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73화 (173/472)

<천검지애 173화>

173화. 백인막(1)

광한궁을 떠난 지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귀도신영이 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마차를 움직인 덕분에, 전과 달리 그들 뒤를 따르는 자는 없었다.

“요즘은 귀찮게 하는 자들이 없어서 그런지, 진짜 여행이라도 하는 기분이야.”

마차의 창을 통해 주위 광경을 보며 담수련은 즐거운 듯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또 달라져 있었다. 그녀에게 처음 역용술을 전수해 준 귀도신영은, 그녀가 너무 빨리 습득을 하자 이제 자신보다도 더 빨리 얼굴을 바꾼다며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아가씨의 계획이 무엇인지 저도 좀 알 수 있겠습니까?”

“광한궁 때문에 그래?”

“영온 산장이나 광한궁은 중소 문파입니다. 그들을 끌어들여 봐야 구천마성이나 어찰단과 싸움 자체가 안 되는데, 굳이 그들을 수하로 받아들이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담수련이 지금 자신을 위해 초석을 다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악불군으로서는, 그녀의 행보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명분은 여론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 여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 주느냐에 달려 있는 거고. 그들의 전력은 싸움을 할 때는 큰 도움이 안 될지 몰라. 하지만 그런 문파가 백 개쯤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명분이나 여론이 저희에게 필요한가요?”

“소군도 잠룡세가가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 나야 핵심이니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지만 소군은 너무 억울하잖아?”

“전 그런 거 개의치 않습니다.”

“내가 싫거든! 난 소군이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

“존경은 믿을 만한 사람만이 받는 것입니다.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제 임무는 그저 아가씨를 지키고, 아가씨에게 무례하게 군 자를 징치하는 겁니다.”

‘이따금 보면 진짜 말 안 통해.’

신념에 찬 악불군의 말을 들으며, 담수련은 좋으면서도 안타까웠다.

“하여간에 소군은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따라줘.”

“그냥 궁금해서 물은 것뿐입니다. 전 아가씨께서 무엇을 하든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공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악불군의 귀로 마진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말하십시오.]

[본 막에서 사람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래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를 부르는 신호를 발견했습니다. 잠시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요즘 같이 한가한 때가 없으니 다녀오십시오. 어디로 가든 저희를 찾을 수는 있겠지요?]

[예,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누구? 마 대협?”

담수련은 악불군이 전음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고는 물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백인막에서 드디어 사람들이 온 모양이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가씨, 전음도 들으십니까?”

“내 실력으로 어떻게 전음을 들어? 평소 우리를 호위하는 데 집중하던 마 대협이 갑자기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하면 그 이유는 뻔한 거 아니야?”

“아가씨 말씀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요즘 아가씨의 머리는 도저히 저로서는 따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소군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고, 난 소군이 따를 수 없는 머리를 가지고 있고. 너무 완벽한 한 쌍 같지 않아? 이럴 때 천생연분이라고 한다던데?”

담수련은 자신이 말하고도 좀 부끄러운지 얼굴이 발개졌다.

하지만 악불군도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지, 토를 달지는 않았다.

* * *

“아직 못 찾았어?”

유빈루의 기녀인 선자홍은 하녀가 소청이 들어오자 급히 물었다.

“어찌나 잘 빠지시는지, 가고 나면 떠나고 가고 나면 떠나고 하네요. 하지만 동선 파악은 됐습니다.”

“어디로 가는 것 같더냐?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예.”

“하지만 그동안의 동선을 보면 수시로 방향을 바꿔서 추적자를 따돌리고 계시잖아?”

“그래서 오는 길에 기호를 곳곳에 그려 놓았습니다. 눈썰미가 아주 좋다고 하셨으니까 분명 보실 겁니다.”

“그럼,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네.”

악불군을 나타났다 해서 당장 가서 만날 수는 없었다. 사방에 어떤 눈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가씨.”

“왜?”

“악 대협이란 분 진짜 잘생기셨대요!”

“나도 소문은 들었다. 그런 분과 운우지락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평생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더구나 언제나 옆에 있다는 천상신녀란 분은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녔다고 하던데, 우리 같은 얼굴이 눈에 차기나 하겠느냐?”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가씨, 그냥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것은 해도 되지 않을까요?”

소청의 말에 선자홍은 쓴웃음을 지었다.

근래 남무림에서 모든 여인의 선망의 대상은 악불군이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의 무용담은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기 충분했다.

더욱이 그렇게 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덩치가 크고 얼굴이 우락부락한 법이건만, 악불군은 얼굴까지 반안이 무색할 정도로 잘생겼다고 소문이 났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기를 소원하는 여인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것까지야 그분인들 아시겠느냐?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분이 나타나면 빨리 보고하거라.”

“지금 사방에서 잘생긴 남자하고 예쁜 여자만 나타나면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기녀들이 주축이 된 천화궁은 생각 외로 방도가 상당히 많았다.

소청이 나가자 선자홍은 창가로 다가갔다.

‘어떤 분이실까……?’

소청에게는 쓸데없는 생각 말라고 주의를 준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악불군에 대해 일어나는 호기심을 누를 수는 없었다.

* * *

마진우와 구여풍이 도착한 곳은 산 깊숙한 곳에 지어진 관묘였다.

