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3화>
163화. 광한궁(1)
모두 앉자 악불군은 담수련의 뒤에 섰다. 누구라도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면 당장 손을 쓸 태세였다. 그에 모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담수련에게 미운 털이 박힌 색혼수사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신들의 목숨은 제 한마디에 달렸다는 것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
이들이 평소에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막상 자신들이 죽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아는 듯, 담수련은 우선 목숨을 강조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황룡표국에서 금괴를 운반한다는 것을 정보 상인에게 들었다고 하셨지요?”
“…….”
“왜 말을 안 해요?”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자, 담수련이 질책하듯 크게 말했다. 그러자 연산일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보 상인에게 듣기는 했지만, 제게 말해 준 정보 상인은 청내현의 정보 상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음산여검이 말을 받았다.
“저도 다른 곳에서 정보를 받았습니다.”
담수련은 그런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였네.’
“거기 색혼인지 하는 분.”
“예!”
“다루가치가 금괴를 숨겨 놓았다는 곳이 어딥니까?”
“그건……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모르면서 빈말을 했다는 말입니까?”
“저도 들은 말입니다.”
“누구에게요? 설마 그것도 청내현 정보 상인에게 들었다고 할 건가요?”
“그, 그게…….”
“똑바로 말 못 합니까?”
“청내현 정보 상인에게 들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말을 하기가…….”
“악 대협.”
“예.”
“이분들이 숨으면 잡아낼 수 있나요?”
“천하가 넓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숨을 곳이 많지 않습니다. 어디에 숨든 다 잡아낼 수 있습니다.”
“들었지요? 그럼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하나 드릴게요. 꼭 들어 주셔야 합니다.”
“…….”
하지만 이번에도 모두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먼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부탁이라고 했지만 상황상 강요였고, 하겠다고 대답했을 경우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그냥 여기서 오늘 다 죽을래요?”
“들어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예, 저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죽인다는 말에 한 명이 급하게 답하자, 연이어 그러겠다는 답이 꼬리를 물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가서 당신들에게 황룡표국의 표물에 대한 정보를 준 정보 상인들을 찾아서, 그 정보를 준 이유에 대해 알아오세요.”
뜻밖의 요구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담수련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냥 사라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여기 악 대협께서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용서가 없으시니까요. 그럼 모두 가시고 색혼수사께서는 잠시 남으세요.”
가라는 말에 모두는 후다닥 일어나 사라졌다. 악불군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있었지만, 그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구천마성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만약 잔양마도를 비롯한 모두가 죽은 것을 본다면,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구천마성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남을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색마들을 아주 경멸합니다. 그래서 악 대협께 색혼수사 당신을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두 떠나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색혼수사는, 담수련의 말을 듣자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여인들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또다시 당신이 음탕한 행동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럼 이번은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잔머리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그였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할 때나 통하는 법이었다.
악불군은 그가 아는 고수들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이런 경우 무조건 나 죽었소 하고 꼬리를 말고 있어야 그나마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복건 다루가치의 금괴가 있다는 비밀 장소에 대해 알아오세요.”
“반드시 알아오겠습니다.”
“그럼 가세요. 그리고 지금 어찰단이 물러나면서 당신보다 강한 은거고수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행동을 했다가는 목을 간수하기 힘들 겁니다.”
“조, 조심하겠습니다.”
능글맞은 언변과 다른 사람들을 능가한다고 자부하는 두뇌로 주루에 모인 무인들을 쥐락펴락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순한 양 같았다.
“그리고 주루 주인에게 음식 값하고 집기 부서진 거, 그리고 시신 수습할 돈까지 충분히 지불하고 가세요.”
“예!”
색혼수사는 급히 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 계산대 뒤에 점소이들과 함께 숨어 있는 주인장에게 통째로 넘기더니, 걸음아 나살려라 하는 모습으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정보 상인들에게 그것을 알아내서 뭐하시려고요?”
주루가 텅 비자 악불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나도 몰라. 하지만 뭔가 음모의 냄새가 나서, 저들을 이용해서 그냥 한번 들쑤셔 보려고.”
“저자들이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여기를 벗어나자마자 그냥 다 숨어 버릴 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악당들을 떠나게 만든 셈이니까, 나쁠 거 없잖아?”
“하긴 그렇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악불군은 그녀에게 뭔가 복안이 있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언제처럼 칭찬으로 끝을 맺으려고 했다.
“진짜 내 생각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전 아가씨 머리를 절대 못 따라갑니다. 진짜 칭찬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피~”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살짝 그려졌다.
“제가 천호무적검 악 대협을 몰라 뵙고 큰 결례를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때 여인이 악불군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우선 앉아서 대화하지요.”
담수련은 그녀의 행동과 말투가 달라지자 부드러운 표정을 지며 말했다.
“아깐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여인은 담수련에게 다시 사과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아까 저도 무례했다 생각합니다. 그건 상쇄하기로 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쪽은 천호무적검 악불군 대협이시고, 전 아까 말씀드렸듯이 담수룡이라고 해요. 여협께서는?”
