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72화>
172화. 광한궁(3)
악불군은 둘의 기가 날카로워지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적까지는 아니지만 과분한 명호를 받긴 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저를 추적해 오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용형마검과 적환살조는 광동 총단 소속으로, 홍항에 천호무적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받자 곧장 악불군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영온산장 사건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복건지단 소속인 잔양마도와 유혼추백이 따로 추적에 나선 것이다.
운이 나빴는지 뒤늦게 추적에 나선 유혼추백과 잔양마도가 악불군을 더 빨리 만나면서 먼저 황천으로 갔고,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악불군을 쫓던 중, 구천마성의 깃발을 발견하고 광한궁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이곳에서 천호무적검과 딱 마주칠 줄은 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너를 추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싸우려고 찾은 것은 아니다.”
“그럼 저와 친구라도 되시려고요?”
“성주님께서 네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다.”
순간, 악불군보다 담수련의 눈이 더 반짝했다.
구천마성의 성주는 일갑자 전부터 사대무황으로 불리던 절대마황이었다. 그는 눈에 거슬리면 그냥 죽이는 자였다.
그런 그가 악불군에게 물을 것이 있다는 의미는, 악불군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어보십시오.”
“구천마성과 너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 그런데 네게 이미 본 성의 많은 고수들이 죽었다. 이렇게까지 우리와 척을 지려는 이유가 뭐냐?”
“예전에도 지금도, 저는 구천마성과 척을 지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동안 벌어진 일도 대부분은 구천마성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와서 제 스스로를 지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너도 구천마성에 대적하지 않을 것이라 말이냐?”
“제가 구천마성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도 보다시피 광한궁과 저는 친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핍박을 하시니, 제가 끼어들지 않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영온산장도 친분이 있었다는 거냐?”
“당연합니다. 친분이 없는데, 굳이 구천마성 같은 대문파와 싸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잔양마도와 유혼추백은 왜 죽였느냐?”
“구천마성 분들은 좀 급하시더군요. 대화를 하기도 전에 죽이려고 드니, 저라고 한들 방법이 있겠습니까? 설마 제가 죽이려 드는 사람들까지 배려해 줄 정도로 착해 보이시지는 않겠지요?”
[이런 건방진 놈이 있나? 성주님 명만 아니었다면 당장 죽여 버리겠구만!]
옆에 있던 적환살조는 구천마성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악불군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실력의 장로와 호법들이 열 명 가까이 당한 지금, 덤벼들 자신은 없었다.
용형마검은 악불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본 성과 친구가 될 수도 있겠군?”
“저는 저와 생각이 같은 분들이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용의가 있습니다.”
마도의 절대 세력인 구천마성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악불군의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 붙은 ‘생각이 같다’는 단서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완곡한 거절임을 알 수 있었지만, 둘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
“좋다. 그럼 우리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너 역시 구천마성의 행사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그럼 광한궁이나 영온 산장을 괴롭히는 일도 그만두셔야겠지요? 저와 친분이 있는 분들을 괴롭힌다면 그건 저를 건드리는 일과 마찬가지니까요.”
용형마검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오황태를 보며 말했다.
“모두 철수해라.”
“예?”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철수하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광한궁은 건드리지 마라.”
구천마성에게 영온 산장이나 광한궁은 대주 정도만 보내도 언제든지 몰살시킬 수 있는, 한마디로 별거 아닌 문파들이었다.
그들 정도를 놔두는 것으로 악불군이 구천마성의 행사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들로서는 훨씬 이득이었다.
‘누구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속이 보이네. 그런데 어쩌지? 너희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텐데…….’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담수련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는 적들의 속셈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구천마성의 군사인 만통광심은 그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악불군을 죽이려면 상당한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원나라가 물러나면 무림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것은 뻔했다. 그런데 악불군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그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가는 구천마성의 대계에 큰 방해가 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잠시 봉합을 한다 해도, 원한은 백 배로 갚는 마도인들의 특성상 악불군을 그대로 둘 리는 만무했다.
아마 구천마성이 확실하게 자리를 굳히고 나면 그들은 아마 악불군을 죽이기 위해 총력을 다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잠시만요!”
광한궁의 제자들을 아깝다는 표정으로 한 번 흩어 본 오황태가 철수를 하라고 손짓을 하려는 순간, 담수련이 나섰다.
“뭐냐, 넌?”
“악 대협.”
“예.”
“저자는 당장 죽여.”
담수련이 오황태를 손으로 가리키는 순간, 악불군의 검이 그를 향해 그대로 날아갔다.
“컥!”
악불군의 검이 그의 목을 그대로 뚫고는 공중을 한 번 돌더니 악불군의 손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손으로 목을 잡은 오황태가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용형마검과 적환살조를 쳐다보더니 앞으로 고꾸라지자, 용형마검이 크게 소리쳤다.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방금 약속을 했거늘, 어찌 반각도 안 되어 약속을 깬단 말이냐!”
