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66화 (166/472)

<천검지애 166화>

166화. 표왕(2)

오십 호 정도의 작은 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한데 무림인들 간에 싸움이 났다는 말이 돌면서 모두 집 안에 숨어 버리는 바람에, 거리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할 따름이었다.

“배고픈데 언제 끝나나?”

황룡표국 칠표두 중 한 명인 왕인보는 표물을 실은 마차의 주위를 경계하며 중얼거렸다.

표행 중에 식사를 할 때에는, 경계를 하는 표사와 먼저 식사를 하는 표사로 반씩 나눠 돌아가며 식사하게 되어 있었다.

“왕 표두님, 저쪽 좀 보십시오.”

그때 관도를 경계하던 표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와 보고를 했다.

“뭐지? 당장 들어가서 총표두님께 수상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고해라.”

왕인보는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수십 명의 무리를 보자 긴장한 표정으로 급히 명했다. 이내 표사가 주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 표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표물의 주위를 감싸라! 그리고 쟁자수들은 주루 뒤 쪽으로 피해라.”

이런 경우를 자주 맞닥뜨렸는지 왕인보의 명이 떨어지자 모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 주루 안에 있던 평위광과 표두들이 급히 달려 나왔다.

* * *

“저건 또 뭐냐?”

말을 타고 대주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던 유혼추백은 상당한 수의 무인들이 주루 앞에 포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검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황룡표국의 깃발이 있는 것을 보아 표행 중인 모양입니다.”

대주인 추성중이 급히 말했다.

“잔양마도 장로가 저따위 표국 놈들에게 당할 리는 없겠지?”

“어찌 상대가 되겠습니까?”

“네가 먼저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와라.”

“예!”

* * *

“총표두님, 비적들일까요?”

수석표두인 전창삼은, 다가오던 무리가 멈춰 선 채 몇몇만 접근하자 검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니다. 무림인이다.”

평위광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그는 유혼추백의 무공이 자신보다 높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더욱이 다가오는 자들도 한 명 한 명의 무공이 표사들을 능가했다.

한마디로 그들이 표물을 노린다면 황룡표국은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의미였다.

“저는 황룡표국의 총표두인 평위광이라고 합니다.”

추성중이 다가오자 평위광은 공손히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구천마성 산하 구천마혈의 대주인 추성중이다. 너희들은 이곳에 언제 도착했느냐?”

추성중의 말에 표두들의 얼굴에 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비록 무림인이지만, 무림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표사였으나, 먼저 나선 평위광은 분명 추성중보다 나이가 많았다.

거기다 그는 백대고수에 이름까지 올린 초절정 고수였다.

하지만 누구도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구천마성이기 때문이었다.

“추 대주이시군요. 저희는 지금 표행 중으로, 이곳은 지나다 식사를 위해 잠시 들른 곳일 뿐입니다. 이곳에 온 지 반 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평위광은 이런 대우에 익숙한 듯 차분하게 설명했다.

추성중은 모두를 한 번 훑어보더니 손을 들었다. 와도 괜찮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유혼추백을 본 평위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혼추백 선배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황룡표국의 평위광이라고 합니다.”

유혼추백은 평위광이 처음 표사가 되었을 때 이미 중원에 이름을 날리던 전대의 마두였다.

“황룡표국이 중원 사대표국이 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 황철은 잘 있느냐?”

“전대 국주님께서는 칠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 본 성의 장로인 잔양마도가 열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왔다. 본 적이 있느냐?”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이냐?”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희들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반시진이 채 안 됩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곳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래?”

유혼추백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그의 코로 익숙한 냄새가 들어왔다. 피 냄새였다.

“추 대주.”

“예!”

“주루 안에서 피 냄새가 난다. 들어가 봐라.”

“예!”

명을 받은 추성중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반각도 안 되어 뛰어 나왔다.

“누군가 피를 지우고 싸움의 흔적을 감춘 것이 분명합니다. 주루의 주인과 점소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담수련이 평위광 일행이 나가자마자 피신을 시킨 터였다.

“아무도 없는 주루에서 너희들끼리 식사를 했다는 거냐?”

“저희가 나오기 직전까지 분명 점소이와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럼 피 냄새는 뭐냐?”

“저희가 오기 전에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유혼추백은 평위광의 말에 비소를 짓더니 주위를 살폈다.

“저 마차는 뭐냐?”

그는 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마차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표물을 운반 중입니다.”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중이냐?”

“표행 중인 표물의 목록은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습니다.”

유혼추백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평위광을 살피더니 말했다.

“표사치고는 제법 무공이 상당하다만……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따위 대답을 하다니, 겁이 없구나?”

“강호의 도의에 대해서는 선배님께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구천마성의 행사에선, 강호의 도의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표물이 무엇인지 말해라.”

“선배님은 사파와는 다른 마도의 거물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일개 표국을 이리 압박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행동은 선배님의 명성에 흠이 될 것입니다.”

“나 유혼추백은 이미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으며 살아왔다. 이따위 흠 하나 더 생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 다시 묻는다! 저 마차에 실린 표물이 무엇이냐?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평위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혼추백의 이번 말은 마지막 경고였다. 평위강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구천마성과 충돌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차에 실린 것이 금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 역시 대단히 위험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평위광은 표사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유혼추백이 전면에 나선 이후, 처음과 달리 그들의 눈엔 두려움이 맺힌 상태였다.

