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82화 (182/472)

<천검지애 182화>

182화. 시험(1)

일 호의 말에 악불군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 호로 불리시던데,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 백인막의 살수들은 이름을 잊고 삽니다.”

“전 살수로 생각하지 않으니, 이름은 알아야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이 상당히 색달랐는지 일 호는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흑석영이라고 합니다.”

“흑 대협께서는 제 약점을 찾아내셨다고 했는데, 그걸 굳이 말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희를 의탁할 분을 찾는 일이지 살인 청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일이 잘 안 되었다고 해도 웃으며 헤어지고 싶지, 원한을 맺을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포기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한번 제 약점이 뭔지 말해 보시지요.”

“저는 악 대협의 가장 큰 약점이 옆에 계신 담 공자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담 공자님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악 대협의 집중력을 분산시킬 예정입니다.”

흑석영의 말에 악불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하나 곧, 웃음을 멈추고 흑석영에게 부언을 했다.

“절대로 흑 대협의 방법을 무시해서 웃은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어제 담 공자님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만약 여러분들 중 다섯이 자신을 공격하고 남은 다섯이 나를 공격하면 어쩔 거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슷한 말을 들으니 담 공자님의 혜안에 놀라 웃은 것입니다.”

“……담 공자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다는 겁니까?”

흑석영도 상당히 놀란 듯 반문했다.

“담 공자님께서는 흑 대협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보시지요. 특급 살수에게 어떤 방법이 있는지,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혀 봐야겠습니다.”

흑석영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약점이 아니었나……?’

담수련을 대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조금의 상처라도 나면 안 될 귀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악불군이 생각 외로 쉽게 허락을 하자 흑석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내 판단이 맞아. 그럼에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우리의 공격을 얼마든지 받아 낼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인가…….’

흑석영은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내일 저녁 사이에 공격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이 몸을 돌리자 흑석영은 갑자기 그의 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악불군과 단둘이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악불군의 몸에서 자연적으로 풍기는 기도에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내공이 높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사 호와 구 호가 왜 저분에게 그렇게 빠졌는지 알 것 같군.’

허리를 편 흑석영의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

악불군의 풍모에 감탄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져 주거나 해 보지도 않고 굴복하는 것은 그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뭐래?”

악불군이 돌아오자 담수련이 슬쩍 물었다. 귀도신영도 궁금한 듯 귀를 쫑긋했다.

“지금부터 공격을 하겠다는군요.”

“어차피 피 흘릴 일도 없는데 뭘 그렇게 뜸을 들인데?”

“아가씨, 백인막은 백 년 가까이 중원 최고의 살수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이십 명의 특급 살수들은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습니다. 지금 열 명의 특급 살수가 노린다면 아무리 주군이라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노는 정말 모르는 게 없나 봐요?”

담수련이 탄복하듯 말하자 귀도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가 하오문의 정보 상인들과 아주 친합니다. 제가 술을 많이 사 줬거든요. 그리고 도둑질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기밀들도 많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자들에게 쫓겨 다녔고요?”

“아이쿠, 아가씨! 제가 원래 진짜 잘 도망다니는데, 그자들만은 정말 이상했습니다.”

귀도신영은 아직 적설의 존재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담수련이 적설만은 자신과 악불군 둘만이 아는 것으로 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군은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살수들의 수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당장 어떻게 할지는 결정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중적으로 익힌 것이 호위 업무니까 거기에 준해서 행동한다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 나를 먼저 공격할 거야. 그래야 소군의 자세를 흐트러뜨려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대한 방비는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귀도신영이 다시 한번 슬쩍 끼어들었다.

“아가씨,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수하로서 무척 부적절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궁금한 것을 못 참습니다. 이러다 갑자기 죽으면 궁금한 것을 모르고 죽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와 소군이 어떤 관계인지가 궁금한 거죠?”

“주군의 제일 부하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대처를 하지 않겠습니까?”

“고노가 언제 소군의 제일 부하가 된 거예요?”

“제이 부하가 없으니 당연히 제일 부하가 되는 거지요.”

“호호호~ 지금 소군에게 다른 부하가 없으니, 고노가 제일 부하인 것은 맞네요.”

“아가씨, 그런 말은 좀…….”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노.”

“예, 아가씨.”

“저와 소군의 관계가 그렇게 궁금해요?”

“엄청 궁금합니다.”

“고노가 보기에는 어떤 사이 같아요?”

“처음에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인 줄 알았습니다.”

귀도신영의 말에 담수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왜 그렇게 보셨어요?”

“주군께서 아가씨를 위하는 모습이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보다 했으니까요.”

순간 악불군의 표정은 곤혹스럽게 변했고, 담수련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고노, 그런 소리는 좀…….”

“놔둬. 고노께서는 맞는 소리만 하시는데 왜? 계속 말해 보세요.”

“그런데 가만히 보다 보니까 연인이 아니더라고요.”