담수련이 당장 죽이라는 말에 오황태를 죽이기는 했지만 용형마검이 반발하자 악불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약속까지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두 분 선배님께서 약속이라고 하시니 우선 그렇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자는 약속 전에 이미 우리를 건드렸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깬 것은 아니지요.”
그냥 보낼까도 생각을 했지만, 오황태가 음탕한 눈으로 광한궁의 제자들을 보는 모습에, 담수련은 이미 그를 죽여야겠다 결정한 터였다.
“어떻게 건드렸다는 얘기냐?”
“두 분 선배님께서 오시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모르실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직접 입에 담기도 좀 민망하네요. 자, 이제 가셔도 됩니다. 얘기가 아주 잘된 것 같으니까요.”
담수련의 말에 용형마검과 적환살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하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으니 그 분노가 얼마나 클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본 악불군의 신묘한 수법은 그들이 더 이상 따지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날아든다 해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약속 전이라고 하니 방금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 하지만 또다시 본 성의 사람을 죽인다면 우리도 더 이상 참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야 서로 마찬가지지요. 구천마성에서도 악 대협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건드린다면 악 대협도 지금같이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으로 바꾸어, 구천마성의 행사를 일부러 찾아가서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가자!”
더 이상 버티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자, 용형마검은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와아!”
순간 광한궁의 제자들의 환호성이 궁을 덮었다. 구자경조차 기세만으로 뒷걸음치게 만든 초절정 마두들이 보는 앞에서 오황태까지 죽였건만 구천마성이 공격도 못 해 보고 그냥 물러난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악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은 본 궁의 천은을 베푼 은인이십니다.”
환호성이 멈추자 광한선자와 구자경은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감사를 전했다.
* * *
“공자님, 요즘 천호무적검에 대한 소문이 대단합니다.”
태극검자의 말에 백천학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시는지?”
“저희가 그를 만난 것이 석 달 정도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 정도 되긴 했지요.”
“그때 제가 느꼈던 무공 수위와 비교하면 지금 들려오는 소문은 너무 차이가 큽니다. 물론 당시 제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무공이 높았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분명 당시에는 저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보았습니다.”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는 잠시 악불군에 대해 반추했다. 그러고는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공자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특이하게 자신의 무공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지요. 하지만 공자님보다는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한 무공 상승이 가능할까요?”
“빈도의 알기로 정상적으로는 그런 급격한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떤 기연이 있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연이요?”
“천년성형하수오 같은 천고의 기물을 얻었다면 급격한 내공의 상승도 가능합니다.”
“단지 내공만 강해진 것으로 보기에는 지금 천호무적검이 보이는 활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단숨에 백 년 이상의 공력이 늘어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기연만으로 단숨에 그렇게 공력을 늘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무림인에 대한 무공담으로 먹고 사는 호사가들은 기연을 통해 순식간에 무적의 고수로 변한 영웅들의 얘기를 마치 진짜처럼 떠벌리기도 했다.
그런 얘기는 무공에 대해 모르는 양민들에게는 통쾌함과 상상력을 줄 수 있겠지만, 무림인들은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무적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 내공은 분명 아주 중요한 필요조건이었지만 절대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내공을 높여 주는 영약과 천고의 절기를 수록해 놓은 비급이 있다면 열에 아홉은 무조건 비급을 선택할 것이었다.
거기다 백 년 이상의 내공을 올릴 수 있는 천고의 기물을 섭취한다 해도, 꾸준한 운기조식과 수련이 없다면 그 약효는 모두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무당의 장삼봉 조사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무공이 두 배씩 늘었다고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으십니다. 천호무적검이 그동안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면 급격한 무공 상승이 설명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장삼봉 조사님께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종사이셨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빈도도 평생을 무공을 수련했지만 아직 한 번도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깨달음이라……?”
태극검자의 말을 되뇌인 백천학은 머리에 자신을 보던 담수련의 눈이 살짝 그려지자 검미를 좁혔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담수련의 모습을 흩트린 그는 신중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악불군을 영웅회에 가입시키는 문제를 간부회의에 상정해 주시겠습니까?”
“악불군은 사문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영웅회에서도 그에 대해 알아본 모양입니다. 하지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그에 대해 확인된 사실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신원이 확실치 않은 자를 영웅회에 가입시키는 것은 위험이 너무 큽니다. 빈도가 의견을 올린다 해도 허락이 떨어지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의 그동안 행적을 보면 정파인이 확실시되어 보이는데도 어려울까요?”
“공자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영웅회가 믿었던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했고, 그 탓에 어찰단에게 얼마나 많은 동지가 죽임을 당했는지를요.”
“만약 제가 보증을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공자님께서 보증을 선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될 경우 모든 책임을 공자님께서 지셔야 합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태극검자가 의아한 듯 묻자 백천학의 미간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간신히 흩트려 놓았던 담수련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이 문제는 좀 더 두고 보도록 하지요. 어쨌든 천호무적검의 동선과 그의 행동에 대한 감시는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극검자가 나가자 백천학은 한숨을 작게 내 쉬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심마라니……. 천학아, 정신 차려라.’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무엇보다도 강력해서 뿌리치는 것이 너무 어려움을, 그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