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4화>
164화. 광한궁(2)
주루의 주인은 이미 악불군을 천인(天人)으로 보고 있는 데다, 색혼수사에게 충분한 돈까지 받아서인지 그들이 시킨 뿐 아니라 여러 요리를 더 추가해서 가져다주었다.
“소군.”
“예.”
“마 대협과 구 대협도 불러.”
“그럴까요?”
그러자 악불군이 부르기도 전에 마진우와 구여풍이 스르르 나타났다.
“안 부르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마진우가 너스레를 떨자 귀도신영이 물었다.
“힘들지는 않은가?”
마진우와 구여풍은 이미 귀도신영과 꽤 친해진 듯했다. 하지만 마진우와 구여풍의 등장은 정소란에게는 너무 놀라움을 주었다.
광한궁은 문파의 크기에 비해 무공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그녀는 광한궁의 제자 중에서 세 손가락에 들었다. 광한궁주가 그녀를 내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마진우와 구여풍이 이렇게 가깝게 숨어 있었건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분들의 정체가 뭐기에……?’
더욱이 담수련이 악불군에게 소군이라고 칭하고 그가 공손히 답하는 모습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갔던 점소이가 동네의 장정들과 함께 들어와 시신을 들고 나가고 다른 점소이는 열심히 바닥의 피를 닦는 와중에도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었다.
‘확실히 아가씨의 증상이 전혀 차도가 없었어…….’
악불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넘기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아는 담수련은 시신이 있는 곳에서, 그것도 피 냄새가 풀풀 날리는 장소에서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걱정스럽게 담수련을 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걱정은 걱정이고, 그녀가 변했건 안 변했건 그의 눈에는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담수련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이만 사라져야겠습니다.”
음식을 먹던 마진우와 구여풍이 갑자기 젓가락을 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왜요? 더 드시지?”
담수련이 의아한 듯 묻자 악불군이 대신 답했다.
“상당수의 무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천마성은 아니지?”
“아닙니다.”
잠시 후 이십여 필의 말을 탄 무인들과 십여 대의 마차를 끄는 쟁자수들이 주루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는 선명하게 황룡표국이라 적힌 깃발이 꽂혀 있었다.
“황룡표국이 이쪽으로 온다는 정보는 사실이었나 보네?”
창으로 그 모습을 본 담수련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황룡표국은 중원 사대표국 중 한 곳으로, 대단한 고수들을 많이 보유한 곳입니다. 특히 표왕으로 불리는 평위광은 무림인들이 백대고수 중 한 명으로 항상 포함될 정도로 초절정 고수이지요.”
귀도신영이 담수련과 악불군이 묻기도 전에 황룡표국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강호의 견문이 매우 부족한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그는 정말 필요한 존재였다.
“고노.”
“예, 아가씨…… 아! 공자님.”
귀도신영이 급히 말을 바꿨지만 이미 정소란의 얼굴에서는 아! 하는 표정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강호에 떠도는, 천호무적검이 천상신녀를 보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거기다 처음과 달리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터였는데, 이제 확실하게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됐어요. 이미 정 소저께서도 눈치챘을 거예요. 다음부터는 주의하세요.”
“제가 이런 실수는 여간해서 안 하는데 자꾸 아가씨 말투를 보이셔서…… 죄송합니다.”
귀도신영의 말에 담수련은 피식 웃었다. 실수가 아니라 그녀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수하를 자처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녀에게 이런 것은 잘못됐다고 직접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알았어요. 저도 주의할게요. 그런데 황룡표국의 세간의 평은 어떤가요?”
“표국이 다 그렇지요. 신용만은 확실하다는 평을 받습니다만, 무림인이 아니라 장사꾼으로 분류가 되는 곳이다 보니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맡아서, 원나라의 부역을 했다는 욕도 이따금은 받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표국은 원나라의 표물을 받지 않나요?”
“조그만 표국은 몰라도 거대 표국들은 전부 원나라의 표물을 받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만큼 규모가 클 수가 없지요.”
“하지만 저들이 진짜 다루가치의 금괴를 옮기고 있다면 그건 좀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요?”
“원나라가 반란군들을 다 제압하고 다시 통치를 시작한다면 모르지만, 원나라가 패한다면 표국이 망할 수도 있는 실로 대단히 위험한 거래라고 봅니다.”
“제 생각하고 같네요. 그럼 저들의 표물이 진짜 금괴인지 알아보실 수 있겠어요?”
“하하하! 그게 제 특기 아닙니까? 금방 알아 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조심할 것도 없습니다. 훔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만 보는 건 제겐 너무 간단한 일이니까요.”
귀도신영이 일어나자, 짐을 다 푼 듯 표두들도 주루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장보주를 훔쳐 간 놈을 잡으라고 했더니 혈응까지 잃어버려?”
아수마종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살기는, 몸에서 풍기는 마기만으로도 여간한 고수들은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 마왕급의 마두들조차 가슴을 써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혈응접사들이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찾고 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명독효의 말에 아수마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군사라는 놈이 그 정도 판단도 안 되는 거냐? 혈응은 교주님께서 정말 아끼는 영물이다. 그런 혈응이 사라졌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거냐?”
