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75화 (175/472)

<천검지애 175화>

175화. 천화궁(1)

“소군하고 나, 단둘이만 배를 타니까 진짜 좋다.”

악불군은 담수련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십인용의 큰 배를 원했지만, 둘이 타면서 그런 큰 배가 빌리는 것은 낭비라는 담수련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두 명밖에 탈 수 없는 가장 작은 배를 빌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차이는 동전 열 닢에 불과했다.

“좋으십니까?”

“응, 좋아. 사실 이런 장면을 많이 상상했거든.”

담수련은 노를 젓는 악불군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아가씨께서 이런 작은 배를 타고 풍광을 구경하는 것을 이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소를 지며 말하던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담수련의 입술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소군은 내가 배 타고 풍광을 구경해서 좋아한다고 생각해?”

“하하~ 그건…….”

뭔지 모르지만 자신의 말이 담수련이 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직감한 악불군은 어색한 웃음을 지며 말을 얼버무렸다.

“화제 바꾸고 싶지?”

“예?”

“내가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소군은 말을 돌리잖아?”

“제가요?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해?”

“경치도 좋고 또…… 날씨도…….”

담수련의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말을 이어 가던 악불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우우우우웅!

갑자기 호수 전체를 덮는 신비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이거 고노가 말한 호수가 울면 낸다는 소리 아닐까요?”

악불군은 재빨리 좌우를 둘러보며 말을 돌렸다. 확실히 악불군에게는 운이 따르기는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담수련과 확실하게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놓치는 의미도 있었으니, 운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씨~ 무작위로 소리가 난다면서 왜 하필 지금 나는 거야? 그런데 신기하긴 하네? 그냥 나는 소리가 아니고 마치 음악 같아. 어디서 나는 소리지?’

그녀는 드디어 악불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려 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름 긴장하고 있었건만, 뜻하지 않은 상황에 결국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그녀도 주위를 살폈다. 그때 잠시 멈췄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우우우웅!

“저기 절벽 사이에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위기 같지 않은 위기에서 벗어난 악불군은 호수 중앙에 세워진 돌산 사이의 절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 보자.”

담수련은 금방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악불군은 금방 변한 담수련이 너무 귀여운 듯 미소를 짓더니 힘차게 노를 저었다.

“하여간 자연의 신비는 인간으로서는 따를 수 없어. 어떻게 이렇게 커다란 피리를 만들었을까?”

절벽 사이로 들어선 담수련은 절벽을 흥미롭게 살피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신비스러움을 주는 명호가 우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낸 듯했다.

“피리요?”

“응,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네. 절벽 사이사이에 구멍들 보여?”

“예, 보입니다.”

“저 구멍들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교묘하게 피리의 구멍들과 그 비율이 똑같아. 이곳은 계곡을 이루고 있어서 바람이 여기를 지날 때 강해질 거야. 그때 저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가면 소리가 나는 거지.”

“정말 우연이라 보기에는 참 신기하군요. 그냥 소리가 아니라 마치 음악의 선율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 저게 우연이라면 정말 신기한 일이지.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어떨까?”

“우연이 아니라고요?”

“소군, 지필묵 있지?”

“예.”

“줘봐.”

악불군은 품에서 종이와 붓 그리고 조그만 용기에 넣어다니는 먹물을 꺼냈다.

“전에 나를 안고 공중으로 뜬 적 있었지?”

“예.”

“그거 또 할 수 있어?”

“할 수는 있지만, 뭘 하시려고요?”

“아무리 자연의 신비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저 많은 구멍이 정확하게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것은 믿기 어려워. 나 좀 안고 공중으로 올라가 봐.”

악불군은 의아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거절할 그가 아니었다.

“여기서 멈춰.”

약 칠 장가량 떠오르자 담수련은 멈추게 했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얼마 정도 버틸 수 있어?”

“계속 떠오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곳에 그냥 멈춰야 한다면 일각 이상은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말을 마친 담수련은 종이에다 길쭉한 타원형을 두 개 그리더니, 구멍들이 만들어진 지점을 원형 안에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멍은 피리와는 달리 수십 개가 형성되어 있어서, 원형 안은 곧 수십 개의 점으로 덮여 버렸다.

“이제 내려가자.”

“예.”

대답한 악불군이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오자 갑자기 사방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공중에 떠 있으니, 놀잇배를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를 멈춘 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불군이 다시 배로 내려오자 절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악불군이 사람이 아닌 천인이나 신인으로 본 것이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게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은 어차피 다 보고 있을 거야. 오히려 지금 우리 행동으로 유모가 보낸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을 모르고, 이 바위를 보러 온 것으로 생각해서 바위만 열심히 조사할걸?”

“아가씨 말씀을 들어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군.”

“예.”

“사화가 소군이 너무 무표정하고 말투가 딱딱해서 무섭다고 그랬거든.”

“사화가요? 그렇게까지 무섭게 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니야, 내가 들어도 좀 너무 사무적일 때가 많았어. 그런데 요즘은 소군의 말이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꿀을 먹는 듯 달콤하기까지 하단 말이야. 그런데 옛말에 쓴 약이 몸에 좋다며, 귀에 들리는 말이 너무 달콤하면 위험하다고 했거든.”

“그럼 이제 저도 좀 쓰게 얘기할까요?”

“아니! 난 지금이 너무 좋아. 무조건 칭찬해 주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좋아.”

“아가씨, 전 아무리 아가씨라 해도 무조건 칭찬은 못합니다. 칭찬할 만하니까 칭찬하는 것이지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소군한테는 칭찬만 받았는데?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다는 것이 가능해?”

