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86화>
186화. 귀화단
“보기만 해도 아름다움이 느껴지시죠?”
담수련의 말대로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황홀한 빛이 모두에게 보였다. 미약한 달빛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낮에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늠이 힘들 정도였다.
“악 대협, 우선 저 도자기부터 회수해요.”
“예.”
악불군의 대답이 들렸다 싶었는데, 어느새 흑면괴인이 들고 있던 도자기를 가지고 담수련의 옆에 서 있었다.
순간 흑면괴인들은 악불군이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을 직감한 듯 불안한 눈으로 귀면괴인을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당신들이 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시작해 보죠.”
“무슨 말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귀면괴인의 입에서 비록 반 존대이긴 하지만 반말이 사라졌다. 그가 겁을 먹은 것이다.
“제가 이 물건들의 가격을 매겨 봤더니 최소한 금자 이만 오천 냥은 받을 수 있겠더군요. 물론, 저희가 여기까지 오는 데 들어간 비용도 있고 하니까 금자 삼만 냥으로 가격을 책정하겠어요. 아, 전 성질이 못돼서 거절하면 당신뿐만 아니라 귀화단 전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으니까, 딴말 말고 당장 금자 삼만 냥을 지불한 뒤에 가지고 가도록 하세요.”
귀면괴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 보지 못했던 상황.
언제나 그들이 가격을 후려치고 강압적으로 물건을 구매했는데, 지금 담수련은 자신이 가격을 책정하고는 당장 돈을 내놓고 가라고 하고 있었다.
거기다 여기 오는 데 든 비용이 금자 오천 냥이란다.
귀면괴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뒤를 한 번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장물하고 정상적인 거래는 엄연히 다르오. 우린 오랫동안 장물을 취급해 왔고, 거기에 따라 적정한 가격을 제시할 뿐이외다.”
“금자 오천 냥은 받을 수 있는 고려청자를 금자 백 냥을 제시한 것이 적정한 가격이라는 말이지요?”
“장물은 처분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오. 거기에 따른 비용과 위험, 그리고 우리도 가져야 할 이익까지 계산해서 나온 가격일 뿐이오.”
“그건 당신들 계산 방법이고요. 내가 제시한 가격은 당신들보다는 분명 합리적인 가격이니까, 더 이상 가격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어요. 살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다 죽을 거예요?”
악불군 앞에서는 어린애 같이 투정도 부리고 삐치기도 하던 그녀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악불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악불군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가마 하나가 공중을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꾼들이 꼭 시체들 같네?]
담수련의 전음에 악불군도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에 거의 십여 장씩을 뛰어오고 있었는데 특별한 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랑님께 인사드립니다.”
귀면괴인과 흑면괴인들을 가마가 도착하자 커다랗게 소리치며 허리를 숙였다.
사방이 막혀 있는 보통 가마와는 달리 기둥과 천장만 있었고, 그 안에 놓인 의자에는 풍만한 몸매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인사하는 괴인들에게는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은 여인은 담수련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전 귀화단의 귀화전랑이라고 해요. 원래 이런 거래에 잘 끼지는 않는데, 너무 귀여운 공자님께서 너무 발칙해서 어쩔 수 없이 끼게 되었네요.”
귀여우니 발칙이니 하는 말은 상당히 나이 많은 어른이 어린애들에게 하는 단어였다. 스스로 귀화전랑이라 소개한 여인은, 비록 말은 높였지만 담수련을 애 취급을 한 것이다.
“하하하!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요. 어쨌든 실세가 나타나신 모양이니 더 잘됐네요. 제가 시간이 없거든요. 빨리 돈을 받고 떠나야 해서요.”
“그 고려청자는 호남 군부의 타카루가 고려에서 받은 귀중품으로 무지 아끼던 거예요. 한마디로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말이지요. 다른 상자에 들어 있는 황금불상 역시 호남 다루가치의 소장품이지요. 그런 물건을 얼마나 받고 팔 수 있을까요?”
