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78화 (178/472)

<천검지애 178화>

178화. 철뇌마궁(2)

일 호의 뜻을 가장 지지하던 육 호가 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애병인 혈단궁 때문이었다.

혈단궁은 명장이 만든 활로, 그 신축성과 튼튼함은 평범한 각궁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삼백 장이나 되는 거리를 날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지로 그는 혈단궁으로 많은 살행을 저질렀지만 대부분의 거리는 오십 장 이내였다. 백 장만 넘어도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혈단궁으로 삼백 장이나 먼 거리에 있는 철뇌마궁 같은 고수를 물러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악불군의 무공이 그들과는 차원을 달리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무공은 분명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 막주님께서는 천호무적검이 구천마성과 어찰단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하셨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태양천의 고수가 다짜고짜 공격을 했다. 무슨 의미 같으냐?”

“태양천 역시 천호무적검을 노리고 있다는 말 아니겠냐?”

“그냥 노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원나라가 밀리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철뇌마궁 같은 원로를 먼 강서성까지 보낸다는 것은 반드시 제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 백인막을 보호하기 위해 택한 천호무적검으로 인해 우리의 멸문이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 호의 말에 나름 타당성이 있었다.

무수한 정파인들과 원한을 맺은 탓에 지금 보호막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그 보호막이 더 많은 세력과 원한이 있다면, 시쳇말로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이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백인막이 남의 밑에 들어갈 생각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목숨이 두려워서 그런 거는 아니지 않냐?”

구여풍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간단한 것인지는 살수를 하면서 이미 깨달은 지 오래다.”

사 호가 말을 받았다.

“그럼 왜 막주님께서는 이런 비굴한 생각을 하셨다고 생각하냐? 쳐들어오면 싸우다 죽으면 그뿐이고, 하다못해 숨어서 지내며 청부 들어온 것만 조금씩 받아도 우리 생활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지 않느냐?”

구여풍의 말에 모두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에게는 사부나 마찬가지이자 신 같은 존재이기에 그냥 말을 따랐을 뿐이었지만, 막상 구여풍의 말을 들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넌 막주님께서 이러시는 이유가 안다는 거냐?”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다.”

“그럼 짐작하는 바를 얘기해 봐라.”

“막주님께서 백인막을 해체하실 생각을 하신 것 같다.”

“뭐야?”

“구 호, 너 헛소리할래?”

구여풍의 말에 몇몇이 화난 듯 말했다.

“삼 년 전, 생각 나냐?”

삼 년 전이라는 말에 갑자기 모두 조용해졌다.

당시 백인막은 초특급 살수 다섯 명과 특급 살수 다섯 명, 일급 살수 삼십 명 그리고 이급 살수 백 명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백인막이 세워진 후 가장 큰 청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인막의 모든 조직 체계가 완전히 바뀔 정도로 최대의 실패이자 대살상이 일어난 날이었다.

당시 구 호는 막주의 옆에서 다른 살행에 대해 지시를 받고 있던 중에 그 소식을 들었었다.

“삼 년 전 일을 꺼낸 이유가 뭐냐?”

“그때 막주님께서 혼잣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뭐라고?”

“누군가 백인막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하셨다.”

“그게 누군데?”

“나도 모르지. 하지만 막주님께서는 이미 그때부터 백인막을 보호할 계획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모두의 얼굴이 일 호에게 향했다.

막주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자가 바로 그였다.

“막주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셨는지는 내가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열 명의 협공을 받아 낼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난 그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방금 봤잖아? 그의 무공은 우리 열 명이 협공한다 해도 이기기 힘들다.”

“그래, 사 호, 네 말대로 정상적이면 이기기 힘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를 지켜 줄 자라면 암살에도 강해야 한다. 난 그동안 일 호로서 너희에게 한 번도 지시한 적이 없었다. 하나, 이번만은 내 뜻을 따라 줘야겠다.”

‘저 자식…… 또 고집 나오네…….’

한번 결정하면 철회가 없는 일 호의 성정을 아는 모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백인막의 지휘는 번호가 가장 앞서는 자가 맡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 * *

“소군.”

“예.”

“그자가 정말 태양천의 철뇌마궁이라면 거의 전설이 된 자인데, 그런 자가 왜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노렸을까?”

담수련은 계속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찰단이 속해 있는 어사대와 태양천은 원나라의 황제를 보위하는 최측근 조직이라고 들었습니다. 대공이 저희를 제거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사로잡으라고 현상금까지 걸었던 자들이 왜 갑자기 우리를 제거하는 것으로 선회했을까?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선회한 것이 아니라, 저희를 제압해서 끌고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무공이 약한 그녀로서는 눈으로 본 것만으로 판단해야 했으니 당연히 죽이려는 것으로 보였지만, 악불군의 판단은 달랐다. 그자의 화살은 상당히 정확했지만 아주 약간씩 비켜서 날아왔다.

물론 거리가 멀어서 정확도가 떨어졌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악불군은 그의 실력으로 미루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군이 그렇게 봤다면 맞을 거야. 그렇다면 그들이 노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소군이라는 게 분명해 지네.”

“…….”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이번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담수련을 노리는 것이라면 철뇌마궁 같은 전대의 전사가 직접 나설 리가 없었다.

