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9화>
169화. 흑야신(2)
“그게…….”
흑야신은 말을 더듬으며 즉답을 피했다.
“전 상관없으니 아는 대로 말하세요.”
“사실은 저도 모릅니다. 반란이 일어났다면 가주님께서 분타에 회가(回家) 명령을 내리셨을 텐데, 저희에게 하달된 명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후로도 아버님에 대한 소식은 접한 적이 없다는 건가요?”
“예, 저뿐만이 아니라 제가 아는 모든 이에게 확인해 봤지만, 여러 소문만 난무할 뿐 가주님의 소식을 들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여러 소문이라면 어떤 거지요?”
“폐관 중이시라는…….”
“됐어요. 더 들을 필요도 없겠네요.”
담수련은 입술을 꾹 물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아가씨, 가주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미 발표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소문이 없다는 자체가 가주님께서 안전하게 피신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악불군이 급히 그녀를 달래기 위해 말했지만, 그의 말이 먹힐 리 만무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 판단은 그녀가 한 수 위였기 때문이었다.
“차 분타주가 세력을 규합했다면서, 낭인이 되어 떠돈 이유가 뭐지요?”
“절강에 유입된 무림인들이 분타가 있는 지역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하던 총단에서 갑자기 절강에 들어온 무림인들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도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더 이상 두고 보다가는 절강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문 군사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전쟁에 어찰단까지 합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입된 무림인만이 아니라 저희들까지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 끝까지 저항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흑야신이 고개를 숙이자 담수련은 침중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여기로 온 이유는 뭐지요?”
“당시 가주님을 따르던 분타와 지가 사람들은 서로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절강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방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제가 속했던 무리는 남쪽으로 도망쳤는데, 서쪽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꽤 될 것입니다. 그리고…….”
“뭔 뜸을 들여요? 빨리 빨리 말해요.”
담수련은 담무룡의 생사 때문인지 조급함을 드러냈다.
“잠룡세가 소속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공격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공을 숨기고 낭인 행세를 하며 지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사파인 한 명과 의기투합하게 되어 금괴를 훔치기로 하고 그곳에 간 것입니다.”
담수련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잠룡세가라는 것이 알려지면 공격을 받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휴우~ 아버님,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기에…….’
누가 뭐래도 담무룡은 그녀에게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담무룡을 싫어한다면, 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요?”
“잠룡세가는 총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는 가주님의 천금으로서 정통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사방에 흩어진 세가 사람들을 모아 오겠습니다.”
“모아서 다시 잠룡세가를 세우자고요? 우리 이름만 들어도 공격을 받는다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지리멸렬한 것은 저희를 지도할 구심점이 없어서였습니다. 잠룡외단의 단원들도 아직 많이 살아 있습니다. 아가씨와 악…… 대협이라면 우리를 보호할 정도의 세력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잠룡세가의 외단 대주로 나름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살던 그는 요 몇 달간 낭인 생활을 하면서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천대와 무시 그리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마치 역병이라도 본 듯 피하는 사람들, 거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까지. 그는 자신이 조직에 몸을 담지 못한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받아 줄 조직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모두 죽이려 들 것이었다.
사실, 총단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잠룡세가의 외부세력들이 어찰단과 원나라 군부에 의해 해체되고 있을 때, 분타주와 지가주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주원인은 지휘할 사람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지위에 무공도 비슷하니 서로 자신이 지휘를 하려고 들었다.
중구난방으로 의견은 갈리고, 결국 사이까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악불군의 등장은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담수련이라는 정통성을 지닌 지휘자의 등장은 모두를 결속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연락은 가능한가요?”
“뿔뿔이 흩어지기는 했지만, 가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저희가 다시 모일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물론 점조직으로 만들어져 단기간에 모이기는 어렵지만, 두세 달 정도면 잠룡외단 소속 단원들 이삼백 명은 모을 수 있습니다.”
이삼백 명.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그 정도의 인원이라면 대단히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담수련의 머리가 쉴 새 없이 돌기 시작했다.
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나 잠룡세가가 아닌, 악불군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손해가 될 것인가였다.
“좋아요. 최대한 많이 모아서 저를 찾아오세요. 단 누구에게도 우리의 정체를 말하지는 마요. 만약 알려진다면 흑 대주가 배신한 것으로 간주할 테니까.”
담수련의 허락이 떨어지자 흑야신은 그대로 부복을 했다.
“절대 그런 일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아가씨를 가주님처럼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담수련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제 가 봐요.”
“그런데 모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천호무적검의 명성이 제법 알려졌으니, 찾으려 들면 못 찾을 리 없겠지요.”
* * *
“문 군사, 자꾸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면 저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지금 연이은 싸움에 모두 지쳐 있습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칭찬해 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세력은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잠룡세가의 정예 무력 집단은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심지어 그들은 한 번 나가면 모든 저항 세력을 평정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피해만 계속 커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칭찬할 만한 일이라는 말이 나오나요?”