귀화전랑의 말에 담수련은 귀도신영을 슬쩍 보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은 것이다. 귀도신영도 그녀가 슬쩍 보기만 하고도 장물들의 출처를 완전히 꿰고 있자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에 대해서 다 아시는 것을 보니 그것들의 가격이 얼마나 높은 물건인지도 아시겠군요? 그런데 그렇게 가격을 후려치다니, 그건 강도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사람들은 현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그런 예술품을 비싼 돈을 살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제시한 가격은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내놓은 것이라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그럼 우리 거래는 안 되겠네요. 원래는 안 사면 죽이려고 했는데 그건 좀 너무 심한 것 같고. 이번 거래는 없는 걸로 하지요. 대신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사용한 비용이 있으니 그거나 주고 가세요. 금자 오천 냥입니다.”
“호호호~ 내가 이런 거래를 한 지 이십 년이 되었지만 공자같이 독특한 계산을 하는 분은 처음이네요. 좋아요. 원래 귀화단은 한 번 가격을 정하면 바꾸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가격 조정을 좀 해 드리지요. 전부 다 해서 금자 천 냥을 드리지요. 더 이상의 가격 조정은 없어요.”
“물건 안 주고도 금자 오천 냥을 받을 판인데 물건까지 주고 금자 천 냥을 제시하다니, 그런 거래를 제가 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얼굴에 엷은 망사를 두르고 있는 귀화전랑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담수련이 뭔가 믿는 구석이 없이 이런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을 제외하고 경계할 만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곧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쯧! 쯧! 눈은 참 똑똑하게 생겼는데 참 미련한 판단을 하는군요. 하긴 벌주를 마시는 것을 일부러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더군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귀화전랑의 몸에서 살기가 살살 피어오르고 있었다.
“천호무적검 악 대협께서 판정을 좀 내려 보시지요. 이 물건들 가격을 얼마나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담수련의 이어지는 말에, 귀화전랑의 몸에서 살살 올라오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놀라기는 귀면괴인과 흑면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가요?”
“당금 천하에서 악 대협의 말처럼 무게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당연히 악 대협께서 판단하신다면 저는 무조건 따를게요.”
“그럼…….”
“잠깐 악 대협, 한 말씀만 먼저 해 주세요.”
“무슨 말을 해 드릴까요?”
“약속이요. 만약 악 대협께서 합당한 가격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여 주세요. 물론 저 역시 악 대협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여도 됩니다.”
‘이것들이 뻔히 보이는 연극을?’
악불군이 진짜 천호무적검이냐는 별개로, 이 자리에 같이 나타났고 조금 전에는 담수련의 말을 따라 귀면괴인의 이빨까지 부러뜨리는 것을 방금 본 그들이었다. 즉, 짜고 치는 상황이 분명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제가 보기에는…… 금자 사만 냥 정도가 합당해 보이는데, 두 분의 의견이 많이 다르니 서로 양보해서 삼만 오천 냥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귀화전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짜고 친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히려 가격을 올릴 줄은 생각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이라는 명호는 이미 모든 세력에게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저는 악 대협의 의견에 동의하겠습니다. 저도 좀 양보하지요.”
“양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삼만 냥을 얘기했으니 양보를 하면 더 낮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군, 간단하게 저 여자 겁 좀 줘. 천호무적검이라는 것을 안 믿는 것 같아.]
담수련의 전음을 들은 악불군은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휘이잉!
악불군의 검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귀화전랑을 향해 날아가더니, 그녀의 가마 주위를 한 바퀴 회전하고는 다시 그의 검집으로 들어갔다.