그와 표두들 그리고 충성심 있는 몇몇 표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표사가 된 자들이었다.

산적이나 마적이라면 몰라도 구천마성이라면, 이들은 싸우기보다는 도망을 치는 길을 택할 것이 분명했다.

‘나와 칠표두 빼고는 싸울 수 있는 표사가 없어.’

고심하던 그는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차에는 상단에 전할 금괴가 실려 있습니다.”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면 그것이 또 다른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평위광은 우선 사실을 말하고 운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나쁜 예상은 대부분 맞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금괴라는 말을 들은 유혼추백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근래 구천마성이 곳곳에서 작은 문파들을 압박하고 심지어 모조리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차 열 대의 금괴라면……

“오늘 내가 아주 운이 좋군.”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평위강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꺼낸 유혼추백의 한마디에 상황이 최악으로 변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 * *

‘왜 그냥 나갔을까? 설마, 저것 때문에는…… 아니겠지?’

정소란은 주루 안에 들어왔던 추성중이 자신들을 보았음에도 그냥 나간 것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뭔가를 조사하러 들어왔다면 당연히 자리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뭐라도 한마디 정도는 묻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정소란은 악불군이 그들 탁자 주위에 꽂았던 대나무들을 회수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것 때문이 분명해 보였다.

“고노에게 전음이 왔는데, 열 마차 전부에 순금 금괴가 가득이라네.”

악불군이 대나무를 모두 회수한 후 자리에 앉자, 담수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차 주위를 표사들이 완전 포위하고 경계할 텐데, 그것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군은 소군의 방법, 고노는 고노의 방법이 있지 않겠어?”

“하긴 그렇지요. 참! 마 대협에게 전음이 왔는데, 아까 떠난 자들 중 한 명이 계속 주위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누구?”

“검은 옷을 입고 등에 쌍칼을 메고 있다고 합니다.”

담수련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녀가 보았던 흑야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들에게 관심을 받기 싫은지, 일이 벌어지는 동안 정말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흑야신인데? 떠날 때까지 너무 조용하기에 눈치 못 챘나 보다 했는데, 왜 안 떠나고 숨어 있지?”

“혹시 우리를 알아보고 할 말이 있어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요?”

“곧 알게 되겠지. 그래 지금 밖의 상황은 어때?”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총표두가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라 봐야지요.”

* * *

“복건성은 지금 구천마성의 세력이 되었다. 황룡표국에서는 본 성에 복건성을 지난다고 통보를 했느냐?”

유혼추백은 우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구천마성의 세력은 광동성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천마성은 이십 년 넘게 강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활동을 하지 않았건, 황룡표국에서 복건성이 본 성의 세력이 된 것을 몰랐건,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통보를 했느냐?”

“몰랐는데 어떻게 통보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구천마성의 총단이나 분타가 어디에 있는지도 저희는 몰랐습니다.”

“잘 알겠지만 본 성의 세력권을 지나는 무림 세력이나 표국 그리고 상단들은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약 허락도 받지 않고 세력권에 들어설 경우 일어나는 모든 불상사는 침입한 세력의 잘못이다.”

평위광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분명 터무니없는 억지였지만, 필패임을 알면서 덤비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표물을 넘겨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다.

“선배님께서 강호의 도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신다면 저로서는 죽음으로써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으로 막는다? 하하하하!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는 말이구나.”

유혼추백은 커다랗게 웃더니 갑자기 소매를 뿌렸다.

차가운 기가 평위강의 전면을 향해 날아갔다.

펑!

평위강은 급히 검을 빼어 날아오는 기운을 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는 무려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유혼추백은 여유 만만하게 뿌린 강기였고 평위강은 아까부터 기습에 대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뒤로 밀린 그의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실력으로 저항을 하는 것은 아주 미련한 짓이지. 내가 다른 놈들 같았으면 모조리 죽이겠지만, 너희는 무림인이 아니니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당장 마차만 놔두고 이곳을 떠나라.”

유혼추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뒤에 서 있던 수십 명의 장한이 무기를 빼 들었다.

이제 누구든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그대로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리고 평위강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왜 무기를 거두느냐! 비록 표사라 할지라도 계약을 맺은 이상 끝까지 충성을 다해라!”

칠표두 중 하나인 간석구가 크게 소리쳤다.

구천마성의 위세에 겁을 먹은 몇몇 표사들이 무기를 거두더니 마차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공이 약한 상황에서 수까지 저쪽에 밀리는데 버틴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이었으니, 표사들만 욕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백이 가상하군?”

소리를 친 간석구를 흘깃 쳐다본 유혼추백이 다시 평위광을 보며 말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당장 떠나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준다. 하지만 계속 버틴다면 모조리 죽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한 발짝 나선 구천마혈은 명령만 내린다면 모조리 쓸어버릴 태세였다.

[도움을 청하시면 표사들의 목숨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때 평위강의 귀로 담수련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르르 몸을 떨고 있던 평위강은 결국 주루 쪽을 보며 소리쳤다.

“도와주시오!”

드디어 평위강의 입에서 도와 달라는 소리가 나자, 담수련은 회심의 미소를 지며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그녀의 옆에는 악불군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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