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67화 (167/472)

<천검지애 167화>

167화. 유혼추백

유혼추백은 평위광이 주루 쪽을 보며 소리치자 추성중을 슬쩍 보았다.

“주루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 저기 나오는 놈들은 뭐냐? 어떻게 대주란 놈이 수색 하나 제대로 못해!”

유혼추백은 주루 안에서 나오고 있는 담수련과 악불군을 가리키며 질책을 했다.

“총표두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구천마성은 사람들 생명을 벌레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집단이지요.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다면 표물은 둘째 치고 표사들까지 모두 죽였을 겁니다. 그래도 저희는 그냥 표물만 원하니까 좀 양심적이 아닐까요?”

담수련이 평위광을 향해 하는 말을 듣던 유혼추백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가 느끼는 담수련의 무공 실력은 잘 봐 줘야 이류 정도였다. 그 뒤에 서 있는 악불군은 좀 나았지만, 그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유혼추백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위광은 그가 보아도 절대 만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자존심까지 버리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새로 나타난 이들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공 수위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라는 건가?’

유혼추백은 담수련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는 분명 약했다.

“지금 감히 구천마성을 입에 올린 것이냐?”

유혼추백은 담수련을 보며 차갑게 물었다.

“요즘 들어 구천마성이 자꾸 보이는데, 누구 찾나 보지요?”

담수련의 반문에 유혼추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천마성이 자꾸 보인다는 것은 이미 구천마성을 만났다는 말이 아닌가……

“잔양마도를 보았느냐?”

“잔양마도인지는 모르겠고, 너무 안하무인격으로 사람들을 무시하던 분은 만났지요.”

모른다고는 했지만 누구라도 만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어조였다.

“그들은 어디 갔느냐?”

담수련은 그의 말에 과장되게 뒷걸음을 치더니, 악불군의 등 뒤로 숨으며 말했다.

“곧 보게 될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불군의 검이 유혼추백을 향해 날아갔다.

탕!

“히이이잉!”

악불군의 손에서 떠나 유혼추백의 앞에까지 날아간 검의 속도는 경악할 정도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받아친 유혼추백의 무공도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이 너무 강해, 그가 탄 말이 구슬프게 울며 주저앉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연이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혼추백에 의해 날아간 검이,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구천마혈의 단원들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악!”

“악……!”

유혼추백이 말이 쓰러지면서 흐트러진 자세를 잡는 데 걸린 시간은 말 그대로 찰나(刹那)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죽은 구천마혈은 열두 명이나 되었다.

“이기어검! 천호무적검 네놈이었구나!”

선혈이 뚝뚝 흐르는 검을 회수한 악불군을 보며, 유혼추백이 드디어 정체를 알았는지 부르짖듯 소리쳤다.

“최근 구천마성의 인물들을 너무 많이 죽였습니다. 그만 돌아가신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악불군의 제안에 유혼추백의 눈이 흔들렸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을 직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마급의 마도인인 그로서는 그냥 도망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없었다.

“감히 구천마성을 건드리고도 네가 편히 살 수 있으리라 믿느냐?”

결국 그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 가지만 반드시 다시 찾아와 죽일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소군!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다 죽여. 저런 자들은 자비를 베풀어 봐야 소용없어. 다음에 복수를 한다며 해코지를 할 거야.”

담수련의 명이 먼저 떨어졌다. 그리고 악불군에게 그녀의 명은 언제나 일 순위였다.

“으악!”……

순식간에 몸을 날린 악불군의 검이, 남아 있는 구천마혈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냥 갔어야 했어!’

유혼추백은 악불군의 검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자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그냥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쾅!

유혼추백이 도를 들어 떨어지는 악불군의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이내, 악불군이 상대했던 고수들이 매번 빠지는, 저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착각에 그도 빠지고 말았다.

마도의 고수들이 가지고 다니는 무기들은 대부분 알아주는 명기(名器)들이었다.

그에 반해 악불군의 검은 장검도 아니고 중검도 아닌 어중간한 크기에, 두께도 얇은 빈약해 보이는 검이었다.

하나.

“이, 이, 이게…… 어떡해…….”

악불군의 검을 막은 도는 너무 허무하게 잘렸고, 그의 몸까지 지나갔다.

유혼추백은 악불군에게 죽은 자들이 매번 보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도망쳐라!”

그 모습을 본 추성중은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나머지도 그의 뒤를 따라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들은 어찌할까요?”

악불군은 그들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은 듯 물었다.

“놔둬, 천호무적검에 대해 소문을 퍼뜨릴 사람들도 좀 있어야지.”

담수련은 가볍게 말하고는 평위광을 보며 말했다.

“그럼 약속대로 저 금괴들은 저희 겁니다.”

그러나 평위광은 악불군을 그저 경외에 찬 눈으로 보고 있을 뿐 답이 없었다. 담수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햐~ 매번 놀라면서도 여전히 놀랍단 말이야…….’

“고노.”

감탄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악불군을 보고 있던 귀도신영은 담수련이 부르자 급히 달려갔다.

“예!”

“저 금괴, 우리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처분 가능하지요?”

“전표로 바꾸는 것이 가장 편하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 되고 청도현까지는 가야 합니다.”

청도현은 근처에서 가장 큰 현이었다.

“그럼 거기로 가야겠네요.”

“그런데 공자님.”

“말하십시오.”