천호무적검의 이름에 언제나 따라붙는 이기어검의 수법에, 귀화전랑은 악불군이 천호무적검이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에 쐐기를 박는 한마디가 악불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저는 한번 한 말에 반드시 책임을 집니다. 오늘 거래가 잘 마무리된다면 저와 귀화단 간에는 좋은 사이가 유지되겠지만,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귀화단과 저는 사이가 많이 나빠질 겁니다. 물론 오늘 여기 온 분들도 온전히 돌아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귀화전랑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지금 악불군은 무림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영웅의 탄생이라고도 했고, 천하제일의 협객이라는 말도 듣는 자였다. 그런 그가 장물 거래에 끼어들어 이런 협박을 하는 것은 그의 명성에 큰 흠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물론 금자 몇만 냥은 분명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악불군 정도의 명성이라면 소탐대실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천하의 천호무적검께서 이런 시시한 일에 끼어들어 우리 같은 일개 상인을 협박했다는 말이 돌면 명성에 큰 누가 되실 텐데, 괜찮으신가 봅니다.”
귀화전랑 역시 보통 여인은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순화된 말로 악불군의 행동을 비꼬았다.
“전 명성 따위나 명예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제겐 어느 것보다 우선하는 귀중한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귀화단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 잘못된 행동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행동은 고쳐야 한다.’
이 말은 악불군이 살아가는 동안 그가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가장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저희는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 말해 보세요. 단, 거짓말을 하시면 그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담수련의 말에 귀화전랑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금자 오천 냥 정도에 해당하는 전표였다.
그러나 그녀는 금자 천 냥밖에 없다고 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렇기에 자신이 그러한 금액을 불렀다 변명할 생각이기도 했다.
하나, 마치 그녀의 생각을 짐작이나 한 듯 말하는 담수련의 경고는 그녀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런 일에 갈등할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이란 존재는 그녀에게 너무 큰 압박이었다. 특히 귀화단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금자 몇만 냥이 문제가 아니었다.
“금자 오천 냥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우선 그 돈을 넘기세요.”
“돈을 넘기라니? 그 돈에 물건을 팔겠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요. 전 외상도 준답니다. 우선 그 돈만 지불하고 물건은 가져가세요. 대신 나머지 돈은 한 달 안에 갚으시고요.”
“우리가 그 가격에는 사고 싶지 않다면요?”
“귀화단이 사용하는 방법 그대로 돌려드려야지요. 더구나 그 행동으로 악 대협과 귀화단이 척질 텐데, 굳이 그러시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지요.”
귀화전랑은 나름 무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 보여 준 악불군의 이기어검은 자신을 단번에 죽일 위력을 보였다.
그녀는 품에서 전표를 꺼내더니 담수련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전표를 받은 사람은 악불군이었다.
악불군은 전표를 펼쳐 액수를 확인하고 독이나 천리향등을 조사한 후 담수련에게 건넸다.
‘저……놈, 남자가 아니구나.’
귀화전랑은 담수련이 천상신녀라는 것을 직감했다. 천호무적검이라는 명호 자체가 그가 천상신녀를 보호한다하여 붙여진 명호라는 것은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공자께서 천상신녀이시군요?”
귀화전랑은 확인을 하기 위해 슬쩍 떠 보았다.
“제가 이런 물건이 아직 더 있는데, 그때 귀화단을 찾으면 피하지 말고 거래에 응해 주세요. 그러다 신뢰가 생기면 서로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담수련은 그녀의 말에는 답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악 대협, 거래는 끝난 것 같으니 우린 이만 가지요.”
“예.”
귀화단이 꼼짝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며 희희낙락하던 귀도신영은 귀화전랑을 보며 말했다.
“귀화전랑, 억울해하지 마라. 나도 전에 네게 그렇게 당했으니까.”
“긴가민가했는데 맞았군. 천호무적검이 너를 언제까지 보호해 줄까? 오늘 일에 대해서는 네게 분명 책임을 물을 것이니 각오해라.”
“괜한 화풀이를 나한테 할 생각 말고, 이번 기회에 악 대협과 친해질 생각을 해라. 세상이 바뀌면 너희도 안전하기는 어렵다.”
약 올리듯 한마디 한 귀도신영은 마차로 달려가더니 말 고삐를 잡고는 사라졌다.
그들의 뒤를 바라보던 귀화전랑은 분함으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