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70화>
170화. 광한궁(1)
“구천마성에서 광한궁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 소저는 아시나요?”
정소란은 담수련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악불군을 슬쩍 보더니 공손히 답을 했다.
“그들은 광한궁을 하부 조직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나쁜 놈들이군요!”
담수련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세력이 약한 여인만의 문파를 마도에서 하부 조직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만약 이들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음이 기다릴 것이고, 받아들인다고 한들 여인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마도의 하부 조직인 된다는 것은 거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궁주님 이하 본 궁의 모든 제자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좀 빨리 가라고 해야겠네요.”
“굳이 빨리 가라고 하지 않으셔도, 지금 이 속도면 오늘 중엔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통보한 날짜는 아직 이틀이 남아 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구천마성과 저희 사이엔 악연이 좀 많아요. 이번에 구천마성의 수하들을 몇 명 살려 보냈으니, 곧 우리 뒤를 따를 겁니다. 자칫하면 그들에 의해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마도인이나 사파인과의 약속은 믿을 것이 못 돼요. 안심하려면 그들이 정한 날짜보다 빨리 도착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정소란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듯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아가씨께서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다 대비를 하시는군요!”
“제가 여러 대비책을 잘 생각하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문제를 곳곳에서 만들고 있어서, 갈수록 적은 많아지고 있네요. 아마 악 대협은 불만이 많을지도 몰라요.”
담수련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동도 하지 않던 악불군이 눈을 뜨며 말했다.
“전 아가씨께 불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정말?”
“전 아가씨께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인정! 그래도 요새 내가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불만까지는 아니어도 찝찝한 생각은 조금은 들 것 같은데?”
“제가 아가씨께 조금이라도 안 좋은 생각을 가질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니, 아무 걱정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걱정은 하지?”
담수련이 이렇게 집요하게 묻는 이유.
그것은 악불군의 마음을 계속 확인하고 싶은 십칠 세 소녀의 마음이기도 했다.
“……걱정은 좀 합니다.”
“피! 알았어. 그만 쉬어.”
담수련은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살짝 머금고는 다시 정소란을 보며 말했다.
“내가 사고를 자꾸 쳐서 악 대협이 걱정을 좀 많이 해요. 그래서 내가 많이 미안하긴 해요.”
담수련의 말에 정소란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부러움이 나타났다.
악불군은 누가 보아도 잘생긴 얼굴에 큰 키, 거기다 쭉 빠진 날렵한 몸매까지 여인들이라면 누구라도 방심이 흔들릴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무림 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강력한 무공을 지닌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부드러움과 친절 그리고 배려까지 갖추고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까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스스럼없는 둘의 모습은 그녀까지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어떤 때는 완전 어린애 같으시고, 어떤 때는 섬뜩할 정도로 냉정해지시기도 하고…… 갈수록 변화가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으니 큰일이구나.’
담수련이 오랜만에 같은 여인을 만나고 기분이 좋은 듯하자 자신도 기분이 좋은 악불군이었다.
하나 담수련의 모습이 거의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가 되면 오음절맥의 부작용이 극에 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새편작의 얘기가 계속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감돌았다.
* * *
“궁주님. 아래 마을을 감시하던 제자에게 연락이 왔는데, 꽤 많은 무림인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광한궁의 궁주인 광한선자 고주렴은 장로인 구자경의 보고에 얼굴이 굳어졌다.
“소란에게는 아직 연락이 없느냐?”
“구천마성입니다. 그들이 수십 년간 모습을 감추었다고는 하지만, 복건과 광동의 무림 세력들에게는 여전히 공포의 존재입니다. 저희를 도와줄 세력이나 사람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구자경의 말에 광한선자는 힘겨운 표정으로 머리를 의자에 댔다.
“구 장로님.”
“예, 궁주님.”
“백 명이 넘는 제자들의 목숨이 내 결정에 달렸습니다. 사부님이시라면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요?”
구자경은 선대 궁주일 때부터 장로를 맡았던 광한궁 최고의 원로였다.
“전대 궁주님이셨어도 궁주님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 것입니다. 광한궁의 제자는 죽을지언정 치욕적인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저나 구 장로님은 살 만큼 살았잖아요. 하지만 제자들 중에는 아직 열다섯이 안 된 아이들도 꽤 있습니다. 궁주이기에 그 아이들의 꽃다운 목숨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까요?”
“광한궁의 제자가 된 이상 그 아이들 역시 궁주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힘을 합쳐 싸운다면 그들을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어떻게 막는다 해도 이 차, 삼 차 끊임없이 계속 공격을 할 겁니다.”
광한선자는 역대 광한궁주 중 가장 무공이 강하다는 말을 듣는 여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강했고, 꽃다운 나이의 제자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심히 갈등하게 하고 있었다.
절실할수록 도움의 가치는 더욱 커지는 법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들려온 외침 하나가 있었다.
“궁주님! 정소란 사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광한선자와 구자경의 눈이 번뜩 떠졌다. 그녀들이 아는 정소란은 도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면 돌아올 제자가 아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혼자 왔더냐?”
“마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래? 몇 명이나 같이 왔느냐?”
