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71화 (171/472)

<천검지애 171화>

171화. 광한궁(2)

“천호무적검 악불군 대협이십니다.”

“저, 정말이냐?”

악불군의 무용담은 이미 남쪽 무림에서는 전설이 되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소문이 퍼진 지 한 달이 겨우 넘어가는 시점에서 벌써 전설이 되었다는 것은, 천하가 얼마나 영웅의 등장에 목이 말라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예, 분명합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우리를 보자마자 말했어야지!”

광한선자는 질책하듯 말하고는 급히 악불군 앞으로 달려갔다.

“광한궁의 군주인 광한선자입니다. 악 대협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도움을 주기 위해 직접 오시다니, 정말 저희로서는 각골난망입니다.”

그녀의 말에는 진정으로 고마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광한궁의 장로인 구자경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구천마성 같은 큰 문파와 척을 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도움을 주신다고 하니, 저희로서는 감격할 따름입니다.”

구자경까지 너무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자 악불군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선배님들에 비하면 진짜 말학 후배일 따름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죽음을 각오한다 해도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는 것과 전혀 없는 것은 두려움의 강도에서 큰 차이를 주는 법이었다.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는데 살아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면 그 기쁨은 배가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광한궁의 제자들에게 천호무적검이라는 절대 고수의 등장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욱이 그 절대 고수가 궁주와 장로에게 예의까지 깍듯이 차린다면 그 믿음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천호무적검 악 대협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누군가의 선창이 떨어지자 주위에 있는 모든 제자들은 동시에 환영한다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게 자발적으로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명성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느끼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기 전에 소군을 반드시 천하제일 영웅으로 만들 거야.’

담수련은 광한궁까지 악불군이 무사히 보호한다면 십대 고수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아주 좋은 제자분을 두셨더군요. 좋은 제자는 좋은 문파에서만 나타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광한궁이 구천마성 같은 마도의 세력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본다면, 어찌 협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광한선자와 구자경은 악불군이 겸손하면서도 공손하기까지 하자 급히 주위를 보며 소리쳤다.

“무엇하는 거냐? 귀하신 분이 오셨다. 식사도 최고로 준비하고 편히 쉬실 곳도 빨리 마련하거라!”

“예!”

그러자 주위에 있던 제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 * *

“대주님, 통보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광한궁에서는 아직 답이 없느냐?”

“결사 항전할 태세라고 합니다.”

“이것들이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출동 준비해라. 오늘 너희들 마음껏 재미를 보게 해 주마!”

“예!”

구천마단의 대주 오황태의 말에 수하는 뭔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며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본 성이 좀 활동을 쉬었더니 이젠 별게 다 말을 안 듣는군.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너희들은 본 성의 재출도에 대한 본보기에 불과하니까.”

영온산장이나 광한궁은 전국적인 지명도가 전혀 없는 지역 문파에 불과했다. 구천마성은 말을 듣지 않을 곳들 몇 곳을 정해 승낙할 수 없는 요구를 한 후, 멸문을 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멸문하는 것을 보면 이후 다른 문파들은 알아서 굴복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 * *

“그럼 광한궁 역사가 육십 년이나 된 거군요?”

담수련이 천상신녀라는 것을 들은 광한선자와 구자경은 그녀에게도 대단히 공손하게 대했다.

“예, 원래 남쪽은 원나라에서 천민 대우를 했습니다. 치안도 형편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여자들은 어디 한번 움직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사방이 음적들이고 비적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부님께서 여인들도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며 광한궁을 세우셨습니다. 사부님께서 아미파 제자셨거든요.”

“정말 훌륭하신 분이네요.”

“어찰단이 원체 무림을 억압을 한 터라 정파라고 떠벌릴 수는 없었지만, 나름 고통받는 여인들을 돕고 때로는 비적들과 싸우면서 키워 왔습니다.”

“제가 보기에 구천마성이 예전의 세력권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천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남무림 전체를 삼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은 어떻게 돕는다 쳐도 우리가 떠난 후에 또다시 공격을 하면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세요? 아시다시피 구천마성은 그 세력이 큽니다.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거의 무제한일 거예요.”

순간, 둘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들 역시 그 문제를 계속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저희도 그게 걱정입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라면 어떤 방법이신지 알려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경청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방법은 아니에요. 영온산장 얘기는 들으셨나요?”

“아직 그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곳도 이곳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천마성에서 되도 않는 요구를 했어요…….”

담수련은 영온산장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광한선자는 구자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의견을 구한 것이다.

“잠시 피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봉문을 하라는 말인데, 사실 저희들은 재정도 약하고 봉문을 하면 갈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구자경은 광한궁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영온산장의 장주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더군요.”

“그래도 아가씨의 말을 따른 것을 보면 뭔가 방법이 더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음~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구천마성부터 우선 막아 낸 후에 다시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영온산장처럼 악불군의 밑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줄 수 있다는 말을 지금 한다면 그녀들은 단숨에 거절할 확률이 높았다.

담수련은 우선 이들이 악불군의 신위를 직접 본 후에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궁주님, 구천마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정소란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마도인들은 시간관념이 없다고 하던데 이들은 정확히 약속 시간을 맞춰 왔네요. 그래, 몇 명이나 몰려왔다고 하던가요?”