“적설은 지금 어디 있어?”

“철뇌마궁의 뒤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딘가에 머물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추적을 명했다는 거야? 왜?”

“철뇌마궁은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서 그자만은 제거할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고수는 그 어떤 고수들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악불군은 그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로 인해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자를 죽이면 태양천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를 제거하려 들 거야. 너무 위험한 생각 아닐까?”

“어차피 태양천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어디론가 숨는다면 모르지만, 지금처럼 계속 강호행을 한다면 끊임없이 그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격언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담수련은 튀어난 돌이 먼저 정을 맞는다는 옛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이 튀어나온 돌이 되고 있다고 느꼈다.

구천마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질색을 할 정도로 악행을 많이 했기에 그들에게 반감을 가진 문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좀 도와주면 명성도 높일 수 있었고, 영온산장이나 광한궁 같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양천은 달랐다. 이미 한 번 중원을 철저히 유린했을 정도로 강한 자들이 많았고, 그 조직력 또한 다른 문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어찰단과 어사대까지 그들을 도울 것이 분명했다.

‘소군을 영웅으로 만드는 계획이 순탄하게 이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태양천까지는 내 계획에 없었어. 어떻게 하지……?’

담수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불군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경우는 무조건 배제하며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태양천의 등장이 그녀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주군.”

둘의 대화가 잠시 멈추자, 악불군의 뒤를 따르던 귀도신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하십시오.”

“태양천이 무림 일에 손을 뗀 것이 이미 사십 년 전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태양천으로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정보는 언제 들으셨습니까?”

“금괴를 바꾸면서 들었습니다. 그들이 돈 세탁도 하지만 정보를 사고 파는 일도 하거든요.”

귀도신영을 말을 들은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그의 말이 자신의 판단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혼자만 알고 계시면 어떡해요?”

약간 질책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에 귀도신영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장강 이북에서 일어난 일들이라고 해서 상관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다음부터 무슨 정보든 듣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그래 주세요. 그런데 악 대협께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신 거지요?”

“지금 원나라가 반군에 밀리면서 하남까지 밀렸다고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태양천이 나선 것은 반전을 위한 마지막 패일 것입니다.”

“아마 고노의 생각이 맞을 거예요. 그래서요?”

“그런데 이런 급한 시기에 왜 철뇌마궁 같은 고수가 여기까지 와서 주군을 노린 것일까요?”

“…….”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악불군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가 이유 없이 움직일 리는 없으니, 제가 태양천의 비위를 거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태양천이 한창 중원 무림인들을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추적은 정말 집요했고,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그들에게 죽음을 당했지요.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은 이번에도 반군을 돕는 무림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귀도신영의 말을 담수련은 상당히 신중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머리가 좋다 해도 어느 정도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올바른 계획을 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고노 생각에는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몸담고 있는 도문에서는 소나기가 내리면 무조건 피하라고 합니다.”

“소나기가 내리면 피하라……? 아주 좋은 말이네요!”

“이따금 관이나 어찰단에서 집중적으로 저희 도둑들을 잡으려고 집중적으로 검거 작전을 펼칠 때, 아무리 걸리지 않은 자신이 있어도 도둑질을 멈추고 숨어 있으라고 합니다. 지금 태양천은 발등에 불이 붙은 상황입니다. 이럴 때는 주군과 아가씨께서 잠시 몸을 숨기시면 그들의 추적도 멈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노.”

“예.”

“방금 태양천이 장강 이북에서만 활동하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듣기는 그랬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당연히 원나라의 황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원래 태양천은 징기스칸의 수호 세력이었으니까요.”

“그럼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황실 수호겠지요?”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 떼로 몰려올 확률이 있을까요? 깊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경험으로 말해 보세요.”

“저는 그런 예상까지는 못합니다. 하나, 그냥 경험상으로 말한다면 절대 못 그럴 것입니다.”

“이유는요?”

“저희를 노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실 수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귀도신영의 말에 담수련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머리가 맹렬하게 움직이며 분석과 판단 그리고 예상과 계획까지 한꺼번에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천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해. 하지만 소군이 그들을 죽인다면 이후 입지가 굉장히 편해질 거야.’

담수련은 중원 무림의 철천지원수인 태양천의 고수들을 악불군이 죽인다면 그가 잠룡세가의 수하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상쇄해 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가씨의 눈이 저렇게 반짝이면 불안한데…….’

담수련을 보던 악불군의 얼굴에는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룡세가에 있을 때는 담수련이 어떤 생각을 하건 불안해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 그녀의 생각과 그의 예상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녀가 무슨 결정을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악 대협.”

“예.”

“철뇌마궁이란 자, 일대일로 싸우면 이길 수 있으니까 그자를 제거한다고 한 거 맞지?”

“궁을 쓰는 자들은 근거리에서는 힘을 못 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장점을 가지고 싸웠을 때도 저를 압도하진 못했습니다. 가까이만 가면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 가서 죽이자.”

“예?”

“그자, 너무 위험해서 죽여야 한다며? 그러니까 가서 죽이자고.”

방금 전까지 태양천을 건드리는 것을 걱정하던 그녀가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악불군의 눈엔 의아함이 담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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