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76화>
176화. 천화궁(2)
일 호는 마진우를 흘깃 보며 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는 무공도 높으면서 우리를 아우를 수 있는 지도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시험을 했는데 저자가 죽는다면 그걸로 자격이 없단 의미고, 그렇다고 내가 죽는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의탁할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일 호, 우리가 무공만 높아서 저분을 추천할 줄 아느냐? 저 나이에 저런 무공을 지닌다면 오만함이 하늘을 찔러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저분은 정말 겸손했다. 심지어 양민들에게조차 존중하며 예의를 차린다. 하지만 남을 괴롭히거나 강하게 나오는 자에게는 조금의 용서도 없어.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성정을 가지신 분이시지. 난 내 눈을 믿는다.”
일 호의 말을 듣던 구여풍이 갑자기 끼어들자, 모두는 놀란 듯 쳐다보았다. 그는 열 명 중에서 무공이 약한 편에 속해 구 호로 불렸지만, 아주 신중하면서도 상황 판단을 잘해서 같이 살행을 나갈 경우 모두 그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해 남들에 대한 평가에 무척 인색했다. 그런 그가 지금 ‘나 저분 존경한다.’라는 마음을 말에서 그대로 풍기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우선 우리들을 소개 시켜 줘라. 가까운 곳에서 직접 느껴 보면 너희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겠지.”
오 호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막주가 열흘이라는 시간을 준 것은 나름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 호는 다시 악불군이 탄 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다른 살수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형산 쪽으로 오라고 하네?”
서찰은 암호문으로 쓰여 있어 담수련과 악불군 외에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형산이면 악양에서 꽤 먼데, 사화는 어떻게 하지요?”
“사화하고도 연락이 됐다고 쓰여 있어. 뭔가 조치를 취하셨겠지.”
말하는 담수련의 표정이 약간 어둡자 악불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솔직히 난 유모는 많이 보고 싶은데, 막상 만나는 것은 좀 두려워.”
“종리 단주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두렵다니요?”
“유모는 아버님 말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시는 분이야. 난 아버님께서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 하시는지 몰라서, 그게 두려워.”
“가주님의 아가씨에 대한 사랑은 제가 잘 압니다. 절대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을 시키실 분이 아닙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소군이야.’
담수련은 담무룡이 악불군의 무공이 일취월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담무룡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파란 호수를 바라보던 담수련은 결정한 듯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소군은 내 말이 그 무엇보다 먼저라고 했지?”
“당연하지요.”
“그럼 아버님 명령하고 내 말하고 어디를 따를 거야?”
“전 가주님께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아가씨이지 가주님이 아닙니다. 전 아가씨 말만 따릅니다.”
“그럼 유모가 어떤 명령을 하든, 우선 내게 물어보고 대답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소군이 너무 고지식한 것을 아니까 그래.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아버님께서 시켰다고 하면 무조건 내게 먼저 물어보고 나서 할지 안 할지 결정해.”
악불군은 담수련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걱정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녀의 자신에 대한 마음이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악불군이 얼굴에 미소를 그리자, 담수련은 가슴이 또 뛰면서 얼굴이 뜨거워져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심각한 생각을 하는데 왜 이러는 거야? 난 그저 소군이 참 멋있다는 생각밖에 안 했는데…….’
근래 증상이 좀 나아진 듯해서 빙설초 덕인 줄 알았는데,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아니,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유난히 뛰고 있었다.
* * *
“언니, 드디어 아가씨하고 연락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디냐?”
“강서성이에요. 그곳 단주인 선자홍이 아가씨와 소군을 만났다고 합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천호무적검이 소군이었어요.”
천호무적검이 악불군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잠룡세가를 떠날 때와 너무 다른 무공에 약간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종리화는, 천화궁주의 말에 너무 기뻤다. 그런데 천화궁주가 자신보다 더 흥분한 것 같자 미소를 지며 말했다.
“네가 더 좋아하는 것 같구나?”
“소군의 명성이 악양을 떠날 때하고 완전히 달라요. 이제 호남과 안휘까지 천호무적검이 십대고수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왜 좋냐고?”
“우리 기녀들은 영웅을 원래 좋아해요.”
“젊은 애들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넌 아니잖아?”
“내가 뭐 어때서요? 언니보다 제가 다섯 살이나 어리거든요!”
“소군보다는 스무 살이나 많지.”
“아직도 밤에는 사람들이 저를 스무 살 정도로 봐요.”
“그래서 네가 소군을 유혹이라도 해 보겠다는 거야?”
“제가 비록 극강의 동안(童顔)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염치가 없는 여자는 아니에요. 그래도 평생 만나 보지 못한 영웅을 지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담무룡 그분을 봤잖아?”
“가주님이야 언니한테나 영웅이지요. 제게는 솔직히 효웅으로 보였거든요. 전 효웅은 싫어해요.”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의 얼굴에 쓴웃음이 나타났다. 그러나 반박할 말을 마땅히 찾을 수도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쯤 이곳에 도착할 것 같더냐?”
“아무런 방해 없이 온다면 열흘 안에 도착할 것 같긴 한데, 쉽게 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무슨 정보가 들어온 것이 있어?”
