가는 검보다 빠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잔양마도의 등을 뚫고 가슴으로 나온 검이 다시 악불군에게 돌아와 그의 손에 잡히자, 가장 사색으로 변한 자는 색혼수사였다.
“제, 제가 천호무적검 대협이신 줄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
하지만 그는 입을 닫고 말았다. 악불군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차갑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듣기 싫다고 했습니다. 또 말하면 죽습니다.”
“자, 그럼 모두 앉으세요 이제 솔직담백하게 대화를 좀 나눠 봅시다.”
주루 안에 조용해지자 담수련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솔직담백?’
모두의 머리에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처음 보는 담수련과 솔직담백하게 할 말이 그들에게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앉으라는 말이 안 들리시나요!”
이어지는 담수련의 말에 모두는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악불군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담수련의 박력 넘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