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8화>
168화. 흑야신(1)
흑야신을 제압했다는 보고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 심문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으니 청도현으로 데리고 가십시오.]
[알겠습니다.]
‘그가 우리의 정체를 알았을까?’
흑야신이 떠나지 않고 남았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한 상황이었다.
평위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말을 몰자,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가씨, 흑야신을 제압하라고 하셔서 마 대협과 구 대협이 제압은 한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여러 가지로 좀 의문이 있어서 뭐 좀 물어보려고.]
[가주님께서 제게, 강호에 나가면 종리 단주님 외의 모든 잠룡세가 사람들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흑야신을 만난다면 우리의 정체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강호에 나온 후, 악불군은 오룡세가가 천하인들에게 대단히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에게 담무룡이나 잠룡세가는 은인이었고 고마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몰랐던 잠룡세가의 악행에 대해 들으며 상당한 갈등을 겪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천하인들이 알게 된다면 정파인들까지 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미 다른 사룡세가와 어찰단의 추적을 받는 상황에서, 구천마성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과도 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정파까지 적이 된다면 온 천하가 적이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소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아. 그래도 흑야신과 대화는 해 봐야 해. 그가 거짓을 말하건 진실을 말하건, 그 안에는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을 거야. 난 그게 필요해.]
[알겠습니다.]
악불군은 그와 담수련이 잠룡세가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어차피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 * *
악불군이 청도현에 다다를 즈음, 천하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정세가 요동치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쾅!”
평생 대공이 이렇게 대노한 적은 없었을 것이었다.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그는 전부 잘 헤쳐 나왔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적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받은 보고는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게 하고 있었다.
“영웅회 이놈들!”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서찰은 불이 확 붙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대공, 황제 폐하께서 빨리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환관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황실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사대를 내보내지 않은 황제가, 무슨 면목으로 내게 대안을 달라고 한단 말이냐! 내 분명 어사대를 보내 차칸테무르를 보호해야 한다고 청했었다!”
방금 그가 받은 보고는 원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자 영웅인 차칸테무르의 암살 소식이었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히던 유복통을 몰락시키고, 다른 반란군들의 북상을 홀로 막아 낸 그는 원나라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영웅회에서 보낸 전풍이라는 살수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대공 전하, 지금 폐하께서 믿을 분은 전하밖에 없습니다. 통촉해 주십시오.”
환관은 무릎을 꿇고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이미 대공이라 해도 대세를 바꾸기는 어려워 보였다.
차칸테무르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고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진우량과 장사성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무림인들은 도문을 도둑들의 문파라며 천시하고 무시했지만, 도문에는 무림인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재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장물 처리였다.
청도현에 도착한 귀도신영은 순식간에 이십여 명의 도문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백 명 가까운 하오문 제자들과 연락을 했다.
그리고 금괴는 도박판, 기방 등을 거쳐 하오문으로 옮겨졌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액수가 커서 삼 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삼 일이요?”
담수련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너무 늦나요? 그래도 이 이상 빠르게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늦다니요? 제 예상보다 너무 빨라서 그럽니다. 아무래도 천하가 도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희가 무공은 좀 딸리지만 남들이 못하는 재주가 좀 있긴 하지요.”
귀도신영은 생전 처음으로 자부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럼 삼 일은 이곳에 머물러야겠네요?”
“그냥 떠나도 괜찮습니다. 다 알아서 전표로 바꿔 제게 전해질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아시겠지만 적은 구천마성이에요. 저희 때문에 도문분들이 해코지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주세요.”
“구천마성이 아니라 어찰단이 가장 융성할 때도 저희는 언제나 했던 일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고노.”
“예.”
“평 총표두 말이에요.”
“거두고 싶으십니까?”
고노가 말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자 담수련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수하를 얻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지식하고 쓸데없는 고집도 강해서 끌어들이기에는 좀 부담이 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표사들을 살리기 위해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수하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시잖아요?”
“제가 한번 설득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려면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말해 줘야 하는데, 무엇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담수련은 잠룡세가에서 담무룡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공이 높은 수하나 무력집단이 아니라 자체 운영하는 상단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데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표국을 만들 생각이에요.”
“아가씨께서 표국을 직접 운영하신다는 말이십니까?”
“저나 악 대협이 직접 운영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고 봐요. 전 평 총표두께 표국의 국주를 맡아 달라고 할 생각이에요.”
“아하! 대단하십니다. 아가씨께서 낚시를 하시면 정말 잘하실 것 같습니다.”
“왜요?”
“원하는 물고기에게 가장 적절한 미끼를 던지시니 말입니다.”
귀도신영의 너스레에 미소를 지은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을까?’
악불군의 무공 정도면 이젠 굳이 주위를 살피지 않아도 암살자 정도는 즉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여전히 기감을 열어 두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담수련을 보호하는 일에 자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너무 좋고 사랑스럽기도 했지만 미안하기도 한 그녀였다.