“아마 저라면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껏 아가씨께선 칭찬받을 만한 행동만 하셨습니다.”

“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그녀도 알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행복의 표정이 떠오르자 악불군의 얼굴에도 행복의 표정이 떠올랐다. 누군가 지금 둘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녀 말대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전 천화궁의 제자입니다. 제가 왜 연락을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때 악불군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아가씨, 연락이 왔습니다.”

“뭐래?”

“천화궁 제자인데, 왜 연락을 했는지 아느냐고 묻는군요.”

“만약을 위해 확인을 하는 거네. 종리 단주님을 찾는다고 말해 줘.”

“예.”

[우린 지금 종리 단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선자홍은 확인이 끝나자 다시 말했다.

[지금 사람들의 이목을 끄시는 바람에 직접적으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 보시면 기원루라는 기루의 놀잇배가 보이실 겁니다. 제가 선두에 서 있다가 대협께서 오시면 종리 단주님께서 보내시는 서찰을 슬쩍 떨어뜨리겠습니다. 그것을 가져가십시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담수련을 앞에 앉히고는 노를 잡았다.

“좀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소청의 보필을 받으며 작은 종이우산을 쓴 선자홍이 선두에서 서서 오가는 배의 남자들을 향해 고혹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기루에서 손님을 모으기 위해 벌이는 광고 같은 것으로, 명호에서는 많은 기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배를 타고 나와 남자들을 유혹했다.

일도 하지 않고 낮에 기녀들과 놀잇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눈이 나룻배를 몰고 오는 악불군에게 쏠려 있었다. 무림인들이 하늘을 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지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처음 본 그들로서는 실로 평생 자랑할 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악불군이 다가오자 몇몇 배는 겁을 먹은 듯 물러났지만, 몇몇 배는 오히려 기녀들이 배 난간으로 다가와 악불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추파를 던졌다.

심지어 ‘공자님! 공자님!’ 하며 부르는 기녀들도 있었다.

하늘까지 나는 사람이 나이도 젊고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기녀들에게는 말 그대로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아가씨, 오고 계세요! 와~ 진짜 잘생기셨다. 저렇게 잘생기신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소청은 악불군이 자신들의 배 있는 쪽으로 오자 신나서 말했다.

“아직 정면 얼굴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아?”

노를 젓는 악불군은 그녀들에게는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저런 뒤태를 가지신 분이 못 생겼을 리가 없잖아요.”

소청의 말에 선자홍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악불군이 얼굴을 뒤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소청의 말대로 단숨에 그녀를 몽롱하게 할 정도로 잘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떨어뜨리십시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선자홍은 악불군의 전음을 받자 정신이 든 듯, 자연스럽게 종이 하나를 배 아래로 떨어뜨렸다. 물 위로 떨어진 종이는 스르르 악불군의 배까지 흘러가더니 그의 손에 들어갔다.

종리화의 서찰을 손에 넣은 악불군은 다른 배들도 한 번씩 눈길을 줬다. 선자홍만 보고 간다면 담수련 같이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당장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 기루 이름이 쓰인 배들이 이렇게 많지?”

담수련은 기녀들이 악불군에게 공자님 공자님 하면서 추파를 던지는 것이 약간 불만스러웠다.

“글쎄요? 저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런데 소군 너무 인기가 좋은 것 같지 않아?”

“제가 인기가 좋았습니까?”

“저 예쁜 기녀들이 전부 소군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잖아?”

“제가 아니라 아가씨를 보고 지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들이 왜 여자를 보고 좋아해?”

“지금 아가씨는 아주 잘생긴 남자이지 않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악불군을 향해 그런 것 같은데, 막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심심하지 않겠는가……

“소군은 기방에 가 본 적 있어?”

“전 기방이 뭔지도 모릅니다. 아가씨는 아십니까?”

“응……? 나야 당연히 모르지. 거긴 남자들만 가는 데라던데?”

“전 남자들만 가는 곳은 무조건 싫습니다.”

“왜?”

“아가씨가 없지 않습니까?”

악불군은 호위를 못한다는 의미였지만 너무 짧게 말했다.

담수련은 해석을 좀 다르게 한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며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보면 아기씨 때보다 더 어린애 같으시다니까.’

얼굴이 살짝 발개져서 고개를 숙인 담수련을 보며 악불군도 기분이 좋은 미소를 그렸다.

애늙은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자신의 속마음을 전혀 표정에 나타내지 않고, 말도 거의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유 없이 삐치고 자꾸 따지는 일이 빈번했다.

사랑을 알게 된 소녀의 투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불군은 여전히 오음절맥의 부작용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 *

일 호는 물론 열 명의 백인막 살수들은 악불군이 공중으로 뜨는 것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들이 은잠술부터 온갖 살법은 다 배웠지만, 악불군처럼 공중에 떠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어떤 술법이나 초식이 아닌 오로지 내공으로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저자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이 호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물어보냐? 하지만 이립은 절대 안 넘은 것 같더라.”

“이립도 안 됐는데 저런 내공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솔직히 난 겉보기에는 내공이 삼십 년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는 것이 더 놀랍다.”

삼 호 역시 상당히 놀란 듯 목소리까지 흥분이 되어 있었다. 그의 무공담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 있어서 그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내공까지 저렇게 높다면 마진우 말대로 자신들이 돕는다면 천하와도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 호, 저분 경고, 우습게 듣지 마라. 괜한 시험 따위 하려다가 진짜 죽는다.”

그때 일 호를 보고 있던 마진우는, 그가 한마디도 꺼내지 않자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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