“전 광한궁의 제자인 정소란이라고 합니다.”
“아! 광한궁의 정 여협이시군요?”
담수련은 광한궁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지만 마치 알고 있는 듯 답했다. 그녀에 대한 배려였다.
“광한궁은 여인들만의 문파로 크지는 않지만, 나름 복건에서는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한궁은 정파인가요?”
“정파니 사파니 나눌 정도로 세력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정파에 가까운 분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네요?”
“광한궁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본 궁과 친분이 있는 성황보에 갔습니다만, 성황보 역시 저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위험에 처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든 도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도움을 청하려고 와 보니 도저히 도움을 청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군요?”
“그래서 빠질 생각을 하는데 두 분이 들어오신 겁니다.”
“저희가 왔어도 그냥 가시면 되는데, 왜 계속 앉아 계셨습니까?”
“그게…….”
“저희가 걱정이 되어서였지요?”
“그걸…… 어떻게?”
담수련의 말에 정소란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사실 떠나려던 그녀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보자 불안했다. 조심성 없는 말투나 주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을 보고, 강호 경험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꾸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도 악불군과 담수련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주루에 있는 자들이 전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훔쳐보고 있어서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회다 하고 시비를 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눈에서 초조와 걱정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저희에게 쌀쌀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적대감은 전혀 없었고요.”
“그래도 그 정도만으로……?”
그녀 말대로 아주 작은 단서를 가지고 전체를 추론해 내는 담수련의 모습은 익숙한 악불군이 보기에도 대단했다.
“광한궁을 압박하는 자들은 구천마성이지요?”
정소란의 눈이 더 커졌다. 그녀는 광한성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한마디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며 담수련은 미소를 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구천마성이 들어왔을 때, 눈에 적대감이 가득해지더군요. 원수를 보는 눈빛이라고 할까요?”
“눈빛만 보고도 모든 것을 알아내시다니, 대협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나 더 맞춰 볼까요?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으시지요?”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소란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제발 광한궁을 구해 주십시오. 도와만 주신다면 제가 평생 대협의 종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정소란의 목소리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문파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네요?”
“고아로 살아가던 저를 받아주시고 이렇게 키워 주신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매들과 어르신들은 제게는 자매이고 부모님이십니다.”
그녀를 보던 악불군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에게 일 순위는 무조건 담수련이었지만, 담무룡 역시 그에게는 절대 소홀할 수 없는 은인이자 주인이었다.
해남도까지 가게 된 것은 담수련의 몸을 위해 빙설초를 구하러 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젠 빨리 올라가서 담무룡의 명을 수행해야 했다.
최대한 시비를 피하며 빨리 올라간다 해도 이미 많이 늦은 판에 정소란을 도와준다면 더욱 늦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구천마성이 연관되어 있는 이상, 광한궁을 돕는 것이 그것 하나로 끝날 리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담수련의 성격상 그냥 갈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그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문파를 위하고 문파 사람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가짐은 악불군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악 대협.”
“예.”
“아무래도 구천마성과는 인연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 어떻게 가는 곳마다 우리와 부딪칠까?”
악불군은 우리가 피하면 부딪칠 일도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이미 마음을 굳힌 담수련에게 부담을 주기만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맞지? 역시 나하고 악 대협은 마음이 너무 잘 맞는 것 같아. 아니다. 그냥 완전히 똑같은 것 같아.”
그녀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악불군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분들은 어떤 사이길래?’
둘의 대화를 듣던 정소란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분명 천호무적검은 악불군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직접 그의 무공을 보았으니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공경은 악불군이 하고, 담수련은 너무 스스럼없이 악불군을 대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상식대로라면 이것은 분명 둘이 뒤바뀐 것 같은 상황이었다.
“공자님, 다 끝나셨습니까?”
그때 귀도신영이 주루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고노는 밖에서 뭐하고 있었습니까?”
“제가 눈치 하나는 신경에 들었지 말입니다. 구천마성놈들이 보여서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가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고노, 광한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지요?”
담수련의 질문에 귀도신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광한궁이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시게요?”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뭐, 강서성 접경이니까, 어차피 저희가 가는 길목에 있으니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건 좋네요. 그럼 광한궁으로 가지요.”
“당장 말입니까?”
귀도신영의 반문에 담수련은 정소란을 보며 물었다.
“지금 급한가요?”
“……정말 도와주실 겁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구천마성과 엮이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건만 담수련이 도와줄 것처럼 말하자, 정소란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나쁜 놈들을 싫어해요. 대신 아까 한 말은 책임 지셔야 합니다.”
“도와만 주신다면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럼 얼마나 급한지 말해 보세요.”
“그들이 경고한 날이 닷새 정도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하루 거리이니, 시간은 아직 넉넉합니다.”
“그럼 먹을 것은 다 먹고 갈 수 있겠네요.”
그녀의 너무나도 태연한 한마디는 오히려 정소란에게 살았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