“그럼 고노는 일 보세요. 저는 악 대협과 함께 볼일이 좀 있어서 다녀올게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귀도신영은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평위강의 자리로 걸어갔다.
평위강은 칠표두나 표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담수련과 대화를 나눈 이후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지, 고심하는 표정으로 며칠째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총표두,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노부가 이래 봬도 강호경험이 상당히 많으니, 고민 있으면 말해 보시구료. 내가 현명하게 해결해 드리리다.”
평위광은 그가 허락도 없이 앞자리에 앉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고노가 일 처리 하나는 참 시원하게 하는 것 같아.]
담수련은 곧바로 자신의 부탁을 시행하는 귀도신영을 흘낏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 * *
‘누구이관데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정신이 든 흑야신은 뒷짐을 진 채 등을 보이고 있는 마진우를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곧 자신의 아혈이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겠지만 잠시만 기다려라. 너와 대화를 해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신다. 아혈이 풀렸다고 소리를 치거나 했다가는 그대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냉기가 풀풀 날리는 마진우의 목소리는 그동안 잊었던, 그가 천하제일 살수집단인 백인막의 특급살수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초절정까지는 아니어도 초일류급의 무공을 지니고 있거늘 언제 제압당했는지도 몰랐다니…… 도대체 저자의 정체가 뭐지?’
마진우의 말을 듣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흑야신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일각쯤 지났을까…….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마진우의 등 쪽으로 향해 있어, 누가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셨습니까?”
“나가 계세요.”
“예!”
흑야신은 들어온 사람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제압한 자보다는 윗사람이라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진우의 행동이 매우 공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숨어서 감시한 이유가 뭐지요?”
“누, 누구신지?”
악불군은 담수련의 눈짓을 받자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흑야신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이미 악불군의 무공은 직접 본 상황인지라 저항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제, 제가 감시를 하다니요? 전 그저…….”
“솔직하지 못한 것을 보니 믿지 못할 사람이군요. 악 대협, 죽여요.”
담수련의 말에 대경실색한 흑야신은 급히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잠깐, 사, 사실은 악 대협의 이름 때문에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했으면 좋았잖아요? 그래, 이름이 어떻다는 거지요?”
“제가 아는 이름인지라…….”
“아는 이름은 누구의 이름인가요?”
“제, 제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 있던 자입니다.”
“어떤 조직이지요?”
“그, 그것은…….”
“잠룡세가라는 단어가 이제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진 모양이군요?”
이어지는 담수련의 말에 흑야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했던 것이 사실로 판명이 된 것이다.
“그, 그럼 악 대협께서 잠룡세가의…….”
“맞습니다. 내전 호위 악불군입니다. 잠룡단 대주님이시지요?”
“마,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요?”
잠룡세가에서 악불군의 지위는 흑야신보다 많이 낮았다. 하지만 그는 악불군에게 말을 놓을 수 없었다.
“예전 어렸을 때 저를 보호한 공으로 아버님께 큰 칭찬을 받았던 것을 본 적이 있어요.”
흑야신도 왜 악불군이 약해 보이는 담수련에게 그렇게 공손한지 의아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잠룡단 대주 흑야신이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흑야신은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했다.
“일어나 편히 앉으세요. 그럼 이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담수련이 자리에 앉자 악불군은 그녀의 뒤에 섰다. 그녀의 권위를 살려 주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흑야신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어찌 감히 아가씨 앞에 앉겠습니까? 그냥 서서 답을 하겠습니다.”
몸을 일으켰지만 흑야신은 결국 자리에는 앉지 못했다. 이미 그와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악불군조차 서 있는데, 그가 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러세요. 우선, 그곳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요?”
“사실은 제가 낭인이 되었습니다.”
“잠룡단의 대주가 낭인이 되었다고요?”
“잠룡세가에서 큰 변이 일어난 것을 모르십니까?”
흑야신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이 굳어졌다. 짐작을 하면서도 아니기를 바랐던 일이 실지로 일어난 것이다.
“자세히 얘기해 보세요.”
“잠룡세가의 절강 분타들이 모두 와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도 이해가 안 되어 총단으로 가 보려고 했으나 어찰단과 절강군부에 막혀 항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잠룡세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반란이라고요?”
“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문 군사님께서 주도를 하고 어찰단이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문 군사가 아버님을 배신했다고요?”
담수련은 믿기지 않는 듯 놀라 반문했다. 종리화를 제외하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차운규 분타주님께서 와해된 분타의 수하들을 끌어모아 반전을 시도했지만,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외부 세력들이 절강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반전은 고사하고 그들의 공격을 막기에도 벅찰 정도였지요.”
“총단의 도움은 전혀 없었겠군요?”
“이미 저희를 반도 취급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도움은커녕 잡아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아마 가주님께 충성하는 자들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은 다르게 들으면 자신은 담무룡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버님의 소식은 들은 것이 있나요?”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두려움에 묻지 못하던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달래며 가장 알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