“어찌 된 일인지 천호무적검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문이 다 퍼졌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 같은데, 전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왜?”
“언니는 아가씨께서 어떤 삶을 사실 것 같으세요?”
“무슨 의미냐?”
“무림의 배신자, 원나라에 부역하며 중원인들을 학살한 오룡세가 중에서도 가장 미움을 받는 곳이 잠룡세가예요. 그곳의 천금인 아가씨를 무림이 용서할까요?”
“그래서 지금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가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냐?”
“지금 오룡세가가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는, 그때 보고를 들으셨으니 아시고 계시죠?”
종리화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오룡세가는 지금 혼돈의 세계에게 살아남기 위해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화룡세가는 총단을 강서성으로 옮기고 세가의 이름까지 버리면서 문파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성공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위치한 지역상 오 할의 확률은 바라볼 수 있었다.
마룡세가는 새외로 아예 옮길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새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혈해사계를 없애야 하는데, 천화궁주는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철룡세가는 어차피 징기스칸의 자손들이 세웠으니 원나라가 패퇴한다면 같이 후퇴할 것이 확실했다.
남은 두 곳은 잠룡세가와 태룡세가였다. 그들은 중원의 핵심인 절강과 사천에 총단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옮길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은 역시 잠룡세가였다. 아직 모든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태룡세가는 버텨 내기만 한다면 멸문까지는 안 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담무룡이 나름 준비를 하긴 했지만, 잠룡세가의 원래 전력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중원 무림이 다시 천하의 주도권을 잡는다면, 담수운과 담수련은 제거 일 순위에 오를 것은 명약관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주님께서도 두 분이 버틸 수 있도록, 비빌 언덕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겠느냐?”
“남자들이 다른 곳은 몰라도 기방에서만은 상당히 떠벌리지요. 대부분은 허풍인 경우가 많지만 여러 말을 취합해 보면 대략 정확한 정보가 나와요. 지금 원나라가 패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지금 중원 무림은 그동안 축적된 힘이 굉장해요. 그게 지금 분출되고 있는 중이라는 거지요. 그 비빌 언덕이라는 것이 단단한 언덕이 아니라 그냥 모래를 쌓아 놓은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예서령, 가주님은 그렇게 허술하게 준비하시는 분이 아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군 같은 고수를 준비해 놓으셨을 줄은 솔직히 저도 몰랐거든요.”
‘……아니야……. 이건 분명 돌발 상황이야…….’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아는 담무룡은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산하여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보다 강한 자는 절대 키우지 않는 자이기도 했다. 주인보다 강한 수하는 반드시 배신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악불군의 무공이 저렇게 강해진 게 담무룡의 계산에 없던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군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 우선 아가씨와 소군을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중얼거리는 종리화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는 않았다.
* * *
“소군, 왜 그랬어?”
“뭐가 말입니까?”
“그들의 조건을 허락했잖아?”
“아가씨께서 그들을 수하로 들이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원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소군의 안전이 내겐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몰라?”
명호를 떠나고 한적한 장소에 도착한 악불군은 백인막의 살수들과 첫 인사를 했다.
그때 일 호가 악불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마진우와 구여풍 간에 맺은 계약이 아니라 백인막 전체가 악불군을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지 못한 그의 제안에 악불군은 듣지도 않고 단번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담수련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가 보기에 백인막을 수하로 받아들인다면 영온산장이나 광한궁 같은 중소 문파 이십 개 이상을 받아들인 것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단번에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의 제안이었다.
일 호는 열흘간에 걸쳐 악불군에게 암살 시도를 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단지 시험이 아니라 진짜 살행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혼자가 아니라 열 명이 합공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따른 조건이 악불군은 그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담수련은 그 조건만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악불군이 다칠 수 있는 작은 상황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눈을 주시하더니 미소를 지며 말했다.
“아가씨.”
“응?”
“그렇게 제가 걱정이 되십니까?”
“그럼! 내가 거의 매일 밤마다 소군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매일 밤 걱정하십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의 반문에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말하다 보니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급히 무마에 들어갔다.
“으응? 아니 그게 매일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고, 소군이 뭐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하고 있나 그런 생각도…….”
말하던 담수련은 인상을 구기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 걱정을 변명하면서 오히려 더 이상한 말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 게 궁금하시면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전 밤이 되면 하는 거 별거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편안하게 계신가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게 대부분이지요. 생각도 오로지 아가씨 생각만 하니까 궁금해하실 거 없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담수련의 입이 살짝 나왔다.
그녀는 너무 속보이는 말을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움에 얼굴에서 열이 날 정도인데, 악불군은 너무 태연하게 자신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날 전혀 여자로는 보지 않나 봐.’
사실 악불군의 대답은 어쩌면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한다지 않은가……
그녀는 악불군에게 어떤 말이 나오기를 원하는 걸까?
그때 악불군의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백인막 살수들? 아니야, 이건 그들이 아니야…….’
중얼대던 악불군이 갑자기 마차의 앞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마차를 몰던 괴도신영을 잡아 뒤로 던짐과 동시에, 담수련을 안고는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