“그게……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많지 않다는 말에 구자경이 재촉하듯 물었다.
“정확하게 말해 보거라! 이십 명이야, 삼십 명이냐?”
“정문 경계를 하던 오현 사매의 말에 따르면 세 명 정도라고…….”
보고하던 제자도 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지 말끝을 흐릴 정도였다.
광한선자와 구자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구천마성과 싸운다면 최소한 이삼십 명의 일류급 고수가 필요했다. 그런데 세 명이라니……
“궁주님, 우선 나가 보시지요. 소란은 현명한 아이입니다. 저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황망한 표정을 보이는 광한선자를 보며 구자경이 말했다.
“그래요. 나가 보지요.”
* * *
“아가씨, 흑 대주께 저희의 정체를 알려 준 것이 잘한 일인지 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걱정돼?”
“걱정이 아니라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가주님께서 제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당부를 했을 때는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광한문에 도착하고 정소란이 내리자, 악불군은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나도 생각해 봤는데,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결과는 없다는 판단이 나왔어. 우선 중원 무림에 잠룡세가의 평판이 너무 안 좋은 상황에서 다시 세력을 모은다는 말이 돌면 공적이 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들이 합세한다고 해서 전력이 크게 느는 것도 아니고.”
악불군은 담수련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받아주겠다고 하신 겁니까?”
“아버님께서 중원인으로서 원나라에 협조를 했다는 것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으실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난 부역을 했다는 것보다는 그 이후의 행보가 더 문제였다고 봐. 나쁜 짓을 많이 하신 것 같아.”
“그것은 가주님의 판단이시고 그분의 인생입니다. 아가씨께서 자책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책 안 해. 그런데 잠룡세가의 식솔들은 어떨까? 흑야신 봤지? 대주의 직위에 있던 사람이 막다른 상황에 몰리니까 낭인 행세를 하다가, 결국 사파인들과 어울려 표물을 강탈한 계획에 가담까지 했어. 잠룡세가의 행위들이 정파인답지 않았으니까, 그들 역시 이대로 놔둔다면 모두 사파인이 될 거야.”
“그럼…….”
“응. 우리의 득실보다는, 그들을 안고 감으로써 사파인을 줄이는 거야. 그래야 양민들의 고통이 좀 덜어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들을 모아서 좋은 일을 한다면 잠룡세가가 벌인 죄에 대한 속죄도 좀 되지 않을까 싶고.”
“제가 아가씨를 너무 어리게 본 모양입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시다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담수련에게만 펼쳐지는 악불군의 아부에 담수련은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입술을 내밀었다.
‘갑자기 입술이 또 왜 나오시지?’
그녀의 입술이 나온다는 것은 뭔가 불만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녀가 그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소군.”
“예.”
“그럼 지금까지 나를 여자로 안 보고 어린애로 본 거야?”
악불군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리고 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잘한 것이냐…….’
하지만 그녀의 질문이 오묘해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른으로 안 보고 어린애로 본 거야?’라고 물었다면 쉽게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질문은 여자냐 어린애냐였다.
그때, 밖에서 귀도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악불군은 그 말을 듣자 살았다는 듯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도착한 모양입니다. 주위에 광한궁의 제자들이 많이 있는 것 같으니, 늦게 나가면 무례하게 비출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 답은 나중에 반드시 들을 거야.”
“예!”
담수련은 톡 쏘듯 말하자 악불군은 대답을 하며 마차 밖으로 나갔다.
“여자로 본 적이 없다는 말만 해 봐, 씨!”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린 담수련은 밖으로 나가자 눈이 살짝 커졌다.
백 명이 넘어 보이는 여인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상당히 초췌한 것이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담수련과 악불군이 나오자 공손히 인사를 한 정소란은, 광한선자와 구자경이 나오는 것을 보자 그 앞으로 달려가 부복을 하며 소리쳤다.
“제자 정소란, 궁주님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광한선자는 악불군과 담수련, 그리고 마부석에 여전히 앉아 있는 귀도신영을 보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 명이 모두 그녀보다도 무공이 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소란 역시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고생했다. 그런데 내가 말한 다른 문파들은 어찌 됐느냐?”
“세 곳을 갔는데 모두 저희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어떤 통고나 압박은 없었지만 모두 구천마성의 협박에 정신이 없어,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구천마성이 결국 복건성까지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을 시키기 위해 총 공세에 나선 모양이구나.”
광한선자는 광한궁과 협력 체제를 약속한 다른 문파들 역시 같은 상황이라는 말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 저분들은 여기에 어떻게 오신 것이냐?”
“본 궁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씀을 듣고 저희를 도와주려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곳이 어디인지, 저분들은 알고 오신 것이냐?”
구자경의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반응에 정소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구자경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악불군의 무공이라면 분명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제가 빨리 소개를 못 드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저 분은 천호무적검 악불군 대협이십니다. 제가 저분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천운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소란의 말에 광한선자와 구자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천호무적검의 명성은 이미 그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이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광한궁 같은 작은 문파를 도우러 온다는 것이 말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소란아,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저분이 누구시라고?”
광한선자는 희망을 느낀 듯, 몸까지 부르르 떨며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