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5화>
165화. 표왕(1)
“입으로 내뱉기에, 그냥 들어 주었더니…….”
평위광의 표정이 험하게 변했다. 더 이상 예의를 지킬 생각도 사라진 듯 말마저 놓자, 담수련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막았다.
“잠깐! 흥분하시기 전에 이분이 누군지는 알고 흥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무례를 저지르고 다시 담으려면 서로 간에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호무적검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표왕이라 불리는 평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악불군이 자신의 소개를 하자 평위광은 물론, 담수련의 말을 들으며 검으로 손을 가져가던 칠표두까지 얼굴이 확 변하며 급히 포권을 했다.
이미 천호무적검의 명성은 백대고수를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영광이라니요?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악불군이 명성과는 달리 겸손하게 받자, 불안했던 그들의 표정이 풀렸다. 표물을 노리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세인들은 그동안 악불군의 행보로 보아 정파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체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었다.
특히 돈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지금 같은 시기에는, 정파라 하더라도 무조건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껏 제 말은 안 믿으시더니, 이분이 천호무적검이라는 말은 믿으시나 봅니다? 가짜면 어쩌시려고요?”
뜬금없는 담수련의 말에 평위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천호무적검이라는 명성에 눌려 인사는 했지만 약간의 의심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악불군을 보면 느끼는, 겉으로 보이는 무공 수위 때문이었다.
평위광은 자신이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 고수이기도 했지만, 표국의 총표두로서 상대의 무공을 잘 파악한다 자부심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악 대협이 가짜일 수도 있으니 의심을 하라는 것입니까?”
“총표두님께서는 원래 의심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나봅니다?”
“표행을 하는 표사들은 모든 것을 다 의심합니다.”
“그럼 당연히 저희도 의심을 하겠군요?”
“솔직히 지금 소협께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러시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전 지금 총표두님을 성토하는 것입니다.”
“성토요? 소협은 누구신데 나를 성토한다는 말입니까? 혹시 내가 악 대협을 몰라보고 결례를 저질렀기 때문입니까?”
“총표두님께서 임무라는 한 가지 사실에 매몰되어, 진짜 의심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천하에 죄를 짓는 행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드리는 말입니다.”
“자꾸 돌려 말하지 말고 알아듣게 말해 보시오. 하지만 이유가 타당치 못하다면 나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상시라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담수련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붙이며 분노를 참지는 않았을 그였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은 이미 너무 거물이 되어 있었다.
“지금 운반하고 계신 금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표물의 정보는 외인에게 알려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금괴라고 하는데, 소협이야말로 사파인 연산일괴의 말을 너무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전 총표두님께서 금괴의 주인이 원나라의 복건 다루가치라는 것을 알고 이런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다루가치의 금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모르셨나요?”
“난 금시초문이오.”
평위광은 금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표물주가 다루가치인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말 모르셨다면 불행 중 다행이네요. 황룡표국의 국주께서 무슨 마음으로 그 표물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금괴를 표물주가 원하는 장소까지 운반한다면 황룡표국은 멸문하고 여기 계신 분들은 중원의 변절자로 낙인 찍히실 겁니다.”
순간 평위광은 물론 듣고 있던 칠표두들조차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얘기를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평위광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표국은 나름대로 신용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용으로 인해 중원인들을 배신하고 원나라에 이익을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슨 의미인지 아직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표물을 넘기시라는 말입니다.”
순간 평위광과 칠 표두는 급히 공격 자세를 잡았다.
“결국 지금까지 한 말이 표물을 강탈하기 위한 입 바른 소리였던 거요?”
“황룡표국을 구하고 총표두님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한 고언입니다. 강탈이라고 생각 마시고 저희에게 양보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황룡표국은 표물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소이다!”
[아가씨, 돈이라면 가주님께서 제게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거기다 고노의 보물 창고에 가면 비싼 물건들이 즐비하다고 했는데, 굳이 표물을 욕심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악불군도 예상을 못했던 듯 급히 전음을 보냈다.
[소군, 나 믿지?]
[저야 무조건 아가씨는 믿지요.]
[그럼 그냥 두고 보다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이유는 다음에 말해 줄게.]
전음을 마친 담수련이 심각한 표정으로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는 평위광을 보며 물었다.
“표물주가 원나라의 다루가치라고 말했는데도, 정말 표물주를 위해 일하시겠다는 말인가요?”
“우린 표물주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표물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스스로 넘기는 일은 할 수 없소이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한 평위광은 이번에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악 대협! 본 표국의 표사들은 물론 남무림의 많은 무인들이 악 대협께서 그동안 행한 수많은 협행에 대해 경외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물을 강탈하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면, 악 대협을 존경하던 사람들이 무척 실망하는 일이 될 겝니다.”
‘이분, 너무 고지식한데? 이런 사람은 강압은 잘 안 통하지.’
담수련은 평위광의 신념에 찬 모습에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어차피 협박 몇 마디로 일이 풀릴 것이라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누구 다가오는 자들 없어?]
[누가 오기로 되어 있습니까?]
[이따 말해 줄게. 느껴지는 거 없어?]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조금 더 시간을 벌어야겠네.]