“한 대분의 금괴는 수수료로 줘야 할 겁니다. 날강도 같은 놈들이 이런 경우 일 할은 달라고 하거든요.”

“일 할이요? 정말 날강도네요?”

어느새 담수련의 옆에 돌아와 서 있던 악불군은, 그녀의 놀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따지면 자신들 역시 날강도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과 다르게 나라를 위해 행했다는 대의명분은 있었다.

* * *

담수련은 황룡표국의 쟁자수들과 표사들에게 일인당 금자 열 냥씩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황룡표국의 흔적을 모두 지운 마차를 청도현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이미 악불군의 무공을 아는 그들로서는 공짜로 하라고 해도 군말 없이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표사에게는 이 년치 봉급, 쟁자수에게는 십 년치에 해당하는 금자 열 냥까지 준다고 하니 누가 거절을 하겠는가……

고노는 먼저 준비해 두겠다며 정소란을 태운 마차를 끌고 청도현으로 떠났고, 담수련은 오랜만에 백설을 타고 길을 향하고 있었다.

“악 대협의 명성과 그 무공이면 돈 같은 것은 그리 구애를 받지 않으실 텐데, 잘못하면 오명을 쓸 수도 있는 일을 벌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평위광은 담수련의 옆에 바짝 붙어 가는 악불군을 보며 나름 조언을 했다. 이제 어느 정도 놀라움이 가신 모양이었다. 거기다 오는 동안 보인, 악불군의 친절하고 예의 바른 태도도 그가 편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답은 담수련에게서 나왔다.

“총표두님, 제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말해 주신다면 저도 말씀드리지요.”

“이미 표물까지 다 넘긴 상황입니다. 표왕이라는 명호는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모든 명예를 잃었는데,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표사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 자부심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답니다.”

“제가 글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해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황룡표국의 국주와 사이가 안 좋으시지요?”

“표국 내의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야 우리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어요. 국주와 사이가 안 좋으시지요?”

평위광은 잠시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편은 아닙니다.”

“아마 이번 표행에 총표두님의 심복들이 대부분 편성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너무 뻔하지 않나요? 그 주루에서 표물을 노리던 자들은 표물이 금괴 십만 냥에 달한다고 했어요. 액수까지 안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요? 거기다 총표두님께서도 모르는 표물주의 정체까지 알고 있었어요. 그럼 그 정보를 흘린 사람은 국주밖에 없겠지요?”

“표물을 잃으면 황룡표국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요? 계약 위반으로요? 이미 대강 이북으로 쫓겨 간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남에 있는 황룡표국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어요?”

“그럼 국주님께서 사기를 치려고 한단 말입니까?”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이번 기회를 빌려서 말 안 듣는 총표두님과 그 측근까지 제거하는 일석이조를 노린 것 같네요.”

“공자께서는 황룡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그냥 머리에 다 그려지네요.”

“연산일괴가 제법 강하다고는 하나, 그들만으로는 우리의 표물을 탈취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면 이미 그런 전력까지 다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어요. 이번 기습에서 표사들이 반 정도 죽겠지요. 그리고 다음 번 기습에서 또 반 정도 죽고, 힘이 다 빠진 총표두님을 제거하고 금괴를 국주에게 가져다 줄 자들이 나타나겠지요.”

“그럼 또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원래는 그랬는데, 금괴가 저희 것이 됐으니 더 이상은 없을 겁니다.”

“…….”

평위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충성을 하던 전대 국주가 죽은 이후, 표국의 경영 문제로 신임 국주와 상당한 알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보아 온 그가 자신과 칠표두까지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세세한 부분을 좀 제외하면 제 추측은 거의 완벽해요. 하지만 지금 황룡표국이 중원 사대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총표두님 덕 같은데, 제거까지 하려고 하는 것은 소탐대실 같거든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호위하면서도 둘의 대화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악불군은 그녀의 말에 작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담수련이 스스로 그것을 짚은 것이다.

“맞습니다. 제가 국주님께서 자라오는 과정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습니다. 저와 의견이 좀 안 맞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심성을 가지신 분은 아닙니다.”

평위광의 말에 담수련은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사람이 말하는 심성은, 대부분은 정확한 법이었다.

[소군, 아무래도 무림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 좋은 것입니까?]

[내 짐작이 맞다면 아주, 아주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너무나도 빈약한 정보로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모습을 그동안 여러 차례 보았기에, 이번에도 맞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녀가 아주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악불군의 얼굴에는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천하가 어지러워질수록 그녀에게는 위험이 증가할 것은 당연했다.

처음 남하를 할 때는 빙설초만 찾으면 된다는 희망이 있었다. 결국 빙설초를 얻기는 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새로 모습을 드러낸 구천마성과는 아예 불구대천의 원한을 맺게 되었고, 정체도 모르는 혈응을 부리는 자들까지 적이 된 것이다.

북상을 한다 해도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그 순간 그들의 현상금을 노리는 자들이 또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들의 적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더욱이 담무룡이 그에게 지시한 일들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심산유곡에 숨어서 살자고 하셨을 때 거절하지 말 걸 그랬나?’

악불군은 후회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그것 역시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담수련이 변하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약해지면 아가씨께서 힘을 잃어. 아가씨께서 어떤 결정을 하건 난 그것을 이뤄 드리면 된다.’

악불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 순간.

[공자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자를 제압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위를 호위하고 있던 마진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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