담수련의 말에 정소란은 공손히 답했다.

“최소한 백 명은 넘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면 조건을 준 것은 그냥 명분 쌓기고, 처음부터 광한궁의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나 보네요.”

담수련의 말에 모두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이제 나가 보지요. 괜히 놈들이 광한궁 제자들을 공격이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악불군이 일어서며 말하자 광한선자와 구자경도 급히 따라 일어났다. 비록 작은 문파라고는 하나 명색이 궁주이고 장로인 그녀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악불군의 무게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 * *

광한궁에 도착한 오황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광한궁이 문을 꼭 닫고서는 담과 지붕에서 그들이 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연무장까지 막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연무장에 도착한 후의 광경도 그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당연히 하나같이 겁에 질려 죽상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모두는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그들에게 겨냥하고 있었지만 공포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설마 그냥 항복하고 우리 요구대로 하부 조직으로 들어올 생각인가?’

오황태는 광한궁의 대전 쪽에서 구자경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고 있는 중년미부를 보자 음흉한 미소를 지며 소리쳤다.

“광한선자, 오늘 작정을 한 모양이네! 더 예뻐진 것 같으니 말이야? 하하하하!”

“저, 저놈이 감히!”

희롱하는 오황태의 말에 구자경이 분노하여 당장이라도 공격할 모습을 보이자, 광한선자는 손으로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오 대주, 우리가 벌써 말을 놓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예의가 없으시네요? 하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막나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마도인들이긴 하죠.”

오황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문을 활짝 열고 여기까지 아무도 막지 않아서 이제 본 성의 품에 안길 생각인가 했는데, 말하는 것을 보니 앙탈을 좀 부릴 생각인 모양이구나! 하하하! 하긴, 너무 순순히 안기는 것보다는 좀 앙탈을 부리는 여자들이 더 매력적이긴 하지.”

말하는 족족 희롱을 섞는 황태의 작태에, 광한궁의 모든 제자들의 얼굴에 비분강개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명령만 내리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태세였다.

‘저 자식! 사람 갈등하게 만드네?’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최대한 구슬려서 그냥 돌아가게 만들어 보라고 했다. 광한궁이 그녀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결국 그대로 떠나야 하는데, 여기서 이들을 모두 죽인다면 그 뒷감당을 광한궁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음마의 모습을 보이는 오황태의 야비한 말투가 그녀를 갈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가씨, 저자는 그냥 놔두면 세상에 해를 많이 끼칠 것 같은데요?]

그때 악불군의 전음을 받자 담수련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 미소를 지며 말했다.

[나하고 소군은 정말 일심동체(一心同體)인가 봐. 방금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

[원래 이럴 때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요?]

이어지는 악불군의 전음에 담수련의 입술이 살짝 삐져나왔다가는 들어갔다.

[내가 그런 단어 하나 뜻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 같아?]

[하하! 생각해 보니 일심동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그 짧은 시간에도 그녀의 입술을 보았는지 즉시 꼬리를 말고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됐네요! 그래도 광한궁의 안전이 달려 있으니까 우선은 달래 봐. 안 되면 그때 죽이고.]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 담수련은 자신의 이마를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수련아, 수련아! 망측하게 거기서 왜 일심동체가 나오는 거니……. 그런데 소군은 너무 눈치가 없어. 척 들으면 무슨 의미인지 탁 안 떠오르나?’

그때 광한선자와 구자경이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비칠비칠 물러났다. 무기를 든 채 대치하던 광한궁의 제자들 역시 사색이 되어 뒷걸음을 쳤다.

그녀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마기를 풍기는 노인 둘이 오황태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자, 장로님께서 이곳에 어쩐 일로?”

오황태는 두 노인을 보자 깜작 놀란 얼굴로 급히 허리를 숙였다. 구천마단의 수하들 역시 황급히 호리를 숙였다.

그들은 구천마성의 용형마검과 적환살조였다.

“요, 요, 용형마검!”

구자경이 두 노인 중 한 명을 아는 듯 중얼거렸다. 광한궁에서 가장 무공이 높은 그녀 역시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계집이 아직 있을 줄은 몰랐구나?”

용의 형상이 그려진 유난히 긴 장검을 들고 있던 노인은 구자경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며 물었다.

“예,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구자경의 나이도 이미 이순에 가까웠지만, 용형마검은 그녀보다 한 배분이 높은 마도의 고수였다.

“그럼 본 성에 대해서 좀 알 텐데?”

“알기 때문에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멸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냐?”

용형마검의 냉막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리자 구자경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궁주님,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악불군이 묻자 광한선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예, 저희가 능력이 모자라 대협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넌 뭐냐?”

용형마검은 악불군이 앞으로 나서자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저는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구천마성의 행사에 너무 억지가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억지? 어린놈이…… 지금 악불군이라고 했느냐?”

악불군의 말에 노한 듯 언성을 높이던 용형마검은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바꿨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놈이 천호무적검이겠구나?”

방금까지 광한궁을 손 안에든 공기돌처럼 가볍게 가지고 놀듯 하던 둘은 악불군의 정체를 알자 얼굴이 급격하게 신중하게 변했다.

전대의 마두들조차 명호만으로 긴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악불군의 무림에서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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