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79화>
179화. 철뇌마궁(3)
담수련은 악불군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의문을 아는지 부언했다.
“이번 기회에 중원의 정파에게 천호무적검이 원나라와 아무 연관이 없고 오히려 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줄 생각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습니까?”
“악 대협은 필요가 없을지 몰라도, 난 필요해.”
아무리 예상과 달랐다 해도, 담수련이 필요하다는데 악불군이 이의를 제기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확실히 실세는 아가씨가 분명해.’
이미 담수련이 실세라고 확신했지만 악불군의 무공을 볼 때마다 다시 긴가민가해지던 귀도신영은, 이제 더 이상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노.”
“예, 아가씨!”
귀도신영의 목소리에 기합까지 들어가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가씨께도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라고 받아 주시면 됩니다.”
“갑자기 웬 충성까지?”
“제가 나이가 들다 보니까 저절로 그래야 할 분을 느낍니다.”
“그래요? 난 그럴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어쨌든! 고노께서는 악 대협이 철뇌마궁을 죽이면 천호무적검이 태양천의 고수를 죽였다고 천하에 소문을 낼 수 있겠어요?”
“소문내는 것은 개방보다 하오문이 더 잘합니다.”
“아가씨, 소문까지 내신다는 겁니까?”
“죽인다고 먼저 말한 분은 악 대협 아닌가?”
“그렇긴 한데, 사실 전 은밀하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문까지 내면 태양천이 계속 저희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라고 그러는 거야.”
“아가씨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악불군의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 그녀가 원하거나 필요해한다면 뭐든 해 줄 생각인 그였지만, 그녀의 안전까지 해치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안전이야, 악 대협이 있는데 문제될 게 있나, 뭐?”
“가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양천에는 무공이 가주님과 맞먹거나 더 강한 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런 자들 여럿이 합공을 한다면 저도 다 막는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알아. 그런데 내 분석에 따르면 그들은 절대 여러 명이 같이 못 와. 우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든.”
귀도신영의 보고를 들은 그녀는 그 짧은 시간에 그들이 철뇌마궁 같은 고수를 여러 명이나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종리 단주님도 만나야 하는데, 저희가 너무 주목을 많이 받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질이 생긴다 해도 그건 아버님의 계획이지, 내 계획은 아니야. 그리고 다짜고짜 공격을 먼저 한 쪽은 태양천이잖아. 우리를 건드리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귀찮게 하는 자들도 적어지는 거야.”
“아가씨, 빙설초로 만든 환은 드셨지요?”
뜬금없는 악불군의 질문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내가 만든 건데. 딱 시간 맞춰서 먹었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걸 물어?”
담무룡의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착한 효녀였던 담수련의 입에서 아버님의 계획이니 차질이 생겨도 상관없다는 투의 말을 듣고서 오음절맥의 부작용이 더 깊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반문에 악불군은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닙니다.”
“그럼 고노는 말과 마차를 구해 놓고 기다리세요. 저와 악 대협은 철뇌마궁인지 하는 자를 제거하고 따라갈게요.”
전대 고수인 철뇌마궁을 제거한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쉽게 할 수가 있을까?
“예,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귀도신영은 조금도 의심 없이 크게 대답하고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담 공자.”
“제대로 말도 못하고 혼자 나와서 죄송합니다.”
“그럴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급히 연락을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담 공자, 아버님께서 행방불명이신 것은 아십니까?”
노인의 말에 담수운의 표정이 흠칫했다.
잠룡세가를 나올 때부터 뭔가 큰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담무룡의 신변까지 이상이 생길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아버지 담무룡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행방불명이라면 혹 시해라도 당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건 저희도 조사 중입니다. 분명 그날 반란이 일어난 것 같긴 했지만 그 이튿날 세가가 너무 조용해서 노부조차 긴가민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날이라면?”
“담 가주께서는 거의 매일 자신의 애마를 찾아와 쓰다듬어 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그날이란 나타나지 않은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담수운이 은밀하게 대화를 나눴던 잠룡세가의 마사를 돌보던 마부 노인이었다.
“그럼 언제 세가에서 나오셨습니까?”
“지금 절강의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군요.”
“제가 나온 이후의 사정은 전혀 모릅니다.”
노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담 공자, 아버님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본 회에 가입할 당시의 초심을 잃지 마십시오.”
담수운은 노인의 말에 약간 노기를 띤 눈으로 반박하듯 말했다.
“지금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지금 총회에서는 담 공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버님께 천하의 불효자가 되면서까지 영웅회에 가입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은 뭐든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진정성을 의심하신다니 정말 당혹스럽군요.”
“담 공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본 회는 세워진 이후 정말 많은 배신자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담 공자께서 배신했다거나 의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믿음이 약간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최대한 에둘러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 담수운이 아니었다.
“총회에 어떻게 해야 그 흔들림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담 공자께서는 잠룡세가를 나온 이후 연락을 끊으셨습니다.”