이해 못할 말을 끝낸 담수련은 평위광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강제로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총표두님께서 표물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저희가 가져도 되겠지요?”
“어차피 우리가 지키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가져갈 수가 있는 것이 표물 아니겠습니까?”
“혹시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든지 청하세요. 단, 그 순간 저 표물은 저희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제 인사는 끝났으니 총표두님은 식사하십시오.”
자신의 할 말만 끝내고 식사를 하라니…… 담수련의 행동은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한 것이었다.
악불군은 좀 미안한 듯, 평위광에게 다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희 공자님께서 원래 아주 유하신 분인데, 원나라의 금괴를 옮긴다는 말을 듣고는 약간 화가 나신 듯합니다. 저희는 이제 표물에 대해 신경을 끊을 것이니, 총표두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
악불군의 공손한 변명에 평위강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만약 저희 표물의 표물주가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맞는다면, 표물을 운반한 후 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일개 표사에 불과하지만 저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원나라에 부역했다는 오명을 쓰고 계속 표사를 한다는 것은 제 스스로 용납을 못합니다.”
“성격이 아주 대쪽 같은데요?”
자리에 앉은 악불군은 약간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격이 대쪽 같으면 뭐해? 저런 사람이 수하들을 다 죽이는 가장 미련한 지도자야.”
“평 총표두가 마음에 별로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얼굴을 보니까 고집불통이라는 것이 딱 보이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비위를 좀 긁은 거야. 상황 파악을 좀 하라고 말이야.”
“저런 성격은 위협으로는 바꾸기 힘듭니다.”
“평 총표두는 표물이 금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다만, 표정이나 말을 들어 보면 다루가치의 금괴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 맞아. 하지만 내 말을 듣고 의심을 가졌다면 판단이라는 것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이라는 명분으로 끝까지 표물을 전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
“그래도 저런 사람은 배신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저런 사람은 지도자보다는 남의 밑에 있는 것이 맞아.”
단정하듯 말하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걱정 반, 감탄 반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평 총표두는 오늘 처음 봤습니다. 대화도 진솔하게 못하고 오히려 약간 안 좋게 끝냈고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한다는 듯 평가를 하십니까? 그냥 보면 다 알 수 있으신지요?”
악불군의 반문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뭘 안다고 갑자기 오지랖을 보이지?”
* * *
구천마성의 호법인 유혼추백은 척후를 나갔던 잔양마도가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 대주인 추성중을 불렀다.
“추 대주, 잔양마도 장로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한 시진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럼 돌아오거나 최소한 연락할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니냐?”
“저도 좀 이상해서 장로님이 움직이신 방향으로 수하들 몇 명을 보냈습니다.”
“분명 영운 산장에서 나온 놈들이 이쪽으로 움직였다고 했는데?”
그들이 추적을 하고 있는 것은 영운 산장이었다.
영운 산장을 접수하러 간 구천마혈에게서 연락이 없자 급히 수하들을 급파한 구천마성은, 영운 산장은 비어 있고 대주인 왕흉을 비롯한 구천마혈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자 대대적인 추적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차 하나가 영운 산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약초꾼의 말에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추적을 하면서 마차로 이동하는 자들이 도망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움직이는 곳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담수련이 영운 산장의 식솔들이 몸을 숨길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동선을 보이며 이동을 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계속 보이던 흔적이 이틀 전부터 완전히 사라지면서 애를 먹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을 충분하게 벌었다고 생각한 담수련이 움직인 흔적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잔양마도는 자신들이 쫓고 있던 악불군 일행을 결국 찾아내기는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죽음이었지만 말이다.
“호법님, 장로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찌 할까요?”
“뭘 어떡해! 당장 그쪽으로 간다. 잔양마도 장로의 성격상 뭔가 발견을 했기 때문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일 확률이 구 할은 된다. 가자!”
유혼추백이 몸을 날리자 그를 따르는 이십여 명의 구천마혈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그런데 아가씨, 아까 누가 온다고 하셨습니까?”
“올지 안 올지 나도 몰라.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봐. 잔양마도라는 자가 꽤 지위가 높은 자 같던데, 겨우 수하 열 명만 데리고 이곳에 왔을까? 거기다 그들은 다루가치의 금괴는 금시초문 같던데. 내 짐작이 맞다면 다른 자들이 근처에 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이 사라졌으니 곧 이쪽으로 올 것 같다는 말이지.”
담수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은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십 장, 이십 장, 삼십 장…… 점점 범위를 넓혀 가던 악불군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누가 나타났어?”
“예, 아가씨 말대로 구천마성으로 보이는 자들의 기가 잡혔습니다. 정말 놀라운 추리십니다.”
“호호~ 소군이 생각해도 내가 머리가 너무 좋아진 것 같지 않아?”
“좋아진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뭐든 보시기만 하면 그다음을 모두 알아내시니,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놀라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을 진짜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녀의 추리력은 거의 공포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군하고 나랑 힘을 합치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아.”
“합치면이라는 말을 틀렸습니다.”
“왜?”
“전 이미 아가씨와 한 몸이니까요.”
순간 담수련의 얼굴이 발개졌다.
아무렇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한 몸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