“혈응의 빠르기는 어떤 고수들도 따르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 깃털은 만 근의 도로도 자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혈응을 누가 있어 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멀쩡하게 장보주를 가진 놈을 쫓던 혈응이 왜 갑자기 사라진단 말이냐? 어디 한번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야명독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아수마종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제 추측으로는 천호무적검이 이유일 것 같습니다.”
천호무적검이라는 말을 듣자 아수마종의 얼굴이 붉게 변해 갔다. 명호만 들었음에도 분노가 치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장보주를 처음 훔친 놈은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홍항에서 사건이 벌어진 이후 혈응은 천호무적검을 추적했습니다. 장보주가 그놈에게 넘어갔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혈응접사의 보고에 따르면 혈응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이상 징후를 보였다는 점이 저는 의아했습니다.”
“그럼, 혈응은 그놈이 어떻게 했다는 말이냐?”
“혈응에 대한 자료가 제게는 없어서 어떻게 했는지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분명 그놈과 혈응의 행방불명과는 연관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혈응의 크기로 미루어, 죽었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말을 끝낸 야명독효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분석을 아수마종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 천호무적검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
“왜 한 놈도 대답이 없어!”
모두 입을 열지 않자 아수마종이 대노한 듯 크게 소리쳤다.
“……전주님, 본 교는 정보망 구축이 많이 안 되어 있습니다. 지금 혈응이 사라지면서 그놈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입니다. 다만 그동안의 행적으로 미루어 복건에 아직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강서나 절강으로 넘어갔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시 야명독효가 조심스럽게 답하자 아수마종은 태사의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쾅 쳤다. 순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마치 기화라도 한 듯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절강이나 강서로 넘어가면 악마전에게 넘어간다. 그 전에 그놈을 잡아 장보주를 확보하고 혈응에 대해서도 알아내야 한다. 당장 그놈을 잡을 방도를 찾아내라!”
혈교의 사대마전의 전주들은 그들끼리의 알력이 대단했다. 만약 이대로 악불군이 악마전의 세력권으로 넘어간다면 아수마종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당연히 그의 입지도 크게 축소될 것이 분명했다.
“존명!”
아직까지는 대놓고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수마종의 분노에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추적을 하면 구천마성이나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정파에 꼬리를 잡힐 수 있는데…… 걱정이군.’
야명독효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역시 지금 상황에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 * *
중원 사대표국답게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행동 하나하나가 절도 있었다.
표사 몇 명이 주루 안을 먼저 살폈고, 잠시 후 커다란 덩치의 중년인이 세 명의 표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평위광과 황룡 칠표두 중 세 명이었다. 다른 표두들과 표사들은 표물을 지키는 듯했다.
평위광은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점소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싸움이 있었나?”
시신을 치웠다고는 하나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은 터, 평위광 같은 고수가 피 냄새와 싸움의 흔적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 그, 그게…….”
평위광은 점소이가 말을 더듬으며 악불군 등이 앉아 있는 자리를 슬쩍 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평위광과 표두들은 악불군이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전 황룡표국의 총표두인 평위광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큰 싸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소협과 연관이 있습니까?”
“표국에서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에 왜 관심을 가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악불군에게 물었는데 담수련이 답하자, 평위광은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표행 중에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주위를 살피는 것뿐입니다.”
“굳이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은 드리지요. 연산일괴라는 분을 비롯해 색혼수사 등 사십 명 정도의 사파인들이 모여 여기서 황룡표국의 표물을 강탈하기 위해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구천마성의 잔양마도란 자가 들이닥쳤지요. 황룡표국의 표물이 금괴라는 말을 듣고는 욕심이 났는지…….”
연산일괴나 색혼수사도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닌데, 잔양마도라는 말까지 나오자 평위광은 어이가 없었다.
잔양마도는 그와 칠표두가 합공을 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담수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괴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물의 내용물은 표두까지만 알려 주는 극비 사항이었다. 특히 이번 표물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는 급히 말을 끊으며 물었다.
“잠깐, 소협! 지금 금괴라는 말은 어디서 들은 겁니까?”
“연산일괴 등이 모의를 할 때 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평위광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거야 그자들을 만나서 물어보셔야지요.”
“그럼 그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오라고 제가 시켰습니다.”
“소협이 연산일괴에게 시켰다고요?”
“믿기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저렇게 말씀하시면 누가 믿을까…….’
그 모습을 보던 정소란은 평위광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믿는 것 아니겠소? 그럼 잔양마도는 어디로 갔소이까? 설마 잔양마도에게도 뭘 시켰소?”
평위광의 말투가 살짝 짧아지고 있었다.
“제가 구천마성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분에게 모두 죽이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직 바닥에 남아 있는 피들이 바로 그들의 피입니다.”
순간 평위광과 칠표두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희롱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처음에는 담수련이 왜 믿음이 안 가게 이렇게 두서없이 말을 하는지 의아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그녀에게 뭔가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