이번에는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럼 뭘로 보였는데요?”

“그다음은 부부인 줄 알았습니다. 서로 위하는 마음이 정말 보기 좋았거든요.”

담수련의 표정이 다시 활짝 펴졌다.

“역시 경험은 무시 못 하는 것 같네요. 그래,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눈치가 빨라서 한 번 보면 그 관계를 단번에 알아내는데, 갈수록 두 분은 알쏭달쏭하더라고요. 그래서 여쭌 것입니다.”

“제게 소군은 오빠예요.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세상에서 제가 가장 믿는 사람이고, 무조건 나를 위해 주는 보호자이기도 해요. 그리고…….”

담수련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악불군에게 먼저 사랑하는다는 말을 못하는 이유가, 여자로서 남자에게 먼저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한 자존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 산다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오음절맥에 걸린 여자가 스물다섯 이상 산 예가 없다는 새편작의 의서 때문이었다.

그것도 상한선이었다. 대부분은 약관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녀가 아는 악불군은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영원히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그런 부담을 남기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악불군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그는 그녀외의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고 크기 때문이었다.

‘뭐야? 내 짐작이 맞았잖아? 중이 자기 머리는 못 깎는다고 하더니, 딱 그거네? 하여간에 무공이 높은 거나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이런 거는 노부보다 못 하구먼.’

귀도신영은 말을 멈춘 담수련의 눈이 악불군에게 향해 있자 슬쩍 악불군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도 사랑이 철철 넘치는 것을 보자 자신에게 할 일이 또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주군의 제일 부하로서 확실하게 충성심을 보일 기회가 생긴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귀도신영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귀도신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 * *

“가주님, 구천마성에서 성주의 친서가 당도했습니다.”

화룡세가의 군사인 추설붕의 말에 화정무는 검미를 찌푸렸다.

“친서? 우리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하는 놈이 뜬금없이 웬 서찰이야?”

“구천마성은 중원 무림이 붕괴된 지금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복건성과 강서성의 중소 문파들을 무자비하게 압박했습니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강서성의 반은 저희가 장악했고, 복건성도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쳤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설마, 우리와 연대라도 하겠다는 거냐 뭐냐?”

“가주님의 짐작이 맞습니다. 서찰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추설붕은 서찰 하나를 화정무에게 전했다. 그러자 화정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곧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말 연대를 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천마황이 갑자기 노망이 들었나?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너무 뜻밖이군?”

화정무가 구천마성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그가 노망이라는 단어까지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남 남부를 장악한 화룡세가는 제룡회의 도움을 받으며 남무림의 패자로 등극을 했었다.

물론 구천마성이 천륭세가의 멸문을 보고는 지하로 숨은 덕도 있었다.

하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화룡세가는 구천마성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천마성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한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구천마성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세력 중 한 곳이다. 달콤한 제안이긴 하지만, 언제든지 뒤통수를 맞을 것이야.”

“그놈들이 뒤통수를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면 됩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고수의 수에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해.”

오룡세가가 서로 도움을 줄 때는 고수의 수에서도 구천마성을 압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화룡무동에서 수련하고 계신 소가주님과 본가의 기대주들이 출관한다면 반전을 시킬 수 있습니다. 더욱이 소가주님께서 본가의 최후 절초를 찾아냈다고 했습니다. 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천마황은 중원 사대무황으로 불리던 절대 고수다. 우성이가 할아버님의 절기를 찾은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아직 구천마황을 상대하기에는 나이가 어리다. 출관을 한다 해도 당장 큰 전력의 증가를 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이다.”

“지금 원나라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본가의 입지는 급전직하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정파 놈들이 체계를 완전히 구축한다면 반드시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래서 화룡세가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문파로 다시 개파하려는 것이 아니냐?”

“아무리 그런다 해도 본가가 원나라에 부역을 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없습니다. 구천마성은 비록 마도이긴 하지만 중원 무림의 한 축입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구천마성을 이용해 부역자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그들과 연대를 하는 위험을 넘어서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내키지 않는데…….”

화정무는 구천마황의 무공이 자신을 많이 능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주님, 근래 본가는 상당한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강서성에 진출하면서 돈의 사용처는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수입은 반 토막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본가가 운용하는 상단에 특별한 물품을 들여와 팔아야 합니다. 구천마성과 연대를 하면 흥항에 들어오는 무역 물품들은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한마디에, 고심하던 화정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선 그들에게 연대를 할 것 같이 바람을 잡아 가며 최대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협상을 해 봐라. 그들이 받아들이면 그때 연대를 생각해 보겠다. 만약 그들이 안 받아들인다면 최소한 우성이와 아이들이 화룡무동에서 출관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보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천호무적검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데, 그놈에 대해 모아 놓은 정보를 가지고 오거라.”

화정무는 악불군의 명성이 남무림에서 너무 커지자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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