“굉장히 많이 왔네?”

마진우는 주위에 최소한 오십 명 가까운 살수들이 숨어 있는 것을 느끼자 의외라는 듯 구여풍에게 말했다.

“사 호, 구 호! 신수가 아주 좋아졌구나?”

그때 그의 앞에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이 호, 한 달이 넘게 숨어서 누구를 따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면서 그런 말을 나오냐? 내겐 우리를 약 올리는 말로 들린다.”

“그러게 말이다. 분명 대단히 힘든 일인데 신수는 오히려 훤해졌으니 신기하지 않느냐?”

“정말 그렇게 보이냐?”

“안으로 들어가 봐라. 아마 막주님께서도 너희를 보면 의아해하실 게다.”

“막주님께서 직접 오셨다는 거냐?”

마진우와 구여풍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백인막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직접 봐야 한다며 오셨다.”

마진우와 구여풍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났다. 그들이 아는 막주는 언제나 장막에 숨어 그들에게 명령만 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인 걸 보면 이번 일을 그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관묘 안으로 들어선 마진우와 구여풍은 부막주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 포권을 했다.

막주와 부막주가 동시에 외유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 호, 막주님을 뵙습니다.”

“구 호, 막주님을 빕습니다.”

“너희들이 올린 보고서는 잘 읽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막주님과 부막주님께서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나라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그들이 믿을 곳은 태양천과 어사대뿐인데, 군부가 돕지 않는 이상 그들만으로 다시 궐기하기 시작한 중원 무림의 힘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정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까?”

“영웅회가 부역한 무림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 있다.”

“본 막에 대한 추적도 시작된 것입니까?”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살수 조직을 싫어하는 정파에서 본 막을 그냥 둘 리는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막주는 부막주 기정경을 보았다.

그러자 기정경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오다 들으니 천호무적검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더구나.”

“남무림에서는 따를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아보니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더구나.”

“무슨 문제이신지요?”

“금령군주가 그들에게 대한 청부를 우리에게 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직접 살행을 나갔으니 알고 있을 게다.”

“예, 알고 있습니다.”

“천호무적검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곳은 절강이었다. 그리고 지금 잠룡세가는 금령군주에 의해 장악된 것이 확인됐다.”

기정경의 말에 마진우는 구여풍을 한 번 보더니 반문했다.

“천호무적검과 천상신녀 두 분이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그 둘도 결국은 중원 무림에게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부역자가 된다.”

그러자 구여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이미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희에게는 더욱 안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너 알고 있었어?”

마진우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만 했다는 말이다.”

“구 호 너라면 그런 생각할 만은 하지. 그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두 분이 진짜 정파라면 중원 무림인들의 강압에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처지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에게 세력이 전혀 없다는 거다. 어떤 고수도 혼자서 천하를 상대할 수는 없다.”

“전 생각이 다릅니다. 며칠 전, 구천마성에서 공자님께 화해를 청해 왔습니다. 이미 제가 본 것만으로도 구천마성의 장로와 호법이 열 명 이상이 죽고, 수하들은 거의 백 명의 사상자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화해를 청했습니다. 전 그분이라면 천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겨우 한 달 사이에 그분의 밑으로 들어간 문파가 여러 개입니다. 비록 각 문파의 전력은 본 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공자님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전 대단하고 생각합니다.”

마진우까지 부언을 하자 백인막주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내용보다 그들의 호칭에 그는 관심이 더 간 듯했다.

“우리들만 있는 자리에서 그분이니 공자님이니 극존칭을 하는 것을 보니, 너희 둘은 완전히 그에게 승복을 한 모양이구나?”

백인막주의 반문에 마진우와 구여풍은 약간 당황한 듯 즉답을 하지 못했다. 잘못 대답하는 순간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 호는 누구에게 쉽게 머리를 숙이는 놈이 아니고, 구 호는 아주 신중한 성격인데, 내 앞에서까지 경외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확실히 천호무적검이 다른 자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인데…….’

그때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일 호가 입을 열었다.

“막주님, 제가 직접 가서 만나 보겠습니다.”

백인막은 대외적으로 백 명의 살수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중 일 호부터 이십 호까지는 백인막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특급 살수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일 호부터 십 호까지는 초특급살수로 분류가 되고 있었는데, 특히 일 호는 그 열 명의 초특급 살수 중에서도 아주 특별했다. 나머지 아홉 명이 합세를 해야 그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백인막주는 신중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일 호부터 십 호까지 전부 가라. 시간은 열흘이다. 그 안에 너희들이 결정하면 나도 너희들의 의견을 따라주겠다.”

“막주님, 그건…….”

부막주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인막에서 막주는 모든 살수들의 사부나 마찬가지여서 그 권위가 대단했다.

그런데 백인막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결정을 직접 하지 않고 수하들에게 맡긴 것은 전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막주의 손짓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난 이제 많이 늙었다. 이번 결정은 너희를 살리기 위한 것이지, 내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개성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거기다 성격까지 판이하지. 그가 이렇게 다른 너희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지 두고보려 한다. 가 봐라.”

막주의 명이 떨어지자 열 명의 모습이 스르르 사라졌다.

이들과 악불군의 만남이 향후 무림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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