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84화 (184/472)

<천검지애 184화>

184화. 보물(1)

악불군이 아무 말도 없자, 힐끔 본 담수련은 마부석과 통하는 앞창을 열며 물었다.

평소였다면 왜 답이 없냐고 채근했을 텐데 지금은 보물 상자에 더 관심이 쏠린 듯했다.

“고노, 이걸 계속 가지고 다닐 수는 없고, 처분은 어떻게 하지요?”

“워낙 고가의 물건들이라, 평범한 장물아비들은 처리를 못합니다. 그래서 특수 장물을 처분하는 자들에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자들은 어디에 있는데요?”

“저희가 직접 찾아갈 순 없고, 먼저 이런 장물이 있다고 연락을 취하면 어디서 만나자고 연락이 옵니다.”

“연락을 어떻게 취하나요?”

“제가 이미 취했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럼 전에 말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그 특수장물을 취급하는 놈들이 이따금 강도가 됩니다. 무공이 상당히 높은 것을 보아서는 조직에 속한 놈들 같은데, 원체 은밀해서 저희 도문도 꼬리를 못 잡았습니다.”

“많이 당한 모양이네요?”

“오십 명 넘게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죽이면 아무도 찾지를 않으니까, 적당하다 싶은 물건은 값을 쳐 주곤 합니다. 하지만 대단한 귀중품이다 싶으면 확 변하는 거지요.”

“그런 자들은 피하면 되잖아요?”

“그게…… 처분할 목록을 올리면 연락이 오는데, 누가 올지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가의 물건은 믿을 만한 매입자가 나올 때까지 저처럼 숨겨둡니다.”

“소군.”

“예.”

“이건 고노를 반드시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세상에 도둑질한 물건을 강도질하는 나쁜 자들이 어디 있어! 난 그런 자들 너무 싫어.”

담수련의 분개한 모습을 본 악불군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담수련의 악불군의 변화를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뭐야?”

“아가씨 말대로 아주 나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에 눈치가 너무 빨라서 잠시도 방심을 하면 안 된다니까…….’

사실 도둑질 자체가 나쁜 일이니, 그것을 강도질한다 해서 특별히 화가 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악불군이 도둑질한 물건을 처분하는 것조차 탐탁해하지 않고 있는데 보호까지 하라는 말을 하려니 마음이 불편해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생각을 아는 악불군이 자신도 모르게 웃은 것이다.

“고노.”

“예.”

“우리가 확실하게 옆에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비싸게 팔아요.”

“알겠습니다!”

귀도신영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천하의 천호무적검이 자신의 뒷배인데 그에게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귀도신영의 답에 담수련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창을 닫자 악불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응?”

“제가 아는 아가씨는 재물에 별로 욕심이 없으셨는데, 근래 자꾸 돈을 모으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다다익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그런 겁니까?”

“소군, 지금 다니면서 양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봤지?”

“……봤습니다.”

“마음 안 아팠어?”

“아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어?”

“아가씨께서 아픈 사람들 진맥도 해 주셨고, 저는 그들을 괴롭히는 비적들과 사파인들을 제거하거나 쫓아냈습니다.”

“그래,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야.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어. 뭔지 알아?”

지금은 몇 개의 반란군으로 정리가 되었지만 처음 백련교에서 시작한 반란은 전국을 휩쓸었다. 그들은 원나라를 쫓아낸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양민들에게 해를 끼친 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홍건적의 난이 벌어진 후, 중원 곳곳은 치안이 무너지고 상권조차 엉망이 되면서 양민들의 삶은 완전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의 시체를 보는 것은 거의 다반사가 되어 있었다.

“돈이군요.”

“그래, 그들은 양식이 필요하고 입을 옷도 필요해. 그게 다 돈이 없으면 구할 수가 없어. 소군이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돈을 만들 수는 없잖아?”

“제가 아가씨의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이제 저도 돈 버는 일에 신경을 좀 쓰겠습니다.”

담수련의 계획 중 핵심은 바로 무림 세력들과 세력 다툼을 하는 방이 아니라 양민들을 보호하고 돕는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양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아무리 정파라 해도 악불군의 출신을 명분으로 배척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내가 반드시 소군을 무림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 거야.’

담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 악불군을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 * *

커다란 정청.

오십 명은 넘어 보이는 군중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특이하게도 머리를 완전히 깎은 중부터 도관을 쓴 도사 그리고 거지행색을 한 사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때 학사 차림의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회주님 나오십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손에 검을 든 노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머리부터 긴 수염까지 모두 하얀 그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나이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머리색과 어울리지 않게, 큰 눈과 주름살 하나 없는 피부 등 겉보기에는 중년인 같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아미타불! 소림의 무애, 회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무애 대사 오랜만이오. 그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회주라 불린 노인은 반장을 하는 무애 대사를 보며 포권을 하며 반갑게 말했다.

그러자 연이어 사람들이 인사를 시작했다. 노인은 귀찮을 만도 할 텐데 만면에 미소를 지며 일일이 포권을 하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는 사대무황 중 한 명인 천무성궁의 궁주인 천제무황이었다.