문창현과 독대한 금잔화는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절강성은 중원의 정치 중심지인 장강 이북의 일곱 개 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의 오분지 일을 공급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하지만 주원장이 강소성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절강을 지키던 원나라의 군부도 버티지 못하고 강북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지금 절강을 지키는 세력은 잠룡세가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입되는 무림 세력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 갔고, 반대로 잠룡세가의 힘은 약해졌다.
“군주님, 병서에서 이르길 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가주님께서 본가를 이끌 때는 잠룡세가의 무력 집단을 보면 대부분 도망을 쳤습니다. 전력의 손실을 전혀 입지 않고도 그들을 제압하고 몰아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개 산적 놈들조차 저희를 보면 싸우려고 합니다. 지금 수하들은 계속되는 전투에 잠룡세가인이라는 자부심도 떨어졌고, 사기는 완전히 바닥입니다.”
문창현의 반박에 금잔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그녀에게 언성까지 높이며 반박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잔화는 문창현을 죽일 수는 없었다. 지금 그까지 사라진다면 잠룡세가는 말 그대로 공중 분해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군사, 군사가 하는 일이 뭐지요? 수하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투도 승리할 수 있도록 계획도 짜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은 못 느끼시나 봅니다.”
“군주님, 지금 본가에는 절대 고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약속하셨던 어찰단도 군주님만 보호할 뿐,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다 곧 합류할 것이라고 장담하셨던 태양천의 고수들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문창현의 이은 항변에 금잔화의 입이 닫혔다. 그 문제에 대해선 그녀로서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마음을 다스린 금잔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칸테무르 장군의 암살로 인해 여러 가지로 계획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곧 태양천에서 상당한 수의 고수들이 도착할 것이니 그것은 걱정 마세요.”
“고수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저희가 산계현에서 아무 소득 없이 물러난 이후, 점점 더 많은 무림인들이 절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절강성만큼 재원을 마련하기 좋은 곳은 없으니까요. 분타와 지가를 모조리 제거한 것이 통한의 자충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자가!’
분타와 지가를 없애라고 명을 내린 것은 그녀였다. 그러한 탓에, 지금 문창현의 말은 반박을 넘어 그녀를 성토하는 말이었다.
금잔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다시 토벌에 들어갈 겁니다. 이만 가서 준비하세요.”
금잔화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눴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자신할 수 없자, 결국 대화를 끝내고 말았다.
“문 군사를 그냥 제거해 버리시고 군주님께서 친정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창현이 나가자 금령사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며 말했다. 그도 대화를 들으며 화가 많이 난 듯했다.
“대공 전하께서 절강만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문창현은 제거할 수 없다.”
“하지만 저렇게 사사건건 군주님의 말에 토를 다니, 보는 제가 견디기 어렵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문창현 없이 내가 잠룡세가를 이끌기는 어렵다. 그것보다 태양천에서는 왜 아직 오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실행할 사람이 있어야 하거늘, 이렇게 자꾸 늦어지면 나도 버티기 어렵다.”
“지금 태양천의 고수들은 가장 다급한 곳으로 먼저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이 자꾸 밀리는 것은 그만큼 군주님을 대공 전하께서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아부는 듣기도 싫다. 그건 그렇고 내가 알아보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됐느냐?”
“방금 들어온 정보입니다. 악불군이 강서성으로 들어가고 있다 합니다.”
“강서성?”
“해남도에서 홍항으로 우회를 하는 바람에 종적을 놓쳤는데,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동선을 예측한 결과, 이번에도 악양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악양에 뭔가 있긴 있다는 말이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호남의 정보망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느냐?”
“기존 정보망은 전부 망가지고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협력 세력들이 모조리 등을 돌리면서 오히려 반란군 쪽으로 저희 쪽 첩자들이 변심하는 실정입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우리를 배신한 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일 것이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옥석을 가리게 될 거다.”
“저도 배신한 놈들에게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비상망밖에 없겠구나?”
“지금 상황이 많이 암담하기는 한 실정입니다.”
“악불군에 대한 감시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겠느냐?”
“그자가 마음먹고 숨는다면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사건을 일으키며 온다면, 놓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좋다. 만약 그가 여기에서 삼 일 거리에 도착한다면 내게 즉시 보고해라.”
“삼 일 거리라면 군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시려고요?”
“그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자의 무공이 소문대로라면 군주님이라도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설득을 위해서라면 제가 가겠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해서야 어떻게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가 대공 전하께서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물건도 찾고 그자의 능력도 우리 것으로 만든다면, 그거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아니겠느냐?”
처음 그녀는 자꾸 생각이 나는 악불군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발톱에 낀 때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중원의 신분 낮은 자를 자꾸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이란 것이 안 하고 싶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근래에는 자신이 악불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 터였다.
‘그래, 데려와서 내 심복을 만들어 내 옆에 두고 있다면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중얼거리던 그녀는, 또다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악불군의 얼굴이 생각이 나자 상념을 쫓아내려는 듯 급히 머리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