“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상황이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노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총회에서는 담 공자께서 의지만 있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연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종산은자 선배님께서 제게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전 괜찮으니 그냥 말해 주십시오. 이런 대화가 저를 더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담수운의 입에서 나온 종산은자라는 명호를 어찰단이 들었다면 아마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었다.
그는 어찰단의 제거 명단 첫 장에 적혀 있는 자였다. 알려진 것은 정파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침입할 수 없는 곳에 숨어 들어와 원나라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자였다.
그가 종산은자라고 불린다는 것도 영웅회 안에서 암약하던 첩자가 간신히 명호만 알아내 알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어찰단이 잡으려던 자가 잠룡세가의 마부로 숨어 있었다니, 잠룡세가를 수없이 드나들었던 어찰단으로서는 말 그대로 등하불명(燈下不明)이 아닐 수 없었다.
종산은자는 담수운을 잠시 주시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말은 곡해하지는 마십시오.”
“그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습니다.”
“상단을 만드셨더군요?”
“혼란의 시기에 제 나름대로 할 일을 찾았을 뿐입니다.”
“담 가주께서 준비한 계획입니까?”
“아버님께서는 제게 잠룡세가와는 완전히 무관한 무림 세력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상단을 만든 것은 오로지 제 판단이었습니다.”
“자금과 수하들은 당연히 잠룡세가에 뿌리를 두고 있겠지요?”
“오래전에 잠룡세가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그들과 잠룡세가를 엮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담 공자.”
담수운은 종산은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잠룡세가는 수십 년에 걸쳐 원나라를 도와 중원 무림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에게 죽은 정파의 젊은이들이 수천에 달합니다. 담 공자께서 영웅회에 들었을 때 맺은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본 회가 안전을 약속해 준 범위는 태산의 종가와 담수련 낭자까지입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우선 상단을 비롯한, 담 가주께서 전해 준 모든 재산을 영웅회로 넘기십시오. 거기에는 지금 담 공자님의 주위에 있는 자들까지 모두 포함이 됩니다.”
“재산을 넘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수가 삼백 명이 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주도적으로 움직인 자들이 아니라 아버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까지 기어이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단호한 종산은자의 말에 담수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담무룡의 명령 하나에 이십 년 가까이 자신만 기다려 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두각을 나타내지 않고 있지만, 지금 그들은 상단을 키우기 위해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
담수운이 답이 없자 종산은자는 다시 말했다.
“원나라는 머지않아 하북까지 밀릴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정파가 재건을 시작할 텐데, 일 순위가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입니다. 지금까지 잘하셨는데 이제 와서 대세를 거스르는 결정을 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종산은자는 담수운이 지금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채고는 강하게 쐐기를 박았다.
“얼마간 시간을 좀 주십시오.”
“오래는 드릴 수 없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상당한 물품을 사서 비축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려면 한 달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내가 총회에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연락을 드릴 때까지 정리를 계속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종산은자는 포권을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예전 담수운은 담무룡에게 그깟 권력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중원을 배반했냐며 따진 적이 있었다.
그때 담무룡은 약간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달리는 범의 등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리는 순간 범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결정으로 나만을 믿고 따르던 수많은 수하들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하다면 뛰어내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워진다.’
담수운은 갑자기 그 말이 머리에 떠오르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 * *
적설을 따라 달리던 악불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또 누가 쫓아와?”
“예. 아무래도 저들은 처리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이 갑자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소군.”
“예.”
“백인막 살수들 말이야.”
“예.”
“우리를 공격할 때 하더라도 열흘간은 우리의 명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약속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수하가 되는 것 말고, 처음에 우리를 보호하기로 계약을 맺었잖아?”
“그런 계약을 하긴 했습니다.”
“마 대협도 우리를 따르고 있지?”
“예.”
“우리 뒤를 따르는 자들은 막으라고 그들에게 말해.”
“따라오는 자들이 상당한 고수들인데, 저희 말을 들을까요?”
“밑져야 본전이잖아? 안 들으면 그때 소군이 처리하고, 들어 주면 그걸로 된 거고. 그리고 거기서 소군의 목숨까지 가지고 조건을 붙였으면, 우리도 그들이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
“아가씨 말씀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마진우에게 전음을 날렸다.
[마 대협, 지금 우리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데 아십니까?]
[예, 두 세력입니다. 하나는 구천마성 같고 또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데 상당히 강한 자들입니다.]
[그자들을 좀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철뇌마궁을 제거하려 하는데 그들이 있으면 귀찮아서요.]
[지, 지금 철뇌마궁을 제거하러 가시는 겁니까?]
마진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갑자기 귀도신영과 헤어진 후 속도를 높여서 어디를 가는 것인지 의아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건드렸으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져야지요.]
[알겠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만약 감당하기 어렵다 싶으면 피하셔도 됩니다.]
[우리만이었다면 좀 벅찬 상대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 호가 있어서 가능할 겁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담수련에게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공자님께서 저놈들 처리를 우리에게 맡기셨다. 처음으로 내린 명이니 우리의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 주자.]
마진우는 악불군이 사라지자 모두에게 전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