인사를 끝낸 천제무황은 상단에 놓인 의자 앞으로 갔다. 그리고 모두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정청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회주가 들어온다고 소리쳤던 학사 차림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영웅회 최고 간부 회의를 개최합니다.”

원나라가 어찰단을 만든 이유가 영웅회의 간부들을 잡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원나라를 괴롭히던 영웅회의 최고 간부들이 오늘 모두 모인 것이다.

중년인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박수와 불호 그리고 도호가 혼합된 웅성거림이 잠시 청 안을 술렁거리게 했다.

“저는 오늘 회의의 진행을 맡은 제갈세가의 제갈우명입니다.”

제갈우명이라는 말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만진선생으로 불리는 그는 어찰단의 제거 목록 첫 장에 기록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웅회의 모든 계획을 만들고 주관한 핵심인물이었다.

제갈우명은 울컥한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염원하던 중원 수복이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다는 감격에 제가 잠시 말을 잊었습니다.”

“짝! 짝! 짝……!”

다시 이어진 제갈우명의 말에 다시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영웅회는 어찰단과 대공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완벽한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하여 이런 대규모 회의는 영웅회가 조직된 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모두 모였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의 주요 안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원나라는 하남 북부까지 물러났습니다. 회주님께서는 이제 다시 문파를 재건하고 중원 무림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십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정청 안은 감격과 흥분으로 생긴 열기로 후끈할 정도였다.

“아미타불, 소림의 무애입니다. 빈승을 포함한 여러 원로들은 이제부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나라가 물러난다 해도 태양천과 오룡세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세외연합 세력 역시 준동하고 있습니다.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는 무주공산인 각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기 위해 벌써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이 보입니다. 회주님께서는 어떤 대안이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무애 대사의 말이 끝나자 제갈우명은 천제무황을 슬쩍 쳐다보았다.

“지금 본 회의 모든 계획은 군사격인 제갈 대협께서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질문은 제갈 대협께 직접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제무황이 힘을 실어 주자 제갈우명은 어깨를 살짝 펴며 답을 시작했다.

“저희 군사부에서도 거기에 대한 방안에 많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여전히 막강하여, 제거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천마성과 혈해사계는 엄연한 중원 무림인이고 원나라에 피해를 입은 것이 확실하기에, 그들을 막는 것도 명분상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혈해사계와 구천마성을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 오룡세가와 태양천 그리고 세외연합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 벅차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제갈우명의 부언에 잠시 청안이 조용해졌다.

영웅회는 중원 무림의 정파가 구심점이 되어 세운 조직이었다. 어찰단과 태양천을 상대하기 위해 나름 상당한 무공을 지닌 후기지수들도 많이 양성했지만, 그 힘이 모두를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갈 대협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고 계십니까?”

점창파의 점창일검의 질문에 제갈우명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천마성은 계속 북으로 세력을 키워 왔지만 근래 잠시 멈칫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혈해사계는 마룡세가와 대치 중이라, 저희들과는 직접적으로 마주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오룡세가를 비롯한 원나라에 부역한 자들을 제거한 연후에 마도와 담판을 지어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잠룡세가와 태룡세가만은 초토화시켜야 합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강과 사천이라는 요충지에 자리 잡은 두 세가는 정파와의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둘은 순수한 중원인이라는 사실이 모두를 더욱 분노하게 하고 있었다.

“원시천존! 무당의 청운입니다. 원나라가 물러나면 새로운 황조의 탄생은 당연히 이어질 수순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 황조는 정국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이고, 무림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당연히 못마땅해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방비책을 있으십니까?”

“남궁세가의 남궁세민입니다. 청운 진인의 말을 이해는 합니다. 하나, 새 황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징치할 자들을 징치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배신을 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풍조가 만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황조가 반대를 한다 해도 중원을 배신하고 부역까지 한 자들은 반드시 죄를 물어 만인의 교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우명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 모든 사안은 각개격파식으로 하거나 개인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강합니다. 아시다시피 영웅회는 원나라가 물러나는 순간 해체하기로 합의가 된 조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정파를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정파를 대표한다면 어떤 조직을 말하시는 겁니까?”

“무림맹입니다.”

제갈우명의 한마디에 정청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리고 정파를 대표하는 모두의 표정도 같이 굳어졌다.

정파의 조직이라는 점에서는 영웅회나 무림맹이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 체계가 달랐다.

영웅회는 협의체로, 회주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큰 상관이 없었다. 또한 언제든지 마음에 안 맞으면 떠날 수 있었다. 점조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러나 무림맹이 되면 모든 명령이 맹주에게서 나오고, 거기에 속한 문파는 맹주의 명을 따라야 했다.

특히 문파의 이익과 상반된 명령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정파에서 무림맹 결성을 꺼려하는 이유였다.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꺼려지는 조직.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먼저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무림맹이 등장한다면 잠룡세가의 천금인 담수련에게 크나큰 영향